<대군으로 살어리랏다 5화>
친화력 개오지는 이 인간이 연산군?
***
“저기에 계시옵니다.”
꿀꺽!
윤덕 아저씨의 말에 나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부처님께 빌고 또 빌었다.
제발 갑자기 배탈이 나거나 피치 못 한 신변의 문제가 생겨서 연산군이 있는 곳으로는 인도하지 않게 해달라고.
저잣거리에서 선비들이 하는 말 들었는데, 여기서는 부처를 불씨라 한다지?
왜 불씨라 부르는지 몰랐는데 이제 알겠다.
빌어먹을, 비나이다 비나이다를 존나게 외쳤는데 결국 끌려왔다.
바로 저기.
장막이 쳐진 저곳에 희대의 폭군이라 2018년에도 명성이 자자하신 연산군이 있는 것이다.
“전하께서 기다리시옵니다.”
도살장에 끌려온 것 같은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윤덕 아저씨가 망부석이 된 나를 연신 채근한다.
그래, 저 아저씨가 무슨 죄가 있겠나.
죄가 있다면 빌어먹을 소원도 들어주지 않는 불씨가 죄인이시지.
“다녀오마.”
“예, 쇤네는 이 밑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요.”
장막으로 걸어가다가 고개를 돌렸다.
“덕산아.”
“네?”
“고마웠다.”
“···?”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고마웠다.
솔직히 덕산이 입장에서는 멀쩡하던 주인이 어느 시점부터 백치가 된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타락죽도 뭔지 모르고, 본인이 누군지도 몰랐고, 또 집안의 노복들도 못 알아보며, 뭐 아무튼 이 시대 사람이라면 당연한 것들을 몰랐으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 주인이 실성했다고 남한테 입하나 뻥끗 안 하고 잘 보필해줬다.
뭐, 노비 신분에 입 한 번 잘못 놀렸다간 큰 일 난다는 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궁금한 건 알아 듣기 쉽게 설명해주고, 하지 말아야 할 건 딱 하지 말아야 한다고 친절히 설명 해주기도 했었다.
선생님처럼.
고마운 덕산이를 두고 떠나려니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덕산아.”
“말씀하셔요.”
“만약에 말이다, 만약에······.”
“예.”
“내가 잘못되거든 넌 면천이다.”
“며, 면천이요? 쇤네는 뭐 먹고 살라구 갑자기··· 혹 쇤네가 뭐 잘못한 거라두···.”
아, 갈 데 없는 노비가 면천되면 더 안 좋은 건가?
“밑천도 떼어줄게, 이 자식아.”
“그래도 주인마님 옆에 붙어있겠습니다요.”
“살아온다면야 그게 대수겠냐. 너 장가도 보내줄게.”
“자, 장가라굽쇼?”
“몸매 지리고 와꾸 상타치는 색시로다가······.”
“무,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반반한 색시 구해준다고.”
“저, 저야 감사하긴 한데··· 보아하니 나랏님께서도 사냥 나오셨다가 주인마님 불러 계신 것 같은데 목멱산은 호랑이 없습니다요. 겁먹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냥?
호랑이?
아, 이 녀석은 내가 왕이랑 같이 사냥하다가 호환이니 하는 것들 당할까봐 두려워하는 줄 아는 모양이다.
어리석은 덕산이··· 왕의 본성도 모르는 덕산이··· 주인 심정도 이해 못 하는 덕산이······.
“나, 간다.”
“예, 즐겁게 놀다 오셔요.”
터벅, 터벅.
힘없이 걸어서 장막 앞으로까지 다가갔다.
날 알아본 건지 프리패스 마냥 군사들이 길을 터준다.
차라리 길이라도 막아주지.
그렇게 장막에 도착하자,
“전하, 진성대군께서 도착하셨나이다.”
곧이어 장막 안에서 호탕한 음성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왠 미남자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오! 진성 아우님 오셨는가? 하하! 들게.”
응?
잘 생긴데다 친화력 개오지는 이 인간이 연산군 맞아?
***
“한데 아우님 평소와는 좀 다른 것 같구만?”
뜨끔.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바로 알아 본다.
아니, 못 알아 보는 게 더 이상한 건가?
적당히 둘러대는 게 좋겠다.
“요새 성격을 좀 바꿔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성격을? 왜?”
짐짓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되묻는 연산군.
