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회
한국대 도서관.
나는 열람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내 자리 옆에 쌓인 책들은, 모두 ‘만주’에 관한 것들이었다.
<지팡이>에서 하융의 만주 여행이 본격화되고 있다.
그 낯선 곳을 되도록 생생하게 묘사해야 했다.
나는 전생에 만주에 가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내 기억만으로는 <지팡이>를 쓸 수 없는 일.
지금이야말로 ‘자료 조사’가 필요할 때였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많은 자료들이 대부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는 거였다.
당시의 만주는 말도 못하게 척박한 곳이었고,
중국인, 몽골인, 조선인, 심지어 러시아인까지 뒤섞인 지방이었다.
조선인은 그중에서도 가장 하층민 취급을 당했고,
특히 중국인들의 눈치를 많이 봤다.
그래도 이 땅은… 하융에게 굉장히 매력적이었을 거다.
조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은 넓은 땅, 다양한 인종과 언어, 생활 습관….
그런 것들이 모두 새로운 자극이었을 테니.
나는 그렇게 종일 열람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잘 모를 정도로.
책에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다.
반드시 받아야만 하는 한 통의 전화 말이다.
우웅― 우웅―
휴대폰이 울리고, 나는 무심코 이름을 확인했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휴게실로 갔다.
끊임없이 울리는 휴대폰 액정엔, ‘금홍’이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며칠 전, ‘팀 이상’ 회의 전에 나는 슬쩍 말을 흘렸다.
내가 어디론가 떠난다면 어떨 것 같냐고.
그때 금홍은 내게 뭐라고 말을 하려 했는데… 마침 지훈이 와 버려서 뒷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동안 금홍의 말이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묻진 않았다.
그녀 역시 할 말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그게 무엇이건.
“여보세요?”
나는 전화를 받았다.
휴대폰 너머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밖인가?
― 혜경 샘, 어디에요?
“전 도서관이에요. 밖이에요?”
― …저, 혜경 샘 보러 가는 길인데.
“네?”
나는 시계를 봤다.
밤 아홉 시.
갑자기 이 시간에 날 보러 온다고?
“지금요?”
― 네. 지금 얘기하고 싶어서요. 거기 계세요. 제가 갈게요.
“네? 저기…!”
뚝.
전화가 끊겼다.
나는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봤다.
…이게 다 무슨 일일까.
문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단 생각이 들었다.
얼른 자리로 돌아가 가방을 챙기고, 빌려야 할 책을 빠르게 무인 대출기로 가져갔다.
그리고 책을 다 대출했을 때.
우웅―
톡이 왔다.
― 저 한국대 도서관 앞이에요.
…빠르기도 해라.
― 지금 나갈게요.
나는 답장을 보내고 얼른 책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도서관 정문으로 나가니, 정말로 금홍이 서 있었다.
깊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그녀는 날 발견하더니, 어쩐지 결연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갑자기 여기까지 무슨 일이에요.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요?”
“택시 탔죠. 얼마 안 걸리던데요.”
“아… 추운데 어디든 들어가요.”
난 머릿속에서 학교 근처의 카페를 하나씩 떠올렸다.
되도록 영업을 오래 할 만한 곳을.
그런데 금홍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지금 바로 할 말 있어요.”
뭔진 모르겠지만… 올 것이 온 것 같았다.
호기심과 불안감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였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에게 물었다.
“뭔데 그래요?”
“저, 기다려 주세요.”
“…네?”
“…3년만. 아니, 어쩌면 4년.”
“…네?”
갑자기 무슨 소리일까.
3년은 어디서 나온 것이며, 4년은 또 무슨 소리?
좀 차근차근 말해 주면 안 될까요.
라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금홍이 숨을 크게 몰아쉬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울 사람처럼.
나는 굉장히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그녀를 토닥여 주었다.
“괘, 괜찮아요? 차근차근히 말해 봐요. 무슨 일 있었어요?”
그제야 금홍은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듣자 하니… 피터 한 교수의 도움으로 유학을 갈 기회가 생긴 모양이었다.
당연히, 정말로, 두말할 것 없이 최고의 기회.
석박사 통합 과정이면 최소 3, 4년.
