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86화 (186/204)

186회

토론은 점차 열기를 띠고 있었다.

문학 토론 특유의 늘어지는 분위기도 없이, 긴장감과 날카로운 눈빛들이 오갔다.

나는 점점 진지해지는 패널들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이런 토론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문학을 하며 긴장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지 않으니까.

“그럼 이제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미쯔하루 편집장이 말했다.

첫 번째 주제도 상당히 예민했는데… 과연 두 번째 주제는 뭘까.

“이번 주제는… 독일 D―TV의 <철학스터디>의 틸 버켈 철학자의 말에서 파생된 것임을 알립니다.”

그의 안경이 살짝 빛났다.

“틸 버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팡이>와 같은 작품이 존재하는 한, 독일과 일본은 죄책감을 잊어선 안 된다고요.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장내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손대기 무서울 정도로 예민한 질문이었다.

독일과 일본은 다르다.

‘현대 독일’의 시작점은, 전범국으로서의 죄를 인정하며 시작한다.

그러지 않고서야 경제, 사회적으로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는 걸 피할 수 없으니.

물론 그들의 윤리의식이 빛나는 부분이긴 하지만… 그런 ‘전략적 요소’ 역시 없다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일본은 다르다.

일본은 사과하지 않음으로써 자존심을 지키는 방향을 택했다.

피해국의 항의는 모르쇠로 일관하되, 그 외의 국가들에겐 ‘현대 일본’의 좋은 이미지를 덧씌우는 쪽으로.

윤리의식이라곤 전혀 가미되지 않는 간편한 전략.

뭐… 그 전략은 장기적으로는 발목을 잡을 테지만.

어쨌건 확실한 건, 독일의 토론만큼 속 시원한 말들이 나올 확률이 적다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치학자가 입을 열었다.

“죄책감이라… 물론 당시 한국 땅에 피해를 준 선조들은 그런 죄책감을 갖고 있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지금 순수한 마음으로 소설책을 보는 젊은이들, 선량한 시민들이 무슨 죄입니까. 그들에게 죄책감을 강요할 순 없죠.”

그러자 사회운동가가 나섰다.

“일본은, 제 모국이기도 합니다만, 당연히 제2차 세계대전 피해국에 대해 미안해해야 합니다. 선조들의 약탈로 일본이라는 국가의 성공의 기반을 만든 거니까요.”

그는 제법 옳은 말을 했다.

하지만 너무 옳아서, 일본에서 사회 운동을 하기엔 힘들 거였다.

일본인들이 불편해할 이야기를 가감 없이 하지 않는가.

분명 일본에서는 많은 질타와 무시를 받을 것이다.

저런 사람은 국제사회로 나가는 게 더 나을 텐데….

라고 사회운동가에 대한 나름의 평을 내릴 때였다.

갑자기 정치학자가 내게 물었다.

“이상 작가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팡이>를 읽은 일본의 대중들이 죄책감을 갖게 되길 바라시나요?”

치졸한 질문이었다.

마치 내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글을 썼다는 듯.

작가에게 독자는 고객이다.

물론 고객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서비스직은 아니지만,

어쨌건 경제적으로 맞물려 있는 건 현실이니까.

저 말의 진의는 이런 거겠지.

일본 독자들을 송두리째 잃고 싶지 않다면, ‘아니다’라고 대답을 하라고.

그런데 그때였다.

“죄책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스즈키 평론가였다.

“그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논의해야 할 문제는 그것이 문학과 어떤 관계를 맺는냐는 거죠.”

정말이지 적재적소의 발언이었다.

그 순간, 토론의 범주가 ‘역사’에서 ‘예술’로 옮겨졌다.

스즈키 평론가의 저 말 덕에 질문의 의도가 재정립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대한 죄책감은 ‘당연한’ 일이고, 그것과 별개로 <지팡이>를 보고 그 죄책감이 발현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뜻으로.

내게 있어선 더없이 유리한 흐름.

나는 입을 열었다.

“틸 버켈 철학자가 이미 말한 바 있죠. 죄책감을 갖는 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고. <지팡이>를 보시고 죄책감을 느끼는 독자가 있다면, 그분의 의식 저 깊은 곳엔 이미 죄책감이 자리잡고 있었을 겁니다. 소설은….”

