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79화 (179/204)
  • 179회

    “그리고 ‘심’의 그 말을 들은 순간 하융은 알게 돼요.”

    “뭘요?”

    “스승이 남긴 말의 의미를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금홍과 지훈은 약간의 긴장이 감도는 얼굴로 날 봤다.

    그게 뭔지, 정말 궁금하다는 듯.

    “지금 말해 줄 수… 있어요?”

    금홍이 조심스레 물었다.

    사실 그냥 말해 줘도 큰 상관은 없었다.

    아이디어를 작품화하기 전에 의견을 들을 수도 있고.

    하지만 이런 생각도 있었다.

    이렇게 중요한 부분이라면, 작품을 통해 보여 주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

    아이디어 단계에서 미리 내 생각을 밝혔다가, 정작 이들이 작품을 봤을 때, 객관적인 시선을 잃을 수도 있으니.

    난 휴대폰으로 날짜를 봤다.

    오늘은 몸이 피곤하니 쉬도록 하고… 내일과 모레.

    이틀 정도면 집필할 시간은 충분했다.

    “사흘 후에 ‘팀 이상’ 회의를 하죠.”

    “사흘 후요?”

    “네. 지훈아, 일정 괜찮아?”

    지훈은 일정을 떠올려 보듯 가만히 천장을 봤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저도요.”

    금홍도 흔쾌히 대답했다.

    “그럼 그때, 작품으로 확인해 보자고요. 내 생각이 그럴듯한지 어떤지를.”

    * * *

    다음 날 아침.

    나는 모처럼 일찍 잠에서 깼다.

    몸이 축축 늘어졌다.

    비행은 확실히 사람 몸을 상하게 하는 것 같았다.

    자전거를 타고 천변을 한 바퀴 돌고 난 후, 샤워를 하고 나니 그나마 기운이 났다.

    토스트와 커피.

    간단한 아침을 차리고, 그걸 그대로 들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토스트를 우적우적 먹으며 칠판을 봤다.

    지금까지의 전개를 보고 있노라면… 그래도 참 잘 달려왔단 생각이 들었다.

    난 펜을 들고, 다음 전개 란에 이렇게 썼다.

    ― 일본의 언어를 빼앗기.

    그리고 화살표를 하나 한 후, 이렇게 첨가했다.

    ―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더 망설일 것 없었다.

    나는 남은 토스트를 입에 다 욱여넣고, 반쯤 식은 커피를 마신 후, 바로 책상 앞에 앉았다.

    오랜만의 집필이었다.

    처음에는 속도가 잘 나지 않았지만, 조금씩 집중을 하다 보니 손가락이 점점 빨라졌다.

    먼저, 어제 공항에서 두 사람에게 했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하융은 문단의 스타가 되지만, 자신이 혼자라는 외로움을 견디진 못한다.

    기생들과 어울리거나, 혹은 동료 문인들과 술을 마시거나, 혹은 그들과 주먹질을 하며 싸우거나.

    그 어떤 것도 속 시원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하융은 갑자기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삶의 허무감이 극에 달한 것처럼.

    그는 방에서 안절부절못하다가, 전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찾아가 보진 못했던 ‘심’의 일터.

    어느 소학교였다.

    ‘심’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하융도 예전만큼 막무가내는 아니어서, 경비에게 자신을 ‘심’의 사촌오빠라 했다.

    사촌오빠가 온 줄 알고 나와보았던 ‘심’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이내 기다리라 말한 후, 그 길로 퇴근을 해 버린다.

    두 사람은 어느 다방에 갔다.

    ‘심’은 하융이 기억하는 것보다 더 고상했다.

    세상에 궁금한 게 많은 여대생의 눈빛보다는, 아이들에게 가르칠 게 많은 선생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융은 ‘심’과 많은 이야기를 한다.

    스승이 남기고 떠난 질문.

    ‘그들의 언어를 뺏으라’는 의미에 대해.

    그러나 ‘심’이라고 답을 알 리가 없다.

    다만 ‘심’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조선어를 가르치기 어려워지는 현실과, 일본인 관리자를 위한 교육 보고서를 쓰는 참담함에 대해.

    하융은 그 말을 가만히 듣다가… 또, 그녀가 느끼는 참담함이 참으로 윤리적이란 생각을 하다가…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린다.

    그건 아주 재밌는 생각이었다.

    자신이 ‘심’의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일어를 배워서 보고서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 그들을 조롱하는 내용을 숨겨 놓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일 테니.

    순간, 하융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방금 든 생각이야말로, 언어를 빼앗는 게 아닌가.

    일어를 가지고 글을 쓰되, 그 안에 일제를 비판하는 의미를 숨겨 두는 것.

    일본인들이 그 글을 하하호호 읽게 만드는 것.

    이 이상 멋진 조롱은 없을 것 같았다.

    하융은 마음이 얼굴에 모두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그가 히죽 웃자, ‘심’도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웃은 것은 처음이었다.

