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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4화 (4/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4화>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산군이라니!

    ***

    다른 건 다 적응이 됐는데 이 조선말은 당최 적응이 안 된다.

    패초가 뭐지··· 뭘까, 대체.

    추측하자, 추측해.

    패초··· 패초라······.

    “대감?”

    “아, 아아! 그거, 패초? 알죠. 좋은 거잖아요, 그거.”

    초면인 상대에게 밑천이 드러나면 안 된다.

    아니, 애당초 조선 사회에 어두운 나는 누구한테든 밑천이 드러나면 안 된다.

    그런 생각을 3개월 전부터 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지만 그래도 왕자 씩이나 되는 사람인데 조선말이나, 풍습, 문화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 한다고 한다면 무시 당할 것 같기도 하고, 또 괜히 안 좋은 사건에 연루가 될 것 같달까?

    그래서 이번에도 아는 척을 좀 했는데······.

    ‘이게 아닌가?’

    윤덕 아저씨의 표정이 꼭 뭐, 이런 병신이 다 있지? 라는 표정이시다.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전하가 기다린다?

    ‘아!’

    이거, 그거네!

    임금인 내가 여기 있으니까 얼렁 와라.

    예전에 드라마랑 소설에서 본 기억이 이제 어렴풋하게 나는 것 같다.

    “전하는 어디 계시오?”

    자못 비장한 어조.

    그래도 왕이 부른다는데 덕산이나 다른 사람한테 하는 것처럼 싼마이하게 말을 할 순 없어서 하오체를 구사해봤다.

    의외로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목멱산에 계시옵니다.”

    “모, 목멱산이요?”

    거긴 또 어디야.

    “예.”

    “그, 목멱산으로 가면 되는 것이오?”

    “당연한 소릴 하시옵니다.”

    “앞장 서시오. 아, 근데 옷은 안 갈아 입어도 되나?”

    “옷이요?”

    드라마 같은데 보면 임금님 만나러 갈 땐 의관정제인가, 아무튼 옷 갈아 입고 가던데 반문하는 아저씨를 보니 옷은 안 갈아 입어도 되는 것 같다.

    내가 왕 아우라서 특별 대우 받는 건가?

    “아니, 갑시다.”

    “···예.”

    얼떨떨한 표정의 윤덕 아저씨를 보니 왕 앞에 가서는 되도록 말을 아껴야 할 것 같다.

    ***

    윤덕 아저씨를 따라서 목멱산으로 가던 중.

    왕이 있다는 건 안다. 당연하지, 여긴 조선시대니까.

    그리고 내가 그 왕의 아우라는 것도 지난 3개월간 자의반 타의반 추정을 통해 알게 되었다.

    역사에는 젬병이지만 대군이 왜 대군이고 광해군 같은 군이 왜 군인지도 모르는 건 아니니까.

    근데 지금껏 궁금해하지 않았던 게 문득 궁금해졌다.

    왕이 누굴까, 하는 것이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진성대군이란 군호도 낯선 군호였다.

    게다가 노복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XX대감이니, XX 영감이니 하는 사람들의 이름도 죄 처음 들어보는 이름들 뿐이었다.

    박원종이나, 임사홍이나··· 내가 알 게 뭐야?

    아, 임사홍은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역사에 별 관심없는 사람, 그러니까 나같은 사람도 알 만한 이순신이나 유성룡이나 혹은 나 수능 때 개빡치게 만들었던 관동별곡의 정철이나··· 그것도 아니면 정약용이나 이런 사람들의 이름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대충 조선 전기거나 후기로 생각하고 있었다.

    뭐, 사실 그게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지금까진 왕이 누군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었지만 오늘은 정신적으론 아니지만, 생물학적으론 형님되는 분을 처음 만나보러 가는 길이었다.

    그 형님이 누군지 모르고 가는 건 왠지 전쟁터에 총도 안 갖고 가는 기분이 들어서 덕산이에게 왕의 군호가 뭐였냐고 물었다.

    왕의 군호 운운하는 내 질문에 덕산이 펄쩍 뛰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오히려 덕산의 입에서 나온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금상께오서는 봉작을 받지 않으셨습니다요.”

    “군호가 없다고? 왜?”

    속사포로 반문하는 내게 덕산이 어이없다는 눈초리를 보내온다.

    아니, 어이없다는 게 아니라 한심하다는 눈초리 같기도······.

