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81화 (181/204)

181회

― …해서, 한국에서 토론을 열면 어떨까 싶습니다만.

…한국에 오겠다고?

나 하나를 참석시키기 위해서?

물론 도마크의 입장에선, 작가의 참여 여부가 정말 중요하겠지.

하지만 다른 패널들의 입장은 다르다.

기자와 정치가 그리고 평론가 등등.

그들이 굳이 한국으로 온다는 건, 반드시 얻어야 할 이득이 있단 소리였다.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겠군.

<지팡이>는 일본의 문화관과 역사관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특히 틸 버켈의 토론 이후에는 더.

그렇지 않고서야 패널이 한국까지 올 리 없지.

문제는….

그래서 이 토론이 순수한 ‘문학 토론’이 아니라는 점이다.

까딱 잘못하면, 나나 <지팡이>가 그들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될 수도.

일단은, 보류하자.

나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 속에 늦은 밤을 맞이할 때였다.

샤워를 하고, 비척비척 걸어서 침실로 갔다.

기자들 등쌀에 아예 꺼 놓은 휴대폰.

열 시가 다 되어가는 지금에야 켜 본다.

수많은 문자와 톡, 부재중 전화가 날아들었다.

“어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기분이 싱숭생숭하다고 해야 하나.

다시 거실로 나가 주방으로 갔다.

그리고 평소에는 절대 하지 않는 짓.

바로 냉장고를 열었다.

캔맥주를 꺼내 거실 창가로 갔다.

지훈의 방을 슬쩍 보니, 불이 켜져 있다.

워낙 부엉이 같은 녀석이라, 아마 지금쯤 열심히 집필 중일 거다.

요즘 말로 ‘혼술’을 하고 있는 걸 알면 걱정하겠지.

나는 조심스럽게 맥주를 땄다.

치익―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시원한 맥주가 식도를 타고 들어가자,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나아지는 듯했다.

그런데 내가 왜 답답해하고 있을까.

나는 창을 열고 발코니 난간에 기댔다.

곰곰이 내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보다가 깨달았다.

환생을 하고 난 후.

난 등단 직후부터 일본에서 인기를 끌었다.

일본을 굳이 적대시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가진 독서 시장 인프라를 이용하고 싶어서였다.

과거에 내가 그들에게 목숨까지 잃었는데, 그 정도는 이용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또 한 가지.

도마크라는 출판사도 마음에 들었고.

그런데 지금 ‘이상’이라는 이름은 다시 한번 일본에서 유명해졌다.

이번엔… 조금 위험한 이유로.

<지팡이>에 담긴 ‘역사의식’.

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일본과 얽힌 것이다.

하융이 일본을 희화화한 작품으로 총독부 경감의 눈에 띤 것처럼.

아마 이번 <지팡이> 건으로, 일본과 내 관계가 결정날 것이다.

그래,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졌던 일일 지도.

환생하고 처음으로 뚫은 해외 시장이 일본이었을지라도….

내가 끝까지 상대해야 하는 나라 역시 일본이었다.

내 삶을 담은 문학을 하는 이상, 일본과의 문제는 끝없이 걸릴 수밖에 없으니.

만약 여기서 내가 꼬리를 내린다면, 난 다시는 내 삶을 담은 이야기를 쓰지 못할 거다.

물론….

“이렇게 갑작스럽게는 아니었는데….”

이건 뭐….

내가 서서히 불씨를 키우고 있던 차에, 틸 버켈이 휘발유를 부은 셈이군.

하여간 사람 당황하게 하는 데엔 재주가 있다니까.

그렇게 목을 축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였다.

문득 금홍에게 연락을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 톡 채팅란을 주욱 내려, 금홍을 찾았다.

휴대폰을 꺼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금홍과도 연락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PC 톡은 집필할 때는 원래도 하지 않고.

착한 금홍은 이해한다고 했다.

자기 같아도 집중에 방해되기 싫을 것 같다며.

― 오늘 하루 잘 보냈어요? 전 이제 글 다 쓰고 자려고요.

답장은 바로 왔다.

내가 항상 이 시간 즈음 연락을 하니, 그녀도 신경을 쓰는 모양이었다.

― 저는 과제 중 ㅠㅠ 어려워요.

― 영어 공부 좀 할걸. 도와드리게.

― 마음에도 없는 소리!

금홍과 농담 따먹기라도 하니 기분이 풀린다.

그렇게 몇 마디 나누다가, 과제를 하게 둬야 할 것 같아 저녁 인사를 하려는데….

