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회
“저, 그럼 이 얘기 할래요.”
지훈은 손끝으로 계획서의 어느 부분을 짚었다.
그곳에 찍힌 글자는….
‘한국 문학의 현주소’.
“한국 문학의 현주소? 좀 추상적이지 않아?”
“아니에요.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그래요.”
“현직 작가들 소개하게?”
지훈은 ‘어떻게 알았지?’라는 얼굴로 날 봤다.
이 좁은 한국 문단에서 얘기할 게 뭐가 있겠는가.
한국 자체가 인재의 나라인 것처럼, 결국 작가 이야기를 하게 되겠지.
…잠깐만.
“너 설마… 내 얘기 하려고 그래?”
지훈이 한 번 더 움찔한다.
그리고 되레 내게 큰소리를 쳤다.
“형 현직 작가잖아요. 그리고 난 엄연히 특강 강사고. 당연히 얘기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말은 잘한다.
아까까지만 해도 버벅거리고 있었으면서.
이제야 녀석의 마음이 빤히 보인다.
내가 등단을 하고 난 후, 지훈은 내 일정을 나보다 더 잘 꿰고 있었다.
내가 어떤 방법으로 세계로 진출했는지, 어떤 생각으로 작품을 쓰는지, 또 어떤 평가를 받아 왔는지….
매니저인 지훈이야말로 데이터베이스가 많겠지.
…졌다.
성공한 작가의 업계 비밀.
문창과 학생들이 싫어할 수가 없는 주제다.
인정하긴 싫지만 주제 한번 잘 잡았네.
“어휴… 마음대로 해라. 너무 호들갑 떨진 말고.”
“호들갑은요. 전 팩트만 말할 건데요.”
“아무튼, 건투를 빌어요. 지훈 샘.”
우리 하는 꼴을 재밌게 보고 있던 금홍이 말했다.
지훈은 그새 긴장이 풀린 듯, 헤헤 웃으며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안 그래도 불편한 정장을 언제까지 입고 있나 했다.
“그런데 우리, 파티는 언제쯤 할까요?”
금홍이 내게 물었다.
“전 요즘 좀 쉬는 중이라… 나머지 분들이 시간을 맞추셔야 할 것 같은데요.”
“일단… 그럼 주말 어때요?”
주말이면 이틀 후였다.
난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큰 소리로 지훈에게 물었다.
“송지훈! 주말에 파티 괜찮아?!”
그러자 지훈의 방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 완전 괜찮죠!
“주말에 하죠. 지훈이 녀석, 월요일이 강의니까 그 전에 긴장 풀어 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요. 그럼 제가 피터 한 교수님께 여쭤볼게요.”
장담하건대 피터 한 교수도 바로 ‘콜’할 거다.
그 사람이야말로 이 중에서 제일가는 ‘파티광’이니까.
* * *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피터 한 교수는 우리의 제안에 바로 ‘콜’했다.
오래 기다릴 것 없다는 듯 토요일 저녁으로.
저번 파티 때에 내가 음식을 망친 전력이 있으므로, 일찍이 금홍이 집으로 와서 음식을 도왔다.
함께 음식을 만들 수 있다니.
간질간질한 분위기가 날 거라 생각하며 내심 기대했지만.
“페퍼론치노.”
“여기요.”
“마늘 슬라이스.”
“여기요.”
“올리브 오일, 이게 다예요?”
“…더 사 올까요?”
“이건 무슨 소금이죠? 죽염 같은데? 천일염은 아닌 것 같고.”
“선물 받은 거라… 모릅니다.”
“파스타 면 좀 건져 주세요.”
“아, 네. 찬물에 헹궈야 하죠?”
“…장난하시는 거죠?”
이런 식이었다.
주방을 진두지휘하는 금홍은 좀 무서웠다.
아니, 좀이 아니라 상당히.
마치… 혜경의 기억 속에 있는 군대의 FM 타입 선임처럼, 우리 집의 모든 조미료는 오와 열을 맞춰 섰고, 모든 조리의 과정은 기계처럼 돌아갔다.
간질간질은 무슨.
혜경의 팔자에도 없던 취사병처럼 바짝 긴장해서 금홍을 도왔다.
뭐… 그렇게 나온 요리들이 일품이긴 했다.