“….”

“없던 감정을 만들지 않습니다. 모든 소설은, 심지어 공상과학일지라도… 현실을 토대로 만들어집니다. 현실보다 앞서나가는 소설이란 건 없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일본인 소설가에게 물었다.

토론 전반부에 이미 패배 아닌 패배를 한 그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헛기침만 했다.

그는 아마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님을 눈치챘겠지.

“소설은 그러니까… ‘촉매제’ 같은 겁니다. 현실이 있고, 독자들의 감정이 있다면, 그 중간을 연결해 주는 거죠.”

“대답을 피하시는 것 같은데요.”

가만히 있던 기자가 끼어들었다.

그는 펜을 손끝으로 살살 돌리며 내게 물었다.

“그러니까, 일본인들이 죄책감을 느끼길 바라며 집필을 하셨느냐, 그걸 묻고 싶은 겁니다. 작가의 의도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저기, 기자님. 여긴 취조실이 아닙니다. 그런 질문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보다못한 미쯔하루 편집장이 막아섰다.

기자의 질문이 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제재를 받았음에도, 그는 ‘한 건 했다’는 얼굴이었다.

그가 저렇게 발언함으로써, 소속된 우익 신문사는 이득을 얻을 것이다.

이 토론으로 이미 수십 개의 기사를 냈을 테니.

그 꼴을 그냥 두고 볼 순 없지.

“궁금하시다면, 대답해 드리죠.”

내가 말했다.

그러자 미쯔하루 편집장이 적잖이 당황했다.

“이상 작가님. 적절하지 못한 질문에 반드시 대답하셔야 할 필욘 없습니다.”

“아뇨. 아마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셨을 테니까요.”

“….”

다들 나를 바라보았다.

흥미와 걱정과 긴장감이 가득한 눈들로.

스즈키 평론가의 눈동자만이 차분할 뿐이었다.

“<지팡이>를 통해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장내가 술렁거렸다.

미쯔하루 편집장이 사색이 됐다.

저 멀리 서 있는 지훈의 눈도 커다래졌고.

하지만 내 발언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죄책감뿐만이 아닙니다. 하융이 겪는 인간적인 비애, ‘희’와 ‘심’을 통해 느끼는 사랑, 스승의 죽음 이후 느끼는 복수심과 허무함, 앞으로 일본 제국주의와 얽히게 되며 느껴질 긴장감 등등. 그 모든 것을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죄책감만을 특별하게 여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저는 정말로 궁금하군요. 기자 선생님께서 그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나는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그가 바로 대답했다.

“그거야, 다른 감정은 하융과 공감하도록 되어 있지만, 죄책감은 하융과 관계없이 우리 일본인이 느끼도록 글을 쓰셨기 때문이죠.”

“그렇죠. 일제강점기는 일종의 배경이니까요. 하지만 왜 여러분들은 다른 배경에 대해서 묻지 않으시죠? 일례로 하융의 집안이 지닌 모순은요? 아이에게 안정적인 성장 토양을 제공하지 못한 집안을 비판해야 하는 게 아닌가요? 또한, ‘희’를 두고 ‘심’과 마음을 나누는 하융의 행위는요? 남성의 그런 비윤리적인 행위를 눈감아 주는 전근대적 사회에 대한 반성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건…! 소설이지 않습니까!”

“네! 맞습니다. 소설이죠. 가정의 문제나 비윤리적 연애의 예로 소설을 들 순 있지만, 소설 자체의 내용을 가지고 옳다 그르다를 논하지는 않죠. 소설이니까요!”

그러니까 내 말은.

“그 수많은 문제적 배경 중에서, 일제강점기이기에 ‘당연히 조선인을 핍박한’ 배경 하나만을 문제시하느냐 그겁니다. 마치 조선인을 핍박했던 명확한 ‘팩트’ 자체가 잘못된 것인 양. 이 끈질긴 문제 제기는 결국 현실적 이득과 직결되겠죠. 이를테면 정치적 이득이라거나. 안 그렇습니까, 기자님?”