― 아, 피터 한 교수님이 그러시던데요.

피터 한 교수?

― 북콘서트 재밌었냐고요. 신문에서 우리 북콘서트 한 거 잘 보셨대요.

순간 난 머리를 살짝 맞은 느낌이 들었다.

“맞다, 피터 한 교수….”

내 북콘서트를 위해 칼럼까지 써 줬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아직 못 했다.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이런 실수를 하다니.

난 금홍에게 얼른 물었다.

― 금홍 샘, 피터 한 교수님 언제 학교에 계세요?

― 네… 음… 항상?

‘항상’이면….

뭐, 당장 내일 찾아가 버리자.

* * *

다음 날 오후.

계획대로 나는 한국외대를 찾아왔다.

금홍은 아쉽게도 외부 세미나가 있다고 했다.

지훈까지 데리고 올 필요는 없으니… 어쩌다보니 나 혼자 찾아온 셈.

양손이 무겁다.

지훈이 추천해 준 압구정 모 케이크 집에 갔다가

홀케이크는 물론이고 기분 삼아 와인까지 한 병 샀다.

그 까다로운 식성에 맞추려면, 이것도 간당간당할 테지만.

교수연구실 복도의 가장 끝 방.

나는 닫혀있는 문을 두드렸다.

침묵.

내 이럴 줄 알았지.

“저, 이상인데요. 안에 계시죠?”

안에서 뭔가 번잡한 인기척이 들려온다.

적어도 문전박대는 안 하려는 모양이다.

그리고 잠시 후.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피터 한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말했다.

“전화기 고장 났습니까? 연락 정도는 하셨어야죠.”

“고장 난 건 아니고 기자들 등쌀에 꺼 뒀습니다. 없는 셈 치고 살고 있어요.”

피터 한도 내 상황을 모르는 바는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짧은 한숨을 쉬며, ‘그래서 대체 뭔 일이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난 케이크와 와인을 가만히 들어 올렸다.

“북콘서트 뒤풀이하려고 왔는데요.”

“…뭐라고요?”

그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리고 내 주위를 살폈다.

“하! 우리 둘이서 말입니까?”

“안 될 건 뭔가요. 싫으신가요? 케이크 비싼 건데. 동물성 생크림 따위가 그렇게 비싼 음식인지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당연히 비싸죠. 동물성 생크림은 그 풍미 자체가 그 유지방이 식물성 생크림보다―”

라고 피터 한이 일장 연설을 시작하려 했다.

마치 버튼을 누르면 나오는 자동인형처럼.

뭐, 다행히도 피터 한이 먼저 이런 얘길 할 때가 아님을 깨달은 것 같지만.

피터 한은 한숨을 푸욱 쉬더니, 한쪽으로 물러나 길을 비켜 줬다.

“들어오시죠.”

“무척 감사합니다, 교수님.”

내가 같잖은 우아를 떨자, 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날 봤다.

아, 피터 한 교수.

보면 볼수록 놀리고 싶은 스타일이다.

피터 한 교수는 실컷 툴툴거리면서도, 탕비실에서 케이크를 자르고 와인잔을 가져왔다.

“조교는 안 두시나요?”

“저는 제 공간을 남과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귀찮잖아요. 설거지라든가 커피를 타는 일이라든가.”

그가 음식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 큰 성인 남자가 그걸 귀찮아하면 나가 죽어야죠.”

나가 죽는다니.

그럼 대한민국 교수님들은 다 죽어야 한다.

“한국말이 더 느신 것 같아요.”

“당신 책을 번역하다보니 조금.”

우리는 와인을 마시고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나는 그냥 꿀떡 넘겨 버리고 말았는데, 그는 눈을 감고 가만히 맛을 음미했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뜬 그가 말했다.

“뭐, 괜찮네요.”

“그래요? 통과해서 다행입니다.”

“굳이 제 비위를 맞출 일이 있나요?”

“그럼요. 북콘서트의 일등공신이신데.”

“….”

“그 칼럼이 아니었으면 북콘서트가 많이 초라했을 거예요.”

그는 말없이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소파에 깊게 눌러앉아 창밖을 보았다.

교수실이 순간 고요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맞아요. 난 초라한 게 싫습니다.”

비장하다고 해야 하나.

그는 그런 투로 말하고 있었다.

내 말이 그 내면의 뭔가를 건드린 모양이다.

난 덤덤하게 말을 받았다.

“누가 초라한 걸 좋아하겠어요.”

“아뇨, 이 번역계에선 초라한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많아요.”

