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회
떠나고 싶다.
새로운 영감을 주는 곳으로.
내 머릿속에는 그 생각뿐이었다.
눈앞의 지훈과 금홍이 점점 흐려질 정도로.
그런데 이상했다.
나는 원래 갈등을 많이 하는 성격이 아니다.
특정한 욕망이 생기면 그것을 결정으로 만들고, 그 결정을 바로 실행하는 데에 두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왜 망설이고 있지?
왜 떠나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형, 형?”
“어?”
지훈이 날 툭 쳤다.
난 그제야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저 전화 좀 받고 온다고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해요?”
지훈이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쥐곤 말했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어. 갔다 와.”
지훈이 룸에서 나가고,
금홍과 나는 단둘이 남았다.
“무슨 일 있어요? 갑자기 멍해지시던데.”
금홍이 내게 물었다.
“아, 그냥 내일 시사회 생각했어요.”
“흐음… 아닌 것 같은데.”
금홍이 날 빤히 봤다.
그녀는 눈치가 빠른 편이다.
내가 웬만한 생각으론 멍해지지 않는다는 걸 아는 거다.
“고민 있으면 편하게 말해 줘요.”
금홍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망설이는 이유는… 금홍 때문이라는 걸.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의 관계.
우리는 아직 연인이라기보단 동료에 가깝다.
<지팡이>를 끝내기 전까지는, 그렇게 하기로 했지.
그녀나 나나 <지팡이>에 집중해야 하니까.
나는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또다시 나를 기다려 달라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 * *
<그 집>의 시사회는 종로의 모 영화관에서 열렸다.
영화의 제작 관계자는 나뿐이라, 시사회 손님은 모두 내 선에서 초대해야 했다.
딱히 인맥 자랑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팀 이상’과 영화 평론가들, 조인후 감독.
그게 내 모든 손님이었고, 나머지는 관객들로 채워졌다.
내 자리는 영화관의 맨 앞줄.
조인후 감독의 바로 옆이었다.
“떨리죠?”
그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생각보다는요.”
소설은 작가와 독자의 거리가 멀다.
하지만 영화는… 조금 달랐다.
내 작품을 평가해 줄 평론가와 관객들이 바로 뒤에 있다니.
떨리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
하지만 나는 내 작품을.
그리고 조나단 감독을 믿기로 했다.
시사회 사회를 맡은 아나운서의 유려한 오프닝 후, 영화는 바로 상영되었다.
두 시간 가량의 길지 않은 러닝타임.
나는 이미 본 영화였으므로, 조나단 감독의 마지막 편집점을 중심으로 감상했다.
어떤 장면은 잘려 나갔고, 어떤 장면은 뒤늦게 추가된 것 같았다.
조나단 감독의 고민이 엿보였다.
결과적으로도 나쁘지 않았고.
그리고 대망의 ‘그 장면’.
수지와 양오빠가 취조실에서 마주하는 부분이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적잖은 상의를 했다.
합의를 본 부분은, 바로 수지의 눈동자.
수지의 눈동자를 통해 양오빠에 대한 그녀의 감정 변화를 보여 주고자 했지.
다만, 나는 그 눈동자에 양오빠의 후광을 담고자 했고, 조나단 감독은 어린 양오빠의 모습을 담고자 했다.
그리고 마지막 선택은 조나단 감독에게 맡긴 상태.
그는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카메라가 수지의 눈동자를 클로즈업 한다.
수지의 눈꺼풀이 아주 살짝 떨린다.
침묵.
영화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건 이 영화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살짝, 하지만 확실하게.
수지의 눈동자에 빛이 비춰졌다.
…양오빠의 후광이었다.
그 빛은 점점 선명해지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양오빠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 냈음을 의미하듯.
아무래도 조나단 감독은… 내 의견을 받아들여 준 것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꽉 쥐었던 손을 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있었다.
정말 중요한 장면이라, 긴장을 한 모양이었다.
“멋지네요. 저 장면.”
