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82화 (182/204)

182회

피터 한 교수가 말했다.

“저라면 바로 수락을 했을 겁니다.”

그의 말에서 상당한 확신이 느껴졌다.

난 그에게 말했다.

“저도 토론 자체가 두려운 건 아닙니다.”

“….”

“다만, 아마 원고를 받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제 하융은 일제와 본격적으로 얽히고설키게 돼요. 식민지인의 운명이죠.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제가 그런 토론에 참여하는 게 과연 좋은 선택인지 모르겠는 거죠.”

그렇지 않은가.

이제 얼마 후면 <지팡이>는 또 논란에 휩싸일 거다.

아마도 한일 양국 모두에서.

논란 자체는 괜찮다.

내 작품에 대해 씹고 찧는 일을 무서워한다면, 어떻게 내 삶을 담은 작품을 쓸 수 있겠나.

문제는 그 논란 속에서, 내가 토론에서 한 말이나 태도가 분명 회자될 거란 사실이다.

순간의 표정, 말 한마디 같은 것들이, 과잉되고 편협한 해석과 함께 언론과 넷상을 떠돌겠지.

피터 한 교수가 날 가만히 보았다.

“이해는 합니다. 작가가 작품이 아닌 발언으로 주목받는 것만큼 골치 아픈 게 없으니까요.”

“….”

“하지만 이번 사항은 좀 특수하지 않나요?”

“특수하다고요?”

“네. 한일관계잖아요. 해결되지 않은 정치적 이슈 말이에요.”

그건 그렇지.

일제강점기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정치적 이슈’이기에 한일 모두 그걸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니까.

“일본인들이 <지팡이>를 정치적으로 바라보려 애들을 쓰는 것 같은데….”

피터 한 교수가 피식 웃었다.

“그 시각을 바꿔 줄 필요가 있지 않겠어요?”

피터 한은 돌려 말했지만.

나는 그의 말뜻을 확실하게 이해했다.

문학 토론은 기본적으로 문학을 ‘예술’로 보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지금 일본에서의 <지팡이> 토론은 정치적이다.

토론을 연 도마크의 탓은 아니다.

그들은 추후 <지팡이> 발간을 위한 판을 깔았을 뿐이니.

그래, 지금 그들의 토론은… 문학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차원을 넘어섰다.

조금 심하게 표현하자면, 정치에 문학을 이용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

‘작가’로서 그것을 두고 볼 것인가?

작품을 예술이 아닌 정치 소재로 보는 이들을?

피터 한은 내게 그걸 묻고 있었다.

“생각을 좀 해 봐야 할 문제 같아요. 독자의 작품 해석에 왈가왈부해 본 적은 없어서요.”

“하긴. 작품에 대한 논란은 언제나 작품으로 해결하셨죠. 저도 그 점은 굉장히 높게 사긴 합니다. 당신의 뜻을 존중해요.”

시니컬한 말투였으나 진심 같았다.

나는 그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그래도 생각의 여지를 넓혀 주셨네요… 교수님.”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내 잔을 받았다.

“학위가 있다고 교수를 할 수 있는 거 아니거든요. 전 모든 대학원생들을 갸륵하게 여기죠.”

…거짓말.

학생들에게 관심 없다고 정평이 났으면서.

갸륵하다는 말은 또 어디서 배운 거람.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한 것 같았다.

‘대학원생’인 나의 멘토 역할을 해 주었다는 점 말이다.

* * *

피터 한과의 ‘북콘서트 뒤풀이’는 그렇게 ‘대학원생 상담’으로 끝났다.

나는 차를 타고 집에 오며 곰곰이 생각했다.

지금 이 시점에 토론에 참여하는 게 맞는지.

토론에 참여한다면.

지금 일본이 <지팡이>를 보는 정치적 시각을 바꿀 수 있다.

또, 내 삶을 담은 소설이니만큼… 일본에 내 목소리를 좀 더 크게 내 보고도 싶었다.

전생의 내 삶은 일본에 의해 크게 좌우됐기에.

만약 참여하지 않는다면, 어떤 의미로선 방관하는 셈이겠지.

‘작가’와 ‘작품’은 별개라는 원론의 뒤에서.

“흠….”

