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96화 (196/204)
  • 196회

    “저, 교수 그만둡니다.”

    피터 한이 말했다.

    금홍은 절로 눈이 크게 떠졌다.

    “…예?”

    “교수 그만둔다고요.”

    금홍은 적잖이 당황했다.

    그리고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표가 생겨났다.

    언제 그만두는데?

    지도 교수가 되어 줄 수 없다는 뜻인가?

    그럼 다른 교수 밑으로 들어가야 하는 건가?

    미국의 대학으로 돌아가겠단 뜻일까?

    무엇보다도, 일개 학생인 자신에게 굳이 이 얘길 하는 이유는?

    그러나 단 하나조차도 묻지 못했다.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기 때문이었다.

    피터 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금홍 학생.”

    “…예.”

    “학생도 이 대학을 떠나요.”

    “예… 예…?”

    “유학 갈 생각 없어요?”

    …유학?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유학을 다녀오면, 확실히 번역에 도움이 될 테니.

    하지만 금홍은 대학원생이고, 게다가 전공은 영어였다.

    미국의 영어학 대학원?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갈 게 뻔했다.

    “없어요?”

    “…없는데요.”

    “왜요?”

    “사정이… 유학을 갈 만한 건 아니라서요.”

    “내가 추천장을 써 주면? 대학원생도 국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어요. 물론 조건이 굉장히 까다롭지만.”

    피터 한 교수의 추천장.

    그 어떤 학생도 이 교수에게 그런 걸 받은 적 없었다.

    안 받고 안 주는 주의.

    그런 개인주의의 화신이 바로 피터 한이란 인물이었다.

    피터 한은 미국에서도 저명한 번역학자였다.

    굳이 대학 교수를 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런 그의 추천장이면… 유학도 꿈같은 얘기만은 아니었다.

    ‘혹시 미국의 대학으로 가시는 건가? 그리고 날 데려가시는 거라면….’

    “대한 외대를 떠나셔서, 다른 대학으로 가시는 건가요?”

    그러자 피터 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교수질은 성미에 안 맞아서. 더는 안 하려고요.”

    “그럼… 저는 대체 어느 대학으로…?”

    “그건 차차 생각해 봐야겠지만, 적어도 이 작은 대학보다는 큰 곳으로 보내 주죠. 지금 석사 중이니, 가서 석박사 통합 과정을 밟으면 되겠군. 논문 쓰기가 쉽지 않을 테지만… 뭐, 그 정도 각오는 하고 가는 게 맞고. 그렇게 앞으로 몇 년 정도만 나랏돈 받으면서 고생하면 번역가로선 괜찮은 커리어로 남을 텐데.”

    피터 한의 말대로라면… 최고의 조건이었다.

    학비 걱정하지 않고 박사까지 배울 수 있다니.

    그 어떤 학생도 거절하지 않을 일이었다.

    금홍이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의 인생을 바꿀 중요한 기회.

    그 기회는 이렇게 불현듯 다가와 버렸다.

    “<지팡이>가 끝나면 이번 학기도 마무리될 테니 바로 교수직을 내려놓고 미국으로 갈 생각이에요. 금홍 학생도 그 타이밍에 가면 좋을 것 같은데.”

    <지팡이>.

    그 단어를 듣자마자 금홍은 멈칫했다.

    ‘유학을 가면… 혜경 샘과 떨어져야 할 텐데. 그것도 최소한 삼사 년을….’

    <지팡이> 집필 때문에 제대로 시작도 못 해 본 관계.

    지금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언제까지 두 사람이 이도 저도 아닌 관계로 남아 있어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금홍이 망설이자, 피터 한이 그녀의 상태를 바로 눈치챘다.

    그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이상 작가 때문인가?”

    금홍이 흠칫 놀랐다.

    피터 한의 녹회색 눈.

    그 눈은 이미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챈 듯했다.

    금홍은 굳이 아니라 하지 않았다.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두 사람 관계에 왈가왈부하고 싶진 않지만… ‘내 제자’의 커리어를 관리할 자격은 있지.”

    “….”

    “장담하건대, 이런 기회는 평생에 다시 오지 않아요.”

    “….”

    “유학을 떠나기에 딱 좋은 나이, <지팡이> 번역으로 올라간 번역가로서 이금홍의 이름값, 그리고 내가 대학이라는 사회에 힘을 써 볼 수 있는 마지막 타이밍.”

    피터 한의 말이 맞았다.

    모든 일에 ‘때’가 있다면, 금홍이 유학길에 오를 ‘때’는 바로 지금이었다.

