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91화 (191/204)

191회

“카리스마요…?”

지훈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래, 생각해 보면 피터 한은 대학들이 앞다투어 데려가려 하는 교수.

강의 능력 역시 탁월하다고 정평이 나 있다.

물론 나와 지훈의 피드백이 있긴 했지만… ‘진짜’ 교수의 의견은 한 줄기 빛이겠지.

“네, 카리스마요. 학생들을 압도할 수 있어야 하죠.”

지훈이 침을 꿀꺽 삼켰다.

“어, 어떻게 하는 거죠? 저는 한 번도 그런 걸 해 본 적이 없어서….”

“하아… 이게 연습으로 되는 게 아닌데….”

“…타고나야 하나요?”

피터 한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는요.”

지훈이 울상이 됐다.

금홍과 나는 서를 흘긋 바라보았다.

눈빛을 보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피터 한, 혹시 지금 지훈을 놀리는 건가?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피터 한이 곧바로 지훈의 눈을 응시하며 이렇게 말했다.

“정신 차리십시오.”

“예…?”

“강단에 서야 할 교수자가 그런 어린애같은 얼굴을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아, 네.”

하고서 지훈이 짐짓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두 사람을 관람하는 마음으로, 금홍과 와인잔을 부딪치고 한 모금 마셨다.

“학생들을 마주하면, 딱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예, 교수님. 말씀하십시오.”

“멍청이들.”

“…네?”

“이 멍청이들, 이렇게 생각하시라 이겁니다. 이 무식한 것들. 내 강의를 모두 외워도 내 발끝도 못 따라올 것들. 심지어 그렇게 외워 볼 생각도 안 할 가련한 것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피터 한은 도도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렇게 마인드 트레이닝을 하십시오. 뭐, 사실이기도 하니까 죄책감은 갖지 마시고요. 저도 매 학기 수업마다 그런 생각으로 강의실에 들어간답니다.”

…그렇다면 정말 대단한 교수로군.

저런 생각을 하고 사는데 그토록 존경을 받다니.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피터 한은 아차, 하는 얼굴로 금홍에게 말했다.

“아, 이금홍 학생은 예외입니다. 훌륭한 학생이거든요.”

바람처럼 지나간 칭찬.

금홍은 방금 자기가 뭘 들었는지, 자기도 잘 모르겠단 얼굴로 어리둥절해했다.

피터 한이 지훈에게 날카롭게 물었다.

“알겠습니까, 평론가님?”

“음… 알 것 같기도….”

“교수는 학생과 평등한 존재가 아닙니다. 무조건 그들의 머리 위에 있다는 생각으로, 우매한 그들에게 지식이라는 단비를 내려 주러 왔단 마음으로 그렇게 자신의 우월성을 느끼면 강의를 하세요. 아셨나요?!”

“…네, 네!”

지훈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렇게 때아닌 ‘강의에 대한 강의’가 끝나고,

파티는 차차 정리가 됐다.

피터 한과 금홍이 떠난 후, 우리는 파티 테이블을 정리했다.

워낙 깔끔한 사람들이라 별로 치울 것도 없었지만.

멍한 얼굴로 접시를 쌓던 지훈이 문득 날 봤다.

“형.”

“왜?”

“피터 한 교수님….”

“아, 그 말 너무 신경 쓰지….”

마.

라고 하려고 했다.

하루아침에 카리스마를 갖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괜히 행동만 어색해지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 교수님 너무 멋지지 않아요?”

“…어?”

“저 오늘부터 연습할 거예요. 카리스마.”

하더니 눈에 힘을 준다.

“…카리스마가 연습한다고 되는 거냐?”

라고 이야기하니.

모르는 소리 말라는 듯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살랑살랑 흔들기까지.

그 징그러운 제스처, 어딘가 익숙하다.

저거… 피터 한이 가끔 하던 거 아닌가?

“전 이미 모으고 있다고요. 카리스마.”

그쯤 되니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말려도 들을 것 같지도 않고.

눈에 힘을 풀 생각도 없는 것 같은데.

“뭐, 그래… 힘내라.”

학생들 앞에서 창피나 안 당하길 바라는 수밖에.