어느 쪽도 완벽한 답은 아니긴 했다.

하지만 이런 이 상황이 후회되진 않았다.

사실을 기반으로 한 예민한 작품일수록, 많은 논란이 자연스레 뒤따르기 마련이니까.

차를 집앞에 댔을 때였다.

“…안 되겠어.”

나는 휴대폰을 꺼내 주소록을 살폈다.

그리고 미쯔하루 편집장의 번호를 찾았다.

더는 답 없는 고민에 빠져 있고 싶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건… 내가 고려해야 할 마지막 요소, 바로 ‘주최 측의 태도’다.

국제전화 안내가 지나간 후, 꽤 오랫동안 연결음이 울렸다.

아직은 근무시간일 테니 전화를 받을 텐데.

― 이상 작가님?

역시, 받았다.

“미쯔하루 편집장님. 갑자기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 아, 아닙니다. 안 그래도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는걸요.

그는 다소 긴장해서 말했다.

아직 내가 토론 참여 여부를 확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만.”

― 뭐든 물어보십시오. 혹시 토론에 관한 것입니까?

“음… 확실하게 그렇습니다.”

― …말씀하십시오.

그가 결연하게 말했다.

마치 자세를 고쳐 앉는 것처럼.

“일본의 토론은 유튜브를 통해 계속 보고는 있었습니다. 토론의 내용이 상당히 정치적으로 흘러가던데… 그 발언들에 도마크는 완전히 무관합니까?”

― 네. 제 편집장 자리를 걸고 장담 드릴 수 있습니다. 애초에 패널을 선택한 것도 각기 각층의 사람들을 모으는 게 제1 목적이었습니다. 그것이….

“….”

― 일본 사회의 단면을 제대로 보여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상당히 일리 있는 말.

내 소설은 예술가들만 보진 않는다.

반대로 정치가들만 보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지팡이>를 정치적으로 보는 건,

계획되었다기보단 자연스러운 결과물일지도.

일본 사회 자체가 전범국 콤플렉스를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만약 제가 토론에 참여해서….”

― 네.

그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토론의 방향을 정치적인 것에서 다른 것으로 바꿔 놓게 된다면… 그에 대한 도마크의 입장은 어떨 것 같습니까?”

나는 대놓고 그를 떠보기로 했다.

지금 일본에서도 이슈가 되고 있는 <지팡이> 토론.

나의 개입으로 방향이 바뀌게 된다면….

즉, 이 자극적인 정치 싸움이 끝난다면, 이슈는 사그라들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도마크의 입장에선 아쉽겠지.

― 아쉽겠죠. 솔직히.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덧붙였다.

― 하지만 이 토론의 목적은 애초부터 <지팡이>의 발매였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이미 달성했고요. 지금은 <지팡이>가 발매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죠. 많은 독자들이 어서 <지팡이>가 완결이 되고, 종이책으로 발간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

― 저희는 더 욕심부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작가님께 토론에 참여해 달라 요청을 드린 것은… 작가님이 계셔야 이 토론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완성된다라… 제가 작가라서요?”

―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한국’ 작가분이기 때문이죠.

순간 머리가 탁,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지금 일본의 <지팡이> 토론에 한국인은 없다.

그렇게도 정치적인 토론이 이어지고 있는데도.

냉정하게 얘기하면, 어쩌면 도마크는 지금까지 반쪽짜리 토론을 진행하고 있었는지도.

― 그러니 저희 입장에선 작가님을 모시고 싶을 수밖에요.

“…그래요.”

― 예. 그렇습니다.

“참여하죠. 이번 토론에.”

― …예? 정말입니까?

“네. 여러 가지 얘기들을 들어 보니 충분히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기쁜 마음으로요. 그뿐입니다.”

― 아… 아하, 하하… 정말 감사드립니다. 작가님!

“감사는요. 한국까지 와 주시는데, 제가 더 감사하죠.”

미쯔하루 편집장은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쏟아 냈다.

내가 결국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겨우 전화를 끊고.

“후우….”

나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골치 아픈 일에 얽혀든 건 분명했지만, 어쩌랴.

미쯔하루 편집장의 말을 들어 보니 확실했다.

그 토론에는 내가 필요하다는 걸.

게다가 내 작품과 관련된 토론이니….