    항상 하융 쪽에서만 실없는 웃음을 짓거나, ‘심’이 가끔씩 속 모를 미소만을 짓곤 했으니.

    그때, ‘심’은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날짜는 이 주도 남지 않았다.

    상대는 같은 학교에 부임한 남교사라고 했다.

    하융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뭔가가 울컥울컥 쏟아지려 했는데, 그것을 쏟아 내서 좋을 게 없음을 잘 알기도 했다.

    한참 후에야, 하융이 말했다.

    ― 연애결혼이라니. 멋지네요.

    ‘심’은 가만히 미소를 짓다가 물었다.

    ― 저를 가지고 소설을 쓴다고 하셨는데, 쓰셨나요?

    썼다.

    몇 날 며칠을 몰두해서 썼다.

    그러나 ‘희’가 모두 불태워 버렸다.

    ‘심’의 얼굴엔 어떤 기대감마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 작품을 썼다고 하면, 다른 여자가 질투를 느껴 불태워 버릴 만큼 하융의 진심이 담겼다고 하면… 둘의 미래는 달라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하융은 침착하게 고개를 저었다.

    ― 아뇨. 잊어버렸어요.

    ― …아.

    심이 뭔가를 꾹 누르는 듯한 미소를 짓곤 말했다.

    피할 길 없는 아쉬움과 일말의 기대 같은 것을.

    ― 그렇군요.

    ‘심’은 하융을 다방 밖까지 배웅해 주었다.

    둘은 그렇게 ‘사촌’ 행세를 하며 인사를 했다.

    하융은 돌아오는 전차에서 생각했다.

    그렇게 이별을 하는 게 옳았던 거라고.

    겨우 안정을 찾은 여자였다.

    게다가 같은 교사라니.

    정말이지 ‘심’과 잘 어울렸다.

    그렇게 마음의 한편을 완전히 접은 하융은, 그 아쉬움만큼 새 작품에 대한 열망이 커져감을 느낀다.

    겨우 깨달은 ‘언어를 빼앗는 일’의 진정한 의미.

    그것이야말로 ‘심’이 준 마지막 선물이라 여기며.

    하융은 집으로 돌아와 바로 소설을 구상한다.

    일제의 언어를 통하여 일제를 비판하면, 그것은 일제의 언어를 썼으나 조선의 것이 된다.

    그렇다면 가장 효과적인 비판이란 뭘까.

    그들이 작품을 보아도… 작가를 욕할 수 없는.

    하융은 답을 떠올렸다.

    그건 바로 ‘유머’였다.

    글을 보고 웃는 자는 글을 쓴 사람을 비난할 자격이 없는 법이었다.

    그것이 웃음의 힘이기도 하고.

    마음을 먹은 이상, 하융의 재능은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작가인 그조차도, 그 작품에 매달리지 않고는 못 견딜 정도로.

    그것은 한 가상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가족은 있지도 않은 조상신을 섬을 섬기고, 하찮은 명예에 집착하며 크고 작은 싸움을 일으켰다.

    모두 일제를 빗대어 우스꽝스럽게 표현했지만, 절묘하게도 글에 드러나진 않았다.

    소설에 드러나는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우스꽝스러움 앞에서, 어떤 사람도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조선인이건, 일본인이건.

    하융은 그걸 당당하게 일본 잡지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낯선 작풍에 별다른 반응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연재를 지속하니 그 작품은 큰 사랑을 받았다.

    심지어 일본에서도, 하융의 소설의 인기는 대단했다.

    하융은 삶의 아이러니를 느꼈다.

    그들은 비판하려 쓴 문학이, 그들에게 가장 큰 인기를 끌다니.

    그리고 하융은 확신했다.

    스승이 말했던 ‘그들의 언어를 뺏는 일’을,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다고.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총독부의 모 경감.

    그는 문학의 ‘문’ 자도 모르는 자였다.

    감성이 삭막했고, 실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라, 그 어떤 예술에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한참 경성에나 도쿄에나 인기가 많았던 하융.

    경감은 하융의 뒷조사를 했다.

    이름이 난 작가나 지식인들이 자주 겪는 일이었다.

    경감은 하융이 쓴 소설도 꾸역꾸역 읽었다.

    그리고 잡지에 연재 중인 하융의 글을 보고 바로 말했다.

    ― 이거 우리 대일제국에 욕을 먹이고 있는 거 아냐?

    * * *

    미국에 다녀오는 바람에 비축분이 많이 사라졌다.

    게다가 미국에서 소설이라곤 한 자도 쓰지 못해서, 이건 뭐 거의 라이브 연재를 할 위기였다.

    그래서 나는 이틀 내내 총력을 다했다.

    조금이라도 비축분을 쌓아 두어야, 급한 일이 생기더라도 펑크를 내지 않을 수 있었다.

    내가 일찍이 공지했던 대로, ‘팀 이상’ 회의가 열렸다.

    미국에서 온 지 사흘만이었다.