옆에서 조인후 감독이 속삭였다.
나는 말 없이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죄를 인정한 양오빠가 수갑을 찬 채 버스에 오른다.
수지는 그런 양오빠를 가만히 바라본다.
그리고 양오빠 역시 그녀를 빤히 바라본다.
교차하는 남매의 시선.
그리고 그 사이에서 망설이는 듯한 카메라의 움직임.
망설임 끝에, 카메라는 오빠에게로 다가간다.
정확히는 그의 눈동자로.
섬뜩하리만치 푸르고 아름다운 백인의 눈동자.
그러나 어딘가 텅 빈 듯한 그 눈동자 속으로, 카메라 시야는 빨려 들어간다.
그 어둠 속으로 완전히 잠식된 화면.
작품의 끝을 알리는 ‘Fin’이라는 글자가 뜬다.
이어지는 엔딩 크레딧.
조나단 감독의 이름과 내 이름.
동시에 가장 윗줄에 오른다.
짝, 짝, 짝짝짝… 짝짝―!!!
박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우레와 같이 큰 박수는 아니었다.
아직 생각할 거리가 남았다는 듯.
혹은 아직 영화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듯.
낮고 느리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박수.
영화관에 불이 켜졌다.
그래도 박수는 끝나지 않고 이어졌다.
사회를 맡은 아나운서는 당황하는 얼굴로 마이크를 든 채 기다렸다.
조인후 감독이 내게 말했다.
“작가님. 일어나셔서, 관객들을 향해 인사를 해 주세요.”
아, 그래야 하는 거구나.
나는 일어나서 뒤를 돌아보았다.
수많은 관객들의 눈이 차차 내게로 와 닿았다.
뭔가에 홀린 듯 박수를 치던 이들을 향해, 나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짝짝짝짝짝짝짝짝짝!!!!!
더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 박수와 환호.
기다렸다는 듯 눌러대는 기자들의 셔터에, 나는 다시 앉을 타이밍도 잡기 어려울 정도였다.
마침 아나운서가 입을 열었다.
“자, 이상 작가님과 조나단 감독님의 합작 <그 집>, 박수가 끊이질 않는군요. 관객 여러분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상 작가님, 앞으로 나오셔서 한마디 해 주시겠습니까?”
그래,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스크린 앞으로 나갔다.
온갖 카메라가 정신없이 날 찍어 댔다.
이쯤 되니 새 수트를 사서 입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내게 마이크가 전달되었다.
나는 아직도 박수를 멈추지 않는 관객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네, 감사합니다. 작가 이상입니다. 이렇게 시나리오 작가로 인사를 드리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아나운서가 내 곁으로 오더니, 친근하게 물었다.
“네, 작가님. 인사 감사드립니다. 그나저나, 이런 시사회 자리는 두 번째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조인후 감독님의 영화 <내외인>의 원작자로 시사회에 서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마침 저기 조인후 감독님도 계시네요.”
사람들이 웅성대며 앞자리를 기웃거렸다.
조인후 감독이 슬쩍 일어나 인사를 하고 앉았다.
그러자 기자들도 득달같이 그의 사람 좋은 미소를 찍어 댔다.
“이번엔 원작자이자, 시나리오 작가로서 영화에 참여를 하셨는데 그 소감을 들어 볼 수 있을까요? 혹은, 이 기적 같은 일을 가능하게 했던 마음가짐이나요.”
아나운서가 내게 물었다.
마음가짐이라….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곤, 입을 열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찬물을 끼얹은 듯 영화관이 조용해졌다.
다들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소설 <그 집>을 시나리오로 만들려던 때였죠.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시놉시스를 쓰는데…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았어요. 정식 시나리오 작가님들이 쓰시는 시놉시스용 문장을, 저는 배워 본 적이 없었거든요. 시놉시스 단계를 뛰어넘는 시나리오라는 건 있을 수 없기에 고민 끝에 그림을 그렸어요. 스토리보드로 조나단 감독을 설득하기로 결심한 거죠.”