3년이고 4년이고 하는 소리가 여기서 나왔구나.
그런데 금홍이 울먹이면서 말한다.
“미안해요. 그런데….”
“….”
“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나를 또렷하게 바라보았다.
지난 며칠 동안 엄청나게 고민을 했겠지.
나에 대한 미안함과 미래에 대한 불안.
그럼에도 놓치고 싶지 않은 기회 사이에서.
나는 금홍의 성격을 안다.
웬만하면 양보하고, 큰 소리를 내지 않고.
혼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성격.
그런 그녀가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을까, 싶었다.
물론.
나도 때마침 <지팡이>를 마치고 어디론가 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타이밍이 좋게 겹치지 않았더라도, 내가 계속 한국에 있게 된다 하더라도….
“잡아요. 그 기회.”
금홍은 유학에 가는 게 맞았다.
난 기다리는 게 맞고.
내가 너무 흔쾌히 대답을 한 걸까.
금홍은 놀란 듯 날 보았다.
“기다릴 수 있어요. 못할 것도 없죠.”
“하지만 4년인데… 그리고 이번 학기만 마치고 바로 갈 거라고요!”
금홍이 되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말했다.
나는 일단 금홍을 데리고 도서관 앞 벤치로 갔다.
그녀의 손을 잡아 보았는데, 얼마나 긴장을 한 건지… 손이 불탈 듯 뜨거웠다.
“…정말 괜찮겠어요?”
금홍이 못 믿겠다는 듯 다시 물었다.
난 좀 장난기가 돌아서, 그녀에게 물었다.
“안 괜찮다고 하면 어쩌려고 했는데요? 안 가려고 했어요?”
“윽….”
금홍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더니, 이렇게 말했다.
“…설득하려고 했죠. 설득할 말도 다 준비했는데… 너무 아무렇지 않게 괜찮다고 하니까.”
그 말에 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설득할 말까지 준비했다니.
저 성격에 어련했을까.
“웃지 마세요. 전 심각한데.”
금홍이 약이 올랐는지 날 퍽, 하고 쳤다.
난 그녀를 그만 놀려야겠단 생각이 들어서,
슬슬 내 계획을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같은 생각이요?”
“<지팡이> 원고를 다 쓰면, 해외로 잠시 떠나고 싶었어요. 새로운 영감을 주는 곳으로.”
“아….”
금홍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금홍 샘이 마음에 걸려서요, 저를 또 기다려 달라고 하기가 좀… 아 물론 저는 3, 4년은 아니지만.”
“….”
“그리고 안 된다고 하면 안 갈 생각이었지만.”
내가 또 은근슬쩍 금홍을 놀리자, 그녀가 나를 곱게 흘기더니 물었다.
“얼마나… 다녀오실 생각인데요?”
그 질문에는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다.
“모르겠어요.”
라고.
“내키는 대로 다녀 볼 생각이에요. 다만, 첫 여행지를 정했어요.”
“어디로요?”
“미국이요.”
“…아.”
“정확히 말하자면, 금홍 샘이 가는 곳.”
내 말에 금홍은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정말이에요?”
“네. 지금 방금 정했어요.”
금홍이 날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별안간 나를 와락 껴안았다.
그녀는 우는 듯한 목소리로 몇 번이나 말했다.
고맙다고, 정말 고맙다고.
금홍은 내게 고맙다고 했지만, 이건 오로지 금홍을 위한 선택만은 아니었다.
떠나고 싶은 욕망만 가득했을 뿐.
어디로 가야겠다는 생각까지는 해 본 적이 없었다.
금홍과 여행을 가는 마음으로… 미국에서부터 그 여정을 출발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 * *
프랑스 파리 리브레 출판사, 편집장실.
해외문학팀 팀장 에바와 사원 장 스테판.
그 두 사람은 마리옹 편집장 앞에 앉아 있었다.
새하얀 투피스 수트를 입은 마리옹 편집장은, 그 특유의 냉정한 눈으로 서류를 살펴봤다.
서류의 내용은 ‘가을 리브레 클럽 기획안’.
두 사람은 긴장한 채 마리옹의 눈치를 봤다.
특히 이번 기획안은 장 사원이 처음으로 주도한 것으로, 그는 지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올해 해외 문학팀 작품들이 그닥이네요.”