국사 시간에 배운 그 연산군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어딘가 자상하면서도 인싸 느낌이 물씬 풍긴다.
“형님 전하께서 생각하시기에······.”
“대군마마. 말씀을 삼가시옵소서. 형님 전하라니요. 그 무슨 해괴망측한······.”
“아아, 됐소. 친근하고 좋구만. 그래, 아우님께선 계속 하시게.”
“형님 전하께서 생각하시기에 제 이전 성격은 어땠습니까?”
나야 진퉁배기 진성대군의 성격을 당연히 모른다.
적절한 답변을 내놓기 위해 허점을 파고드는 질문이기도 하다.
“아우님의 이전 성격이라··· 변덕이 심하고 오지랖이 많으며 또 정이 많지 않으셨는가?”
그런 사람이었구나, 이 몸뚱아리 주인이.
썩 좋은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자고로 남자는 나처럼 줏대가 있어야 한다. 변덕이 심하다는 건 마이너스 요인이지.
뭐, 그래도 덕분에 적절한 답변은 떠올렸다.
“그래서 좀 바꿔보려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형님 전하처럼 호탕하고··· 에, 좀 다른 사람한테 살갑게 구는 뭐, 그런 성격으루요.”
“나처럼? 하하하! 이제 보니 우리 아우님께서 날 동경했었구만? 이거, 기쁘기 한량없네. 그래,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요절 한다는 것도 다 어리석은 말장난에 불과하지. 사람이란 무릇 변해야 살아 갈 수 있는 법일세. 자자, 한 잔 받아.”
연산군이 친히 술을 따라준다.
“감사합니다.”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몇 번 오갔다.
첫 만남에서부터 내가 알던 연산군과는 다소 다르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대화를 하면 할수록 그런 느낌에 확신이 들었다.
국사 교과서에서 배운 게 고증이 잘못된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내 편견과는 다르다.
호탕하고, 괄괄하고, 농담도 곧잘한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싸 스타일이랄까?
모임 있으면 무조건 참석하고, 그 모임을 주도하고, 술취한 동기나 선후배 있으면 집까지 바래다 주는 인싸 스타일 말이다.
더 중요한 건 죽도 잘 맞는다.
어떤 죽이냐고?
내가 또 문창과잖나.
다른 동기들이 다 소설 전공할 때 나는 소설과 시도 함께 공부했었다.
둘 다 포기 할 수가 없었거든.
근데 이 연산군··· 색안경 끼고 봤는데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특히 시쪽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원래 시 좋아하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은 없다.
이건 내가 장담 할 수 있다.
일단 내가 시를 좋아하거든.
“내 아우님이 시를 좋아할 줄은 몰랐구만. 아우님께서 한 수 지어보시는 게 어떠한가?”
“제, 제가 말입니까?”
당황스러웠다.
시는 좋아하지만 이 시대 시라는 건 당연히 한시일텐데 난 한시는 잘 모른다. 뭐, 유명한 한시들은 좀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시는 좀······.
이 아니구나?
따지고 보면 내가 알고 있는 유명한 한시들은 거진 연산군 후대에 나온 거 아닌가?
저작권자도 존재하지 않으니 내가 저작권자란 소리잖아?
이거 개꿀인데?
“그래. 아우님의 시 한 수 듣고 싶네.”
“이거 괜히 분위기를 흐리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워낙 실력이 허접한지라······.”
“허, 허접?”
“대감! 예 어느 안전이라고 그런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담으십니까?”
긁적긁적.
허접을 허접이라고 하지 뭐라고 그래, 이 꽉 막힌 노친네들.
“하하하! 됐소, 됐어. 한 수 지어보게.”
역시 화끈하구나, 연산군.
자, 그럼 어떤 시가 좋을까.
‘한산섬?’
냉큼 한산섬이 떠올랐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그 시.
500년이 지난 현대인이 듣기에도 애절한 시였다.
“큼큼.”
일단 목부터 가다듬고,
“한산섬 달 밝은 밤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을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들려온 일성 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무사인가.”
척 하면 척이라더니 역시 문학을 좀 알아.
“그렇습니다.”
“왜구를 토벌한 장수들의 심정이 이러 했겠구나. 애달프다. 참으로 애달파. 병판.”
“예, 전하.”
“이 시를 변방의 장수들이 모두 알게하라. 참으로 기특한 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또 없느냐?”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