    얼굴이 화끈거리긴 하지만 덕산이에겐 이미 밑천 다 까인지 오래라서 굳이 창피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럴 땐 철면피를 까는 게 제일 좋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군호가 왜 없어? 나도 있는데?”

    역시나 한심스럽게 쳐다본다.

    “금상께서는 성종대왕의 원자로서 세자위에 책봉되신 연후에 곧바로 보위에 오르셨습니다요. 어찌 군호가 있겠습니까요? 어디가서 그런 말씀하시면 정말 큰 일 납니다요, 대감마님.”

    아, 그런 거였구나.

    하긴.

    광해군이니 하성군이니 능양군이니··· 사실 대중적으로 알려진 왕들은 대부분 군호를 갖고 있었던 왕들이라 당연하다시피 군호를 물어서 시대를 유추하려고 했었는데, 저런 거라면 이해가 되지.

    근데 성종대왕이라고?

    ‘성종대왕이면······.’

    나는 중학교 이후 외워본 적이 없던 태정태세문단세를 외워봤다.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 허억!”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

    “여, 연산군!”

    내가 암만 역사에 젬병이라지만 성종의 아들이 연산군이란 것도 모를 정도의 젬병은 아니다.

    그리고 그 연산군이 뭐라고 불리는지 모르지도 않는다.

    희대의 폭군!

    희대의 패륜아!

    희대의 방탕아!

    안 좋은 타이틀이란 타이틀은 죄다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모, 목소릴 낮추십시오. 누가 들을까 두렵습니다요.”

    덕산의 말에 나는 주변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윤덕 아저씨나 다른 사람들은 못 들은 것 같았다.

    “내 형님 전하 군호가 연산군이란 게 진짜냐?”

    “여, 연산군이요?”

    아, 지금은 군호가 없다고 했지.

    그럼 연산군은 어디서 나온 거야.

    중종반정 이후에 나온 건가?

    ‘중종은 어딨을까.’

    연산군의 치세라니 중종이 어딨는지도 예의상 궁금해진다.

    “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어쨌든 연산군이라니······.

    이제 죽는 거 아닐까?

    지난 3개월간 방황을 하고 이제 마음을 다잡았다.

    대군으로 살아보겠노라!

    근데 그 폭군에게 끌려가는 중이었다니··· 정말 죽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영화 《간신》을 보지 말 걸 그랬다.

    한 달 좀 못 되게 썸 탔던 수영이가 다른 거 말고 꼭 이거 보재서 봤었는데 정말 충격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영화가 얼마나 충격적이었으면, 썸 타는 중에 이런 잔인한 걸 보자고 한 썸녀 수영이랑도 바로 연락을 끊어버렸을 정도다.

    ···라는 건 사실 핑계고 성격이 마음에 안 들어서 연락 끊은 거긴 하지만 쬐금, 아주 쬐끔! 그 잔인한 걸 보자고 한 데 대해 정나미가 떨어진 것도 없진 않다.

    “안 가면 안 되는 거냐?”

    윤덕 아저씨가 들리지 않게 조용히 목소릴 낮춰서 덕산이에게 물었다.

    내가 물어볼 사람은 솔직히 덕산이 밖에 없다.

    3개월 전, 밑도끝도 없이 진성대군이 되고 나서 내가 의존할 사람이라곤 덕산이 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한테 울며 불며 매달려봤자, 대군마마가 정신 나갔다는 소리 밖에 안 들을 테고, 또 그런 소문이 퍼지면 왕한테도 끌려 갈 수 있으니 날 어렵게 생각하는 덕산이에게만 늘 자문 아닌 자문을 구했었던 것이다.

    이미 덕산이도 내가 3개월 전과 다르게, 어느 시점부터 반쯤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으니 그게 더 효율적이기도 하니까.

    그런 덕산이에게도 안 가면 안 되냐는 질문은 화들짝 놀랄만한 질문이었던 모양이다.

    “크, 큰일 나십니다요. 패초를 받으시고도 아니 행차하시면 정말 유배 가실지도 모릅니다요.”

    “유, 유배?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 나오는 그 유배 말이냐?”

    “저, 정약··· 누구 말입니까요?”

    “그런 위인이 한 분 있어. 한 20년 유배 생활 했··· 아, 아무튼 안 가면 안 된다는 거지?”

    “절대! 절대! 안 됩니다요.”

    “하······.”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이 이해가 되는 것 같다.

    “하필 연산군이라니··· 세종이나 정조때면 좀 좋아?”

    두 사람은 그래도 성군이라고 불리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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