“…그런가요?”

내가 번역계의 실상은 잘 알 리가.

하지만 저토록 진지한 얼굴을 하는 걸 보니, 번역계의 현주소에 불만이 가득한 것 같았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번역을 그냥 언어 바꿔치기로 생각하는 번역자들이 정말 많거든요. 마치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는 남의 문장을 손봐주는 것처럼. 번역일을 받아서 해치우고, 돈을 받으면 끝이라고들 생각해요. 그리고 또 다른 번역일을 찾으려 혈안이 되고요.”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는 남의 문장을 손봐준다….

번역가를 이렇게까지 초라하게 표현할 수 있나 싶다.

하지만 저 말이 현실이겠지.

세상은 번역가를 ‘예술가’라고 보진 않으니까.

“저는 그런 번역자들을 참 초라하다고 생각합니다. 번역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죠.”

“그럼 칼럼을 써 주신 건….”

“‘팀 이상’으로의 책임감이죠.”

난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

물론 난 그를 예전부터 ‘팀 이상’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아니면, <지팡이> 번역을 맡길 사람이 없다고 생각할 만큼.

하지만 그가 자신을 ‘팀 이상’으로 생각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렇지 않은가.

어찌 됐건 우리 셋은 아직 대학원생이고, 그는 엄연한 교수인데.

같은 ‘팀’으로 불리는 게 거북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가 직접 자신을 ‘팀 이상’이라 하다니.

내게는 적잖은 감동이었다.

“아아, 그런 감동받았단 표정은 하지 마세요. 전 그런 거 싫어해요.”

그가 손을 휘휘 저었다.

“그리고, 팀에 끼워 넣은 건 작가님 아닙니까? 새삼스럽게 왜….”

“같이 일을 할 뿐이라고 생각하신 줄 알고 있었거든요.”

“같이 일을 한다?”

그가 피식 웃었다.

“어떤 작가가 초벌 번역가와 회의를 하고 번역을 위한 문장 분석을 하죠? 저는 그 정도로 번역을 중시하는 작가를 본 적이 없어요.”

“칭찬하시는 건가요?”

난 점점 흥분하는 그에게 물었다.

그는 잠깐 멈칫하더니, 썩 내키지 않는다는 태도로 말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

“왜 웃으시죠?”

“교수님 칭찬받고 안 좋아할 대학원생이 어딨겠어요.”

“재미없는 농담은 상대하기 싫군요. 아무튼 <지팡이>는 번역에 한해선 저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작가님이 기분 나쁘셔도 어쩔 수 없어요. 이건 제 신념이니까. 그래서 <지팡이>의 북콘서트가 초라해지는 꼴을 그냥 두고 볼 순 없었던 겁니다.”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아요. <지팡이>는 제가 썼지만, ‘팀 이상’이 아니었으면 세상에 나오기 어려웠을 테니까요.”

우리는 잔을 다시 채우고 건배를 했다.

달콤쌉싸름한 와인 맛이 좋았다.

“그나저나… 요즘 문화계의 아주 화제의 인물의 되셨던데요. 게다가 역사학계에서도 작가님 이름이 거론되더군요.”

“요즘 <지팡이>의 전개 때문이죠.”

그가 킥킥대며 웃었다.

“하… 저는 그럴 줄 알았습니다. 번역을 하면서도 느꼈거든요. 이 원고는 분명 일본을 자극할 거라고요. 하지만 독일 쪽에서 먼저 반응이 올 줄은 몰랐죠.”

나는 워낙 이 일에 질린 탓에, 체념하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저는 순서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일본에서 먼저 반응이 왔다 해도, 독일이 그 뒤를 따랐을 거예요.”

“상당히 씁쓸한 얼굴이군요.”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요. 일본의 출판사 도마크에서….”

“아, 그 출판사 압니다. 괜찮은 곳이죠. 아무튼, 도마크에서요?”

“도마크가 <지팡이>로 정기적인 토론을 열고 있었거든요. 물론 일본 현지에서. 문제는 <지팡이>를 대단히 정치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위험한 토론이기도 해요. 그런데 이번 토론은 꼭 저와 함께하고 싶다더군요. 그쪽은 패널들을 데리고 한국에 올 생각까지 하고 있어요.”

피터 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그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서, 대답은요?”

“아뇨. 아직 아무 답도요.”

그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날 봤다.

어서 수락을 하란 뜻일까, 아니면 어서 거절을 하란 뜻일까.

피터 한 교수가 말했다.

“저라면 바로 수락을 했을 겁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