    장소는 한적한 모 카페의 2층.

    먼저 도착한 금홍이 손을 흔들며 날 반겼다.

    “지훈 샘은요?”

    “걘 오전에 평론가 모임 있어서 따로 오기로 했어요. 곧 올 거예요.”

    “아하. 그런데 샘….”

    “왜요?”

    그녀가 날 물끄러미 보더니 말했다.

    “얼굴이 왜 그래요?”

    내 얼굴이 왜?

    뭐 묻었나?

    “곧 죽을 것 같은 얼굴색인데….”

    아, 그건 알고 있다.

    아침에 거울을 보고 나도 깜짝 놀랐으니까.

    비축분에 대한 부담 때문인지 꽤 무리를 했고, 그 흔적이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괜찮아요.”

    “하지만….”

    금홍이 울상이 돼선 나를 본다.

    걱정시키긴 싫은데….

    아무리 전생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 해도, 가끔씩 이렇게 어쩔 수 없는 성격이 나와 버린다.

    이를테면.

    글에 집중을 하면 시간을 잊는 성향 말이다.

    그것만 아니어도 이런 얼굴은 아닐 텐데.

    등 뒤에서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지훈이 왔다.

    “저 왔… 엑, 형 얼굴 왜 그래요?”

    “안다. 아니까 얼른 앉아.”

    “그러니까 쉬엄쉬엄하시지… 뭐, 그래도 분량은 정말 많이 쌓았죠. 에피소드 하나를 다 해치웠으니. 보는 제가 다 뿌듯했어요.”

    지훈이 싱글싱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지훈까지 왔으니 회의는 바로 시작됐다.

    “이 원고에서 제일 중요한 건, 문학에서 유머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하융이 그걸 얼마나 잘 이용했는지 독자들이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해 주는 거예요. 지훈아, 넌 어땠어?”

    송지훈은 금방 ‘평론가의 얼굴’을 하고 입을 열었다.

    “이즈음에서 ‘유머’를 다루는 건 꽤 괜찮은 시도 같아요. 하융이 일종의 블랙코미디 같은 글을 쓴 셈이잖아요.”

    지훈의 말이 맞았다.

    하융이 쓴 건, 지금으로 치면 정확히 블랙코미디였다.

    하지만 그 개념이 잘 알려지지 않던 20세기엔, 그 글은 그저 ‘웃긴 소설’이었겠지.

    지훈은 계속 말했다.

    “유머 중에 가장 수준 높은 게 블랙코미디고, 비판 중에 가장 고상한 게 웃음으로 비판하는 거거든요. 둘 다 아주 고차원적인 작업이죠. 그리고 그걸 일본어로 했다… 그럼 일본을 아주 제대로 먹인 거나 마찬가지고요.”

    “그래. 바로 그게 네가 그렇게도 궁금해했던 ‘언어를 뺏는 일’이지. 이제 이해가 돼?”

    “완벽히 이해가 됐어요. 지금까지 궁금해하면서 먹었던 고구마가 내려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지훈이 가슴을 슥슥 쓸어내렸다.

    금홍은 우리의 이야기를 잘 적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 물음표를 하나 그려 넣었다.

    “뭔가 궁금한 게 있어요?”

    내가 묻자 금홍이 조심스레 말했다.

    “유머로 비판을 한다는 건 알겠어요. 원고에서도 잘 느껴지고요. 그런데 그걸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해서요. 분명 번역할 때 쓰일 것 같은데.”

    아하, 그거.

    “한 단어로 쓸 수 있죠.”

    “아, 어떻게요?”

    “‘전복’이라고 해요, 그런걸. 한 마디로 위계질서를 뒤집는다는 뜻이죠. 비판을 할 때 유머를 활용하는 경우는… 비판의 대상이 자기보다 높을 때거든요. 대놓고 비판을 못 하니 웃음 속에 녹여 내는 거죠. 그럼 적어도 그 웃음이 피어나는 시간 동안은… 비판의 대상의 위상을 추락시킬 수 있어요. 또, 대부분 유머는 돌려 말하면서 생기니까, 당한 입장에서 책잡기도 애매하고요.”

    “…아하.”

    금홍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리 어려운 개념도 아니니 이해가 쉬웠을 거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토론에 매달렸다.

    다소 급하게 쓴 것 치고 두 사람의 반응이 좋았다.

    특히 지훈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평론가들이 좋아할 만한 글이네요. 평론가들은 이렇게 정치적이고 비판적인 거 좋아하거든요.”

    나도 공감했다.

    ‘전복’이라는 개념도 평론가들이 곧잘 쓰곤 하니까.

    지훈은 또 이렇게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런데 외국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겠는데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제국주의와 유머라니! 이렇게 안 어울리는 조합을 어울리게 만들었잖아요.”

    그렇긴 하지.

    두 요소는 섞기가 쉽지 않으니.

    지훈이 씩 웃으며 말했다.

    “아마 환장을 하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많을걸요? 여러 가지 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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