나는 모든 말을 가감 없이 내뱉었다.

기자는 말이 없었다.

도와달라는 듯 정치학자를 슬쩍 볼 뿐이었다.

나는 그의 시선에 응답하듯, 정치학자를 향해 물었다.

“다른 의견 있으십니까?”

정치학자는 인형처럼 씁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불리한 조건에서는 쏙 빠져 버리는구나.

잠시 그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쯔하루 편집장조차 긴장된 얼굴로 우리의 표정을 살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직 시간은 남았지만, ‘진짜’ 토론은 끝났다는 걸.

그리고 그 결과도… 썩 나쁘지 않다는 걸.

한 가지 걱정이 되긴 했다.

바로 일본의 독자들.

아무리 내가 옳은 말을 한다 해도… 그들을 불편하게 하면 <지팡이>를 떠날 테니.

하지만 그런 걱정도 잠시, 나는 생각을 다잡았다.

어차피 모든 독자를 만족시킬 순 없다.

생각이 다른 독자를 편안히 보내 주는 것도 예의지.

어떤 결과가 나오건… 나는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한 번은 해야 했던 말들이었다.

* * *

토론이 모두 끝난 후.

나는 미쯔하루 편집장과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일본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연락 한번 주시죠.”

“네. 작가님께선 지금은 바로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빨리 나가보려 합니다.”

정치학자, 소설가, 기자 패거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내게 해를 끼칠 위인들은 아니겠지만, 저런 사람들 곁에 더 있을 이유도 없지.

나는 바로 지훈에게로 갔다.

“나가자.”

“네? 아, 네.”

눈치 빠른 지훈이 얼른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호텔 로비까지 단걸음에 나왔을 때였다.

“이상 작가님.”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날 불렀다.

뒤를 돌아보니, 스즈키 평론가가 서 있었다.

“평론가님.”

“잠시, 이야기를 좀 나눠볼 수 있을까요?”

당장 나가려 했는데.

여기에 있다간 누구에게 잡힐지 모르는데.

기자나, 보기 싫은 패널들에게.

하지만 스즈키 평론가를 두고 갈 순 없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하로 이러지는 고풍스러운 계단 아래에 레스토랑이 하나 보였다.

“지훈아.”

“네.”

“괜찮으면 주차장에서 기다려 줄래? 일본 독자들 반응도 좀 살펴 주고.”

“네. 알겠어요.”

지훈이 정문으로 나간 후, 나는 스즈키 평론가에게 다가왔다.

그는 노체를 이끌고 꽤나 힘들게 뛰어왔는지, 아직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지하에 레스토랑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돌아서 앞장을 섰다.

우리는 계단을 내려와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나는 그렇다 쳐도, 다들 스즈키 평론가를 찾을 텐데.

뭐, 미쯔하루 편집장이라면…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지도.

우리는 간단한 음식과 커피를 시켰다.

음식은 앉아 있을 명분이었고, 목적은 커피였지만.

그는 손도 대지 않은 식전 빵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 들으셨던 무례한 발언에 대해 대신 사과드립니다.”

“아닙니다. 나름대로 즐거웠는걸요.”

“….”

“제게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감사하다는 말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작가님.”

나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며칠 전 그가 내게 스치듯 한 이야기.

조선인 외할머니를 둔 바람에, 그의 가정은 조선과 일본의 정치적 싸움지의 축소판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러니 20세기 초반을 그리는 문학을 볼 때마다, 정치적 틀로만 그것을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팡이>를 읽고 나서야, 그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이다.

나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이렇게 말했다.

“그렇군요.”

“참 묘한 작품입니다. <지팡이>는.”

“그런가요.”

“일제강점기를 그린 한국의 소설은 제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합니다. 고통스러워서 읽기가 힘들죠. 하지만 <지팡이>는… 물론, 이성적으론 일본인으로서의 죄책감이 느껴집니다만, 감정적으로는 다른 기분이 듭니다.”

그가 커피잔을 가만히 매만졌다.

나는 왠지 그의 주름진 손끝을 자꾸만 바라보았다.

“어떤 기분이 드시던가요?”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대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그 시절에 살았던 인물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그런 기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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