당한다면…?

위로나 열심히 해 줄 생각이다.

* * *

이틀 후 아침.

지훈은 아침부터 소란을 떨었다.

첫 강의라고 정장까지 맞춰 입더니, 거울을 노려보며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는 거였다.

심상치 않아 보이는 모습에 나는 슬쩍 다가갔다.

“…뭐 하냐?”

“…마인드 트레이닝. 이 멍청이들, 이 멍청이들, 이 멍청이들….”

…저 쓸데없는 짓을 진짜 하다니.

내가 너에게 진실로 필요한 걸 내려 주마.

“야, 이거나 가져가라.”

나는 들고 있던 작은 병 하나를 내밀었다.

바로 어젯밤 약국에서 산 우황청심환이었다.

“이게 뭐예요?”

“너 심장 터질까 봐.”

“하, 이 형님이 절 뭐로 보고. 제 심장 평안하거든요?”

“싫으면 말든가.”

하고 우황청심환을 뒤로 빼니.

“아! 잠깐만요!”

지훈이 잽싸게 그것을 양손으로 꽉 잡았다.

“…가져가는 볼게요. 혹시 모르니.”

혹시 모르니 같은 소리 하네.

백 프로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실 것 같은데.

아무튼 녀석은 우황청심환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결연한 얼굴로 허리를 꾸벅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잘할 생각 말고 무사히 끝내겠단 생각만 해.”

“이왕이면 잘해야죠. 갔다 올게요!”

피터 한은 적어도, 지훈에게 자신감 하나는 심어 준 것 같았다.

그렇게 지훈이 출근을 하고.

나는 한가로이 커피를 내렸다.

요즘 나는 <지팡이> 3부에 들어가기 전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3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쉬지 않고 원고를 몰아쳐야 함을 알고 있다.

그때를 위해 체력을 비축해 놓는 기분이랄까.

또 한 가지.

떠돌이 하융의 삶을 다루겠다는 ‘내용’은 결정됐지만,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 나갈지, ‘형식’의 면에서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물론 1부와 2부의 형식은 평이했다.

시간과 사건의 순서대로 한 인물의 삶을 보여 줬으니.

3부로 그런 식으로 간다면… 안정적이겠지.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휴대폰을 뒤적거리며 밀린 연락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기자들의 연락은 좀 뜸해졌지만, 문자와 톡이 한도 끝도 없이 쌓여 가서 문제다.

그렇게 쌓인 연락 중에서… 지울 건 지우고, 답할 건 답하던 중.

나는 반가운 톡 하나를 발견했다.

― 작가님, 잘 지내고 계시죠?

바로 조인후 감독이었다.

톡이 온 날짜는… 일주일 전.

도마크에서 주최한 토론으로 정신이 없을 때였다.

나는 죄송한 마음에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다이얼이 가고… 다행히 그가 전화를 받았다.

― 작가님?

“아, 감독님. 죄송합니다. 제가 톡을 이제야 봤습니다. 잘 지내시죠?”

― 아, 하하… 괜찮습니다. 바쁘실 거라 생각했어요. 일본 패널들과 토론 하신 거 잘 봤습니다. 아, 또, <그 집> 티저도요. 아주 멋지던데요?

“<그 집>은 감독님 덕분에 잘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 제 덕분은요. 사무실 자리 빌려 드린 것 정돈데요.

“아닙니다. 시놉시스 작업 초반에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아마 완성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난 아직도 기억한다.

내가 처음 시놉시스를 써갔을 때, 그가 다시 한번 써 보라고 했지.

글로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그 기분은… 정말 충격적이었고.

그때 나는 인정했다.

내 문장은 ‘시놉시스’와 어울리지 않다는 걸.

뭐… 결과적으로는 스토리보드라는 좋은 아이디어를 내긴 했지만.

돌이켜보면 그 경험은 정말 소중하다.

나의 부족함을 인지하고 방향을 틀 수 있는 유연성을 얻었으니.

그랬던 내가 쓴 시나리오가 영화 개봉을 앞두고 있다니.

그저 고맙다는 말로는 좀 허전한 느낌이다.