사람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이건… 어쩌면 내 스스로 약점을 드러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언론이 치켜세우는 ‘천재 작가’ ‘천재 예술가’ 이상.
그 이미지에 흠을 내는 일이니.
하지만 이 이야기는 꼭 들려주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저는 설득에 성공했고 이렇게 영광스러운 자리에 서게 됐습니다. 그날 이후로 종종… 저는 작가의 한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한계가 없는 작가는 없어요. 있다면 그야말로 신이죠. 과거의 작가는 그 한계에 온몸으로 부딪쳐 싸웠습니다. 문장을 다듬고, 밤새워 고통받으며… 그것을 예술이라 생각하면서요.”
“….”
“예술이죠. 당연히, 숭고한 예술적 태도입니다. 하지만 전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요.”
나 역시 전생에 그런 생활을 한 적이 있다.
한 문장이 나오지 않아 며칠을 앓아누웠던 나날들.
술을 마시고 이성을 잃는 방법으로만 창작의 고통을 견디는 나날들.
“‘현대적인 작가’에겐 생각보다 많은 기회가 있어요. 소설, 시, 영화, 드라마, 연극, 하다못해 그림까지도… 하나같이 어려운 길이긴 하지만 손에 닿지 않는 것도 아니죠. 용기가 필요할 뿐.”
이건 내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두 번째 삶을 살며 알게 된, 전생에는 몰랐던 ‘작가의 삶’에 대한 감상이랄까.
“그렇게 따지면 현대의 작가에게 가장 필요한 건 용기인 것 같아요. 자신이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그 작은 알을 깨고 나가는 용기 말입니다.”
나는 우스갯소리로 인사를 마무리했다.
“저도, 앞으로도 용기 있는 작품활동 하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나는 아나운서가 더 질문을 하기 전에, 얼른 자리로 돌아와 버렸다.
그렇게 정신없이 시사회가 끝났다.
‘현대적 작가’에 대한 내 발언은 여러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 재생산됐다.
‘현대적’이라는 말이 하나의 유행처럼 쓰일 만큼.
온갖 영화잡지와 방송국에서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다.
나는 모든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했는데, 딱히 귀찮다기보다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미 다 했기 때문이었다.
더 할 말이 있다면, 그건 <지팡이>로 보여 줄 차례였다.
<지팡이> 3부 초반 원고가 마무리되었다.
이제 다음 순서는 ‘팀 이상’ 회의였다.
* * *
금홍은 교수실 건물 복도를 걷고 있었다.
머릿속엔 앞으로의 일정으로 가득했다.
아직 원고를 살펴보진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이상이 <지팡이> 3부 초반부를 보내왔다.
‘내일이 회의니까… 오늘 읽어 보고… 포인트 잡아 보고… 그리고 이번 주까지 초벌 번역 넘기고… 그럼 또 회의가 있을 테고….’
끝도 없이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금홍은 행복했다.
번역가로서 할 일이 주어졌다는 게, 그리고 그 원고가 그 무엇도 아닌 <지팡이>라는 게, 그녀로선 정말 감사한 일이니까.
‘그런데 피터 한 교수님께서 갑자기 날 왜 부르셨지?’
금홍은 교수실 앞에서 망설였다.
웬만한 연락은 톡으로 하곤 했는데… 그가 학생을 부른다는 건 심상치 않은 일임에 분명했다.
똑똑!
노크를 하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금홍 학생이면 들어와요.
‘…아니면 가라는 건가.’
금홍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피터 한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다.
금홍의 시선이 테이블에 가 닿았다.
고급스런 식기에 담긴 홍차와 과자.
‘무슨 얘길 길게 하려고 차까지….’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부르셨어요, 교수님.”
“앉아요.”
그가 자신의 앞자리를 가리켰다.
금홍은 그 귀퉁이에 슬쩍 앉았다.
그리고 대뜸, 피터 한이 말했다.
“저, 교수 그만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