결국 작가로서 모른 척할 수 없게 된 것이다.

* * *

“네에? 토론을 한다고요?”

함께 저녁 식사를 하던 지훈이 놀랐다.

녀석도 내가 거절할 줄 알았던 것 같았다.

“응. 고민 끝에 그렇게 결정했어.”

나는 덤덤하게 말했다.

이미 결정된 일이 되니, 이상하게도 별다른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저, 이 역시 <지팡이>에 꼭 필요한 과정이란 생각이 들 뿐.

“그쪽 토론 장난 아니던데요. 꼬투리 잡는 기술도 무시 못 하고요.”

“안 잡히면 되지.”

지훈이 ‘하지만….’ 하는 얼굴을 한다.

하긴, 지훈은 그런 식으로 기싸움 하는 거… 정말 싫어하니까.

“아니면 애초에 못 잡게 하든가.”

“역시. 무슨 계획이 있는 거죠?”

“아니.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지.”

“아, 형… 괜찮은 거 맞아요?”

나는 대답 대신 다 먹은 그릇을 개수대에 넣었다.

“어머님께 말씀드려 줘. 매번 반찬 해다 주셔서 감사하다고.”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훈은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결정을 내린 이상, 걱정을 해 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테니.

“그래요. 엄마한테 말해야겠네. 유튜브로 형 토론하는 거 보라고. 우리 엄마 형 팬이거든요.”

그 말은 몇 번이나 듣긴 했다.

그래서 이렇게 음식을 산처럼 보내 주시기도 하고.

사 먹는 밥도 예전에 질렸으니, 감사할 일이다.

“그러니까 꼭 전해드리라구. 정말 감사하다고. 이번에 <지팡이> 3권 나온 것도 사인해 줄 테니까 꼭 드려.”

나는 지훈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그리고 차를 한잔 타서 작업실로 가져왔다.

저녁도 먹었으니… 이제 집필을 할 시간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앞선 내용을 살폈다.

일본을 비웃는 하융의 소설.

그 소설이 조선과 일본 모두에 인기를 끈다.

워낙 절묘하게 쓴 소설이라 하융의 의도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런 것을 생각하기 이전에… 그의 수려하면서도 개성 있는 문체에 먼저 반해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총독부의 경감은 다르다.

그는 문학에 대해 아무런 감흥이 없기에, 오히려 그의 소설 속 요소들이 일본을 나타낸다는 걸 쉽게 알아본다.

그래서 하융은… 하루아침에 총독부로 소환된다.

하융은 가장 좋은 양복과 중절모를 준비한다.

조선에서 가장 ‘잘’나가는 작가답게.

까딱 잘못하면 형무소로 끌려가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지만… 떨리거나 무섭진 않았다.

그냥 이 모든 게 조선 땅에서 태어난 운명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운명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면… 거슬러 보는 것이 답일 테고.

경감의 수사는 대단히 압박적이었다.

하융이 쓴 소설의 단어와 일본의 요소들을 1대1로 대치시키는 유치하고 폭력적인 방법.

그런 방법으로 하융을 사상범으로 몰고 갔다.

하융은 그 말을 다 듣고 이렇게 대답했다.

― 당신의 말이 다 맞군요.

경감은 오히려 놀랐다.

대부분의 사상범들은 정의를 부르짖거나.

혹은 아니라 발뺌하기 바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작가 주제에 이렇게 잘 차려있고 나타나 신선 같은 말이나 해 대다니.

경감은 이 작자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하융이 덧붙였다.

― 당신의 입장에서는요. 당신이 지금 1대1로 대치시키는 걸… 은유라고 합니다. 아주 아주….

그리고 경감은 평생 들어 보지 못한 말을 듣는다.

― 유연하고 주관적인… 즉, 문학적인 기법이죠.

물론 1차원적이지만.

이라는 말은 굳이 하진 않았다.

취조실에 침묵이 흘렀다.

경감은 생각했다.

자신의 ‘느낌’은 확실하다.

지금 눈앞의 이 딴따라 같은 놈은 분명 일본을 욕하는 글을 썼다.

그런데 그걸 발견한 자신의 ‘감’이.

사실은 ‘문학적’이라고?

경감의 얼굴에 혼란이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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