일단 부정적 평가로 시작.
장 사원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와중에 그나마 괜찮은 작품을 리브레 클럽으로 넣은 시도는 가상하지만….”
마리옹 편집장이 기획안을 탁, 하고 내려놓았다.
“이토 노부키의 <낮 다섯 시>. 가을 리브레 클럽을 이 작품으로 감당할 수 있겠어요?”
침묵이 흘렀다.
마리옹 편집장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할 말이야 많지만, 일단 마리옹 편집장의 말이 끝나길 기다리는 거였다.
“결과가 납득이 안 가서 그래요. 독자 수요 조사도 하지 않았나요? 그래서 저는 이상 작가의 <지팡이>를 가지고 할 줄 알았는데. 발간되지 않은 원고라, 이상 작가를 설득하는 데에 실패했나요?”
“그런 게 아닙니다. 편집장님.”
에바 편집위원이 못 참고 입을 열었다.
“작가의 허락을 받긴 했습니다만, 그게… ‘타이밍’ 때문입니다.”
“타이밍?”
“…장 사원이 설명할 겁니다.”
장 사원이 눈이 휘둥그레진 채 에바 편집위원을 봤다.
‘제가요? 감히?’라는 표정으로.
하지만 장 사원도 언제까지 에바 편집위원의 뒤에 있을 수는 없는 일.
에바 편집위원도 그걸 알기에, 마리옹 편집장에게 해외 문학팀 상황을 ‘브리핑’할 기회를 넘긴 것이다.
평사원들은 좀처럼 얻을 수 없는 그런 기회를.
마리옹 편집장이 장 사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장 사원은 얼른 정신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편집장님. 가을 리브레 클럽에서 <지팡이>를 넣으면, 에피소드가 마무리된 2부를 다뤄야 합니다. 하지만 작가님과 상의해 본 결과, 리브레 클럽의 주 고객인 중, 노년층에 맞는 이야기는 지금 한창 연재 중인 3부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지팡이>는 겨울 리브레 클럽에서 3부를 중심으로 진행하도록 하고, 이번 가을 시즌은 이토 노부키 작가의 작품으로 진행해 보고자 합니다.”
깔끔한 브리핑이었다.
더 넣을 것도 뺄 것도 없는.
장 사원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혹시 몰라 가져온 <지팡이> 3부의 원고를 내밀었다.
“여기, 지금까지 연재된 <지팡이> 3부입니다. 읽어 보시면 이해에 도움이 되실 겁니다.”
장 사원의 브리핑이 먹힌 건지, 마리옹 편집장은 미덥잖은 얼굴로 원고를 들었다.
에바 편집위원은 장 사원의 등을 살짝 쳐 주었다.
‘잘했어’라는 의미로.
“흐음….”
마리옹 편집장인 낮은 한숨을 쉬며 원고를 읽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첫 줄에서 좀처럼 나아가지 않았다.
“하융이 죽었다… 하융이 죽었다….”
마리옹 편집장인 나지막하게 첫 줄을 읽었다.
그리고 놀라운 속도로 빠르게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아직 3부의 초반부에 머무른 원고.
하지만 마리옹 편집장은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그녀의 명석한 머리로 ‘알 수’ 있었다.
이상이 2부가 아닌 3부로 리브레 클럽을 열길 바란 이유를.
죽음.
그리고 죽음으로 증명될 인생의 의미.
3부는 시작부터 그것을 다루고 있었다.
리브레 클럽의 회원이라면… 빠져들 수밖에 없는 주제가 아닌가.
“<지팡이>는….”
마리옹 편집장이 원고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겨울로 넘기죠. 그게 더 낫겠어요. 두 분 말대로.”
두 사람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마리옹 편집장이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그리고 겨울 리브레 클럽 준비를 좀 더 빨리 시작해요. 할 수 있는 광고를 다 넣어서, <지팡이>의 완결과 리브레 클럽이 같이 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거예요. 이 리브레가….”
“….”
“절대 이상 작가의 책 발간을 놓치지 않는다는 뉘앙스를 풍겨 줘야 해요. 알았죠?”
“…네, 편집장님.”
에바 편집위원이 결연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