    피터 한이 금홍에게 눈을 맞췄다.

    좀처럼 볼 수 없는 따뜻한 시선.

    “금홍 학생.”

    “…네.”

    “당신은 좋은 번역가가 될 자질이 충분해요.”

    “….”

    “그리고 그걸 위해 바로 지금 욕심을 부려야 해요. 무엇보다도 본인의 인생을 위해서.”

    * * *

    오늘은 ‘팀 이상’ 회의가 있는 날이다.

    3부의 첫 회의인 만큼,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약속 장소는 우리가 자주 가던 모 카페.

    지훈은 학부 특강이 하나 더 잡혀 좀 늦는다고 했고,

    금홍은 학교에서 바로 온다고 했다.

    딱히 스케줄이 없는 나는, 미리 도착을 해서 원고를 읽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손 하나가 내 어깨를 짚었다.

    “샘.”

    “어? 왔어요?”

    금홍이었다.

    금홍은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뭐 하세요?”

    “원고 읽고 있어요.”

    “아…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요. 금방 왔어요.”

    우리는 가볍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원고에 대한 논의는 좀 아껴 두고, 자신의 신변잡기와 <그 집>에 대해.

    “<그 집> 표 구하기도 어렵던데요. 더 바빠지시겠어요.”

    “저야 뭐, 따로 홍보나 인터뷰 같은 걸 안 하니까요. 일정이야 똑같아요.”

    “캐나다 쪽에서 <그 집>으로 꽤 긴 비평 하나가 나왔어요. 우연히 발견한 건데, 번역해 드릴까요? 그렇게 특별한 얘긴 아니긴 한데… 그래도 그쪽에서 반응이 온 건 처음이니까요.”

    “그럼요. 해 주세요. 요새 일 많아요?”

    “아, 번역 일이 계속 들어오고는 있어요. <지팡이> 번역 덕인 것 같아요. 웬만하면 거절 안 하긴 해요. 돈을 떠나서, 이게 다 커리어니까요.”

    그렇게 잘 흘러가던 대화가… 순간 뚝 끊겼다.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침묵이 흐르는.

    나는 직감했다.

    지금이야말로 물어야 한다고.

    “저기….”

    “저기….”

    우리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어… 먼저 말해요.”

    나는 얼른 금홍에게 양보를 했다.

    “아니에요. 혜경 샘 얘기부터 들을래요.”

    금홍이 단호하게 말했다.

    뭔가, 그녀 역시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모양인가.

    나는 조금 긴장한 채로, 그녀에게 물었다.

    “만약에 제가… 얼마간 어딘가로 가 있으면… 괜찮겠어요?”

    윽, 내가 해 놓고도 멍청한 질문이었다.

    ‘얼마간’가 어느 정도의 기간인지.

    ‘어딘가’도 얼마나 먼 곳인지.

    하나도 구체적이지 않았다.

    이런 질문을 알아먹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게다가 ‘괜찮겠어요?’라니.

    안 괜찮으면 어쩔 건데?

    내가 이렇게 바보같이 굴고 있는 거로 보아,

    지금 이 상황이 상당히 부담인 게 틀림없었다.

    미안한 마음부터가 어마어마하니까.

    ‘그게 뭔 소리예요?’ 혹은, ‘혹시 어디 가요?’라는 대답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금홍은 의외로 내 말을 알아듣는 눈치였다.

    그리고 상당히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

    “혜경 샘….”

    이라고 금홍이 입을 열었을 때였다.

    “아이고, 늦었습니다!”

    지훈이 계단을 오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는 후다닥 서로와의 거리를 벌렸다.

    “어, 왔냐? 생각보다 빨리 왔네.”

    이 눈치 없는 녀석아.

    “네. 안 늦으려고 겁나 밟았어요.”

    분명 신호위반 했을 거야.

    경찰서에 넘겨야 해, 이거.

    아무튼 나는 속으로 지훈에 대해 툴툴대며, 금홍이 하려 했던 말에 대한 궁금증을 꾹꾹 눌렀다.

    “후우….”

    “형, 왜 한숨 쉬어요?”

    “…네가 빨리 오니까 너무 좋아서. 자, 얼른 회의 들어가자.”

    별수 없다.

    어쨌건 이 모임의 목적은 <지팡이> 3부.

    금홍과의 일은 잠시 접어 두고, 원고에 집중해야지.

    “다들 어떻게 읽었어요?”

    “저, 깜짝 놀랐어요.”

    지훈이 말했다.

    녀석은 아직 외투도 벗지 않은 상태였는데, 굉장한 속도로 원고와 회의에 몰입했다.

