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76화 (176/204)

176회

여행엔 특별한 힘이 있다.

모국에서는 쉽게 하지 못할 경험을, 이방인이란 이름으로 기꺼이 시도할 수 있으니.

이를테면, 고급 호텔에 딸린 와인 바에 가는 일.

사실 나는 딱히 술을 즐길 일도, 이런 데서 사람을 만날 일도 없다.

그래서 한 번도 이런 곳을 찾질 않았는데….

타지에 오니 이런 낯선 경험이 끌리는 것이다.

물론, 금홍과 좋은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기도 하고.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안쪽 테이블에 앉았다.

어두운 조명과 조용한 사람들, 대부분 로맨틱한 분위기를 내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와인 잘 알아요? 난 잘 모르는데.”

내가 어린애처럼 말하자, 금홍이 씩 웃었다.

금홍은 보기보다 술을 잘 마신다.

몇 번 술자리를 해 봤을 때에도, 취한 걸 한 번도 본 적 없다.

“그럼 제가 알아서 시켜 드릴게요.”

하더니 종업원에게 뭔갈 열심히 주문했다.

잠시 후, 와인이 한 잔씩 나왔다.

마셔보니 달콤 쌉싸름했다.

도수는… 거의 없었고.

“내일 또 행사 있잖아요. 관리하셔야죠.”

“맞는 말만 하시네요.”

“그래서 재미없어요?”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재밌다기보단 좋아요.”

“….”

“생각보다 일정이 너무 바빠져서, 둘이 밥 한 끼 먹을 시간도 없었잖아요.”

단 두 시간이라 해도 소중하지.

뭔갈 하지 않아도, 이렇게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좋고.

“저도요. 아쉬울 뻔했어요.”

하고 손에 턱을 괴고 날 보는 금홍.

조명 때문인가, 평소보다 더 예쁘다.

우리는 느긋하게 이런저런 얘길 나눴다.

사실 우리 둘 다 워커홀릭이라, 결국 일 이야기로 흘러갔지만.

금홍이 아차, 싶었는지 말을 돌렸다.

“우리 일 얘기 그만 해요. 오늘도 실컷 일하고 와 놓고선.”

“비슷한 인간들끼리 만나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렇게 또 한참을 낄낄거리다가, 내가 먼저 화두를 돌렸다.

“미국 오니까 어때요? 뭐… 일만 했지만.”

“좋아요. 공부한 보람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예전에는 외국인이 말할 때 귀를 쫑긋해야 들렸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들려요. 신기할 정도로.”

“지금까지 노력한 결과가 나오는 거죠.”

“혜경 샘은 어때요? 미국은 처음이잖아요. 유럽이랑은 또 다르죠?”

“완전히 다르죠.”

프랑스에서는… 평화로웠다.

아무도 날 아는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날 알리려고 노력해야 했지.

하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미국은 이름을 알리기 어려운 곳인 건 분명해요. 그런데 한번 언론을 타면…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인 건 확실해요. 무서운 동네 같아요.”

오늘 아침 호텔 앞에서 기다리던 기자들을 기억한다.

내가 조나단 감독의 집을 들락거리고, 피터 한 교수가 칼럼을 쓰자마자 일어난 일이었다.

한국이 빠르다, 빠르다 하지만, 언론 가십의 측면에서는 미국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그리고 동시에… 좀 허무한 기분도 들어요.”

“허무해요?”

금홍이 살짝 놀라며 되물었다.

“네. 여기서 누린 고급 호텔, 조나단 감독의 호화 저택, 파파라치… 사실 대단히 화려하잖아요. 그런데 잘 알고 있거든요.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 사라질 것들이라는 걸.”

“음… 하지만 한국에서도 유명하잖아요, 혜경 샘.”

“좀 다른 것 같아요.”

“어떻게요?”

“한국은 저를 ‘작가’로 본다면… 여긴 뭐랄까… 가십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이 느껴져요. 제 작품보다 ‘미국까지 진출한 동양인 작가’라는 타이틀에 관심이 많은 거죠. 마치 연예계에 갓 떠오른 ‘스타’를 보듯. 물론 감사한 일이지만… 좀 무섭기도 하죠.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

‘스타’의 뒷면이란… 대부분 허무하다.

이 관심이 언젠가 새털같이 날아갈 것 같은 느낌.

“<위대한 개츠비> 같은 거네요.”

금홍이 말했다.

미국의 대작가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

개츠비는 옛 연인 데이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매일같이 화려한 파티를 연다.

그렇게 그런 개츠비의 이면에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외로움과 허무가 도사리고 있다.

소설의 말미, 개츠비는 살해를 당한다.

화려한 삶의 이면에 드리운 그림자.

그 그림자를 은유한 죽음이기도 하지.

“딱 맞는 말이네요. <위대한 개츠비>.”

“그런데 저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있거든요.”

“무슨 생각이요?”

“가끔 연예인들이 자살했단 소식을 듣곤 하잖아요. 잘나가는 연예인들이 뭐가 두려워서 자살을 할까, 하는 생각이요. 그런데 상상해 보니 그렇더라고요. 무대나 카메라 앞은 너무 밝고 화려한데, 우리의 내면은 꼭 그렇진 않잖아요. 상처 한 두 개씩은 꼭 가지고 있고… 그래서 그 부조화가 사람을 너무 고통스럽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요.”

금홍의 말을 듣고, 나는 불현듯 하융을 떠올렸다.

<그 집>의 일 때문에 잠시 미뤄 둔 <지팡이>.

하융은 문단의 ‘스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허무감에 매일 밤 고통받는다.

자신을 찬양하는 독자와 언론들.

그런 자신을 시기하는 동료 문인들.

자신의 편이 되어 줄 스승의 부재.

아직 해결되지 않은 스승이 남긴 말.

‘그들의 언어를 빼앗아야 한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하융의 내면이 좀 더 뚜렷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하융이 허무감을 벗어날 유일한 방법.

한 마디로, 한 번 더 성장할 방법.

그건 스승이 남긴 말의 답을 찾는 것뿐이다.

“무슨 생각 해요?”

금홍이 넌지시 물었다.

아, 나도 모르게 생각에 빠져 있던 모양이다.

“…일 생각이요. 미안해요.”

그러자 금홍이 작게 웃었다.

“정말 어쩔 수 없네요. 이왕이면 같이 생각해요.”

결국 일은 이렇게 됐다.

마치 ‘팀 이상’ 회의를 하는 것처럼, 내가 <지팡이>의 이야기를 풀어 놓으면… 금홍이 그에 대한 나름의 감상을 펼치는.

지훈이 비평적 시선으로 내 글을 독해하는 독자라면.

금홍은 독자의 시선으로 내 글을 이해하는 독자다.

두 사람이 없었으면… 내 작가 생활은 더 험난했을지도.

둘만의 시간은 후딱 지나가 버렸다.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지훈의 카톡이 왔기 때문이다.

― 저 이제 가요. 어휴, 그놈 잘난 척 들어주느라 힘들었어요.

나는 금홍에게 카톡을 보여 줬다.

“이만 올라가 봐야겠죠?”

“아… 그러네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우리는 서둘러 와인 바를 빠져나왔다.

아쉽고 또 아쉬웠지만 금홍과 짧은 포옹을 하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왔다.

얼른 샤워를 하려 하는데, 방문이 벌컥 열리고 지훈이 돌아왔다.

“혀엉―”

“왜 말꼬릴 늘여? 징그럽게.”

“아, 저 진짜 너무 짜증 났어요. 유학생 잘난 척 세상에서 제일 최악.”

녀석은 목이 탔는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보아하니 기싸움에서 된통 밀리고 온 모양이지?

“아니, 유학 간 지 이 년도 안 된 새끼가 뭔 영어를 그렇게 써 대는지… 