지훈은 오늘도 스피커를 달고, 여러 가지 잡일을 하느라 바빴다.
…가끔 주방을 흘긋거리는 걸 보아하니, 금홍의 기세에 겁을 먹고 주방 쪽엔 발도 들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 손님.
딩동―
초인종이 울리고, 문을 열자 피터 한 교수가 나타났다.
“오셨어요. 교수님.”
지훈이 인사를 하자마자, 그는 음식과 와인을 지훈에게 떠넘겼다.
“디저트를 좀 사 왔는데. 금홍 학생이 요리를 하겠다고 해서.”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피터 한에게, 주방에 있던 금홍과 내가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교수님.”
그는 시크하게 손을 한번 들어 보였다.
그리고 예민하고 작은 짐승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왜 저러지?
“이건 뭔 음악이죠?”
역시, 음악이구나.
안 그대로 낮은 비트의 힙합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훈의 기준에서는 많이 양보한 수준의 얌전한 힙합.
지훈은 득달같이 달려가 노트북 앞을 사수했다.
슬쩍 보니 피터 한 교수도 저번처럼 휴대용 전축을 들고 온 것 같진 않지만….
“…오늘의 파티 음악입니다.”
지훈이 결연하게 말했다.
오늘만큼은 절대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기세로.
피터 한 교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래요. 나도 가끔은 라면을 먹어요. 몇 년에 한 번쯤 내 몸을 더럽히고 싶을 때.”
그렇게 도도하게 말하고 돌아서는 피터 한.
지훈은 부들부들 떨면서도 별말은 못했다.
애초에 지훈의 상대가 안 되는 사람이다.
그러니 지훈도 저렇게 원통하단 얼굴만 하고 있겠지.
아무튼, 나와 금홍 눈에는 그냥 웃기기만 했다.
파티 음악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걸까.
내가 음악의 ‘음’ 자도 몰라서 그런가.
피터 한 교수는 이번에 주방 쪽으로 왔다.
“음식 빛깔이 좋군요.”
웬일로 칭찬을 한다.
하지만 공치사는 아닐 것이다.
금홍이 ‘군대식’으로 만들어 낸 음식들은… 정말이지 빛깔이 끝내줬으니까.
“금홍 학생이 재주가 많네요.”
그리고 씩 웃으며 거실로 갔다.
나는 금홍에게 물었다.
“뭐예요, 애제자라도 된 거예요?”
“음…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교수님 연구실 들락거리는 학생은 저밖에 없으니까요.”
나는 금홍에게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어떤 학생이 그 숨 막히는 곳에 들어가고 싶겠어요.”
그때였다.
“거기, 두 분.”
“아, 네!”
피터 한도 양반은 못 되는 모양이다.
나는 놀라지 않은 척 고개를 빼서 거실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이미 파티용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준비가 다 된 것 같은데. 이제 시작하죠.”
그의 말대로 음식은 다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도 거실로 나가 파티 테이블에 나란히 앉았다.
“1부 끝나고 파티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또 이런 시간이 와서 기쁘네요.”
나는 그들의 잔에 와인을 따르며 말했다.
그냥 따르기만 했는데도 깊은 풍미가 느껴졌다.
얼마나 좋은 와인을 들고 온 건지, 묻기조차 겁이 난다.
“그럼 다음 파티는… 완결 파티겠네요?”
금홍이 새삼 놀랍다는 듯 말했다.
“그땐 좀 더 제대로 된 환경에서 놀아 봅시다.”
라고 피터 한이 말했고, 지훈은 그냥 음악이 좋았는지 비트를 탔다.
아마 피터 한의 말은, 지훈의 보란 듯한 춤사위에 대한 항의일지도.
아무튼 우리는 잔을 맞부딪쳤다.
“건배!”
“축하해요, 혜경 샘!”
“축하해요, 형.”
“다들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도움 많이 받았어요.”
와인을 한 모금 머금으니, 입안 세포 가득히 포도 향이 번졌다.
“좋네요.”
내 말에 피터 한이 으쓱했다.
뭐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
“아, 그런데 작가님, 2부 원고 번역이 끝난 지 좀 된 것 같은데, 3부 원고가 오질 않는 것 같습니다?”
“아, 그게….”
나는 요즘 내 상황에 대해서 그에게 말해 주었다.
잠시 휴식을 가질 겸,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길 기다리는 중이라고.
그러자 피터 한이 말했다.
“흐음… 폭주 기관차처럼 달려가던 <지팡이>도 쉴 때가 온 거군요.”
“대하소설이니까요. 휴식이 없으면 지칠 거예요.”
“이해합니다. 제가 알기론 비축분도 상당하고요. 그래도 대략적인 계획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말은 안 했지만, 그는 <지팡이> 3부가 꽤나 궁금한 듯했다.
어떤 작가는 배우자에게도 소설 줄거리를 미리 알려 주지 않는다지만… 난 괜찮다.
이들은 ‘팀 이상’이니까.
“하융은 모든 걸 버리고 떠돌기 시작해요. 일단 하염없이 여행을 떠나기로 하죠. 일본은 가지 않아요. 하융은 조선 땅에서 충분히 일본을 맛봤으니까. 아예 낯선 곳을 경험하고 싶어지죠. 마음 같아서는 동경하던 서구 세계로 가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이 서구로 가는 건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일단은 중국과 러시아 부근을 떠돌게 되죠.”
“그렇게 떠난 곳에서 뭘 느끼죠?”
나는 멈칫했다.
사실 거기까지는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날카로운 질문이 내 안에 들어오는 순간,
섬광처럼 답이 떠올랐다.
“…세계의 창대함이죠. 북적거리는 조선 땅에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감각 말이에요.”
마치 내가 처음으로 유럽이며 미국이며 하는 곳을 갔을 때처럼.
하융의 여행도 그런 감각에서 출발할 거였다.
“좋네요, 창대함… 지평선조차 만나기 어려운 이런 사람 많은 한반도에서는 잘 느낄 수 없는 감정이죠.”
피터 한이 마치 와인을 마시듯, 내 대답을 음미했다.
“형, 당시 만주에는 조선인들이 많이 이민을 했다잖아요. 그쪽은 어떨까요?”
“맞아. 당시 만주는… 척박한 곳이었지. 그곳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이민을 간 조선인들이 많이 굶어 죽었고. 하융은 돈을 좀 가지고 떠났으니 그런 꼴은 아니겠지만….”
…묘한 기분이 들 것이다.
나는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하게 큰 땅이 주는 창대함과 압도감. 그건 하융의 문학적 시야를 넓혀 줄 거야. 세계관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확장되는 거지. 그런데 만주가 갖고 있는 척박한 삶의 조건, 고통받는 사람들… 그런 요소들을 만나면….”
세 사람은 어느새 내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들도 알고 있겠지.
지금 이 순간이, <지팡이> 3부의 줄기가 될 거라는 걸.
“…하융의 문학적 깊이 역시 깊어질 거야. 하융은… 종횡으로 성장하는 거지.”
“…멋지네요.”
금홍이 중얼거렸다.
지훈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피터 한은 이제 안심이 된다는 얼굴로 식사를 재개했다.
마음을 편하게 먹으려 했어도, 은근히 3부에 대한 부담이 컸던 모양이다.
이렇게 기적처럼 떠오른 아이디어에, 내 속이 확 쓸려 나간 것처럼 시원했다.
“전 정말… 이제는 ‘팀 이상’ 없이는 <지팡이>를 못 쓸지도요.”
내 고백 아닌 고백에 사람들이 웃었다.
그렇게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식사를 하며, 우리는 3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소소한 아이디어와 실증적 자료들.
다들 머릿속에 든 게 많은 사람들인 만큼, 말들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문득, 금홍이 지훈에게 물었다.
“아, 지훈 샘, 강의 준비는 잘 되어 가세요?”
지훈은 바로 울상을 했다.
“말도 마세요. 심장이 벌렁벌렁해요.”
그때였다.
“강의를 하신다고요?”
피터 한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지훈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예, 뭐… 그렇게 됐습니다만.”
“자신이 없으시군요.”
촌철살인.
하지만 정답.
지훈은 울컥했지만,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첫… 강의라서요.”
“처음인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리고 흥미가 생긴 듯 지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강의를 승패를 결정짓는 게 뭔지 아십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훈은 홀린 듯 피터 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뭡니까, 교수님?”
흡사, ‘가르침을 주십시오’라는 얼굴로.
피터 한이 픽, 하고 웃으며 말했다.
“바로, 카리스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