    “시작하자마자 하융이 죽었다고 하니까. 집중을 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방금 전까지 모든 걸 다 이룬 남자가 왜 죽었는지… 떠돌이가 되고 싶다고 했던 2부의 마지막과 연결이 되는 건지… 아무튼 정말 강렬하게 환기가 됐어요. 또, 이런 게 있어요. 하융이 죽었음을 밝히고 바로 만주로 가는 하융을 보여 주잖아요. 말하진 않았지만 알려 준 셈이죠. 만주에서 어떤 일들로 인해. 하융이 죽는다는 걸.”

    “맞아. 그 부분 중요해. 그 두 문장을 이어 읽었을 때의 느낌.”

    “네. 여기서 독자들은 느낄 수 있거든요. 하융이 나이 들어 자연사하는 게 아니라, 어떤 특정한 사건으로 인해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걸요. 한 마디로 사고사죠.”

    “그런 느낌이 나? 금홍 샘은 어땠어요?”

    “저도 동의해요. 지훈 샘만큼의 확신은 들지 않았지만 하융의 죽음과 관련된 일들이 곧 펼쳐지겠구나… 하는 예상은 돼요. 게다가 ‘하융이 죽었다.’ 이 한 문장이 곧 하나의 문단이잖아요. 그럼 강조가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금홍이 차분하게 말했다.

    지훈이 오기 전 뭔가를 망설이는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우리 둘 다, 완벽한 ‘일 모드’랄까.

    “혜경 샘이 원하신다면… ‘죽음’이라는 글자를 두껍게 하거나 이탤릭체로 바꿀 수도 있어요. 좀 더 강조를 하는 거죠.”

    글자 자체를 강조하기.

    영미권 문학에서는 흔히 쓰이는 기법이었다.

    분명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긴 할 테지만….

    “일단은 그냥 둘게요. 이미 충분히 강조를 해 둔 터라.”

    “그래요. 그럼 이 부분은 그냥 둘게요.”

    금홍이 ‘죽음’이라는 글자에 동그라미를 쳤다.

    “지훈아, 하융이 기차에서 만나는 배우는 어땠어?”

    “음… 일종의 거울상이라고 하죠. 하융 자신을 비추는 것 같은 인물.”

    “맞아. 하융과 굉장히 닮았지.”

    “꽤 묘한 느낌이 들어요. 하융과 닮았는데… 하융과 말투라거나 그런 게 한 끗씩 다른 거예요. 그래서 이 배우가 하융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상당히 궁금해진달까요… 거울상이 하는 역할이 그렇잖아요.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데, 그 결과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거나 혹은 미워하게 되거나.”

    “그래. 그 부분이 중요해. 하융은 이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기회를 얻은 거거든. 원고의 끝에서 보여진 것처럼, 하융은 이 배우와 예술활동을 할 거야. 하융이 글을 쓰면, 배우가 1인극을 하는 거지. 그런 식의 행위예술을 하면서 만주를 떠돌게 할 생각이야.”

    “행위예술이라.”

    “모든 예술은 곧 행위예술이니까. 글쓰기조차도. ‘개념’만으로는 예술이 될 수 없어. 구체적인 행위가 뒤따라 줘야 하지.”

    그때 금홍이 말했다.

    “그 말,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원고의 마지막에 보면 하융이 배우에게 이런 말을 하잖아요. ‘나와 함께 예술 한번 해 봅시다. 생각과 행위가 만나는 거요.’ 이 부분이요. 이 ‘생각’의 번역을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철학’이나 ‘개념’이란 뜻을 가진 단어를 선택해서, 말의 무게를 더 묵직하게 줘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해도 괜찮겠어요?”

    “음… 좋은 생각 같아요. 안 그래도 그 부분은 샘이랑 상의를 하려고 했거든요.”

    ‘팀 이상’의 호흡은 이제 이렇게까지 잘 맞았다.

    서로가 어느 부분을 궁금해할지 예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잠시 후 무사히 회의가 끝나고, 금홍은 기숙사 일 때문에 바로 들어가 봐야 한다고 했다.

    “엥? 같이 저녁 먹고 가요.”

    지훈이 아쉬운 소리를 했지만, 금홍은 딱 잘라 거절했다.

    “제가 기숙사 사감인데 늦으면 그게 무슨 꼴이에요.”

    금홍은 가방을 다 챙긴 후.

    테이블을 떠나기 직전, 이렇게 말했다.

    “연락할게요.”

    그 말은 으레 하는 인사처럼 들렸지만, 난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조만간,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이야기를 할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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