― 별말씀을요. 그냥 안부 차 연락을 드린 거였는데 잘 지내시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저기, 감독님.”

― 네?

“혹시 오늘 괜찮으시면… 저희끼리 소소하게 축하주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 축하주요?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던 걸까.

“아, 혹시 바쁘시면….”

― 좋지요. 아주 좋습니다.

“정말입니까?”

― 그럼요. 작가님 뵙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시간 내주실 때 봐야지 않겠습니까. 허허….

“아… 제발. 그런 말씀은… 아무튼, 그럼 언제가 편하십니까? 제가 감독님 동네로 가겠습니다.”

― 아예 저녁을 같이하도록 하죠. 저희 집으로 오시겠습니까?

“네, 뭐.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요.”

― 술이야 여기 넘쳐납니다. 제가 눈치가 보여서 못 마시고 있죠. 오늘 작가님 핑계 대고 저도 좀 마시려고요. 하하하….

조인후 감독이 호쾌하게 말했다.

음… 감독님의 부인분에게 미움을 받기 싫으면, 적당히 순한 술로 하나 사 가야겠구나.

* * *

그날 밤.

나는 약속대로 연희동으로 갔다.

식탁에는 이미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는데, 웬일인지 부인분은 보이지 않았다.

“부인께서는 보이지 않으시네요?”

“아, 안사람은 모임에 갔습니다.”

“아….”

“제겐 정말 최고의 날이죠.”

하고 조인후 감독이 활짝 웃었다.

하여간 유부남들이란 다 비슷한 것 같다.

나중에 나도 가정이 생기면 저렇게 변하려나.

아무튼 우리는 좋은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했다.

미국에 다녀온 일 하며, 도마크의 <지팡이> 토론 하며… 말하는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별일이 다 있었구나 싶었다.

조인후 감독은 흥미롭게 내 이야기를 들었다.

“작가님은 참, 신기하네요.”

“네?”

“작가님의 개인적인 삶이 <지팡이>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게 느껴져요. 미국에서 허무감을 느낀 점이나 일본에 대한 묘한 감정이나… 모두 <지팡이>에서 보여 주셨잖습니까.”

“음… 맞아요. 하융이란 인물을 만들 때, 제 내면을 많이 반영했거든요. 아무래도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요.”

그러자 그가 씩 웃었다.

“그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랍니다.”

“네?”

“소설가나 시나리오 작가나… 자신의 삶을 작품에 투영하고 싶은 건 당연한 이치죠. 하지만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아요. 자신의 삶과 감정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과 판단력이 필요하죠. 그 부분이 발달되어 있지 않으면 일기를 쓰는 것과 다름이 없어요.”

일기를 쓰는 것과 다름이 없다라….

확실히 내가 글에 내 삶을 담을 때, 나는 나 자신을 마치 남처럼 보곤 한다.

그렇게 남처럼 봐야 철저한 분석이 가능하고, 결과적으로 살아 있는 인물로 탄생시킬 수 있으니까.

“그건 재능입니다, 글 쓰는 것과는 또 다른 재능이죠.”

조인후 감독의 말에 나는 그냥 말없이 웃었다.

재능인지 아닌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난 그저… 나 자신에게 좀 더 냉정한 걸지도.

우리는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미리 준비된 마른안주와 함께, 내가 사 온 청주를 마셨다.

술 도수가 약해 조인후 감독은 좀 실망스런 눈치였지만.

우리는 그때까지도 <지팡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특히 앞으로 이어질 3부에 대해.

하융을 떠돌이로 만들겠다고 말하자, 그가 하하하, 하고 웃었다.

“그건 생각지도 못했는데요. 조선 문학의 정점에 서 있다가 갑자기 모든 걸 버린다….”

그런데 문득 그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작가님. 그런데 하융의 마지막은 어떻게 됩니까?”

“마지막이요?”

“네, 그렇게 떠돌이가 된다니… 3부의 마지막엔 어떻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3부의 마지막은 곧 하융의 마지막이다.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나는 그 마지막을 이미 정해 놓고 있었다.

나는 덤덤하게 그에게 말했다.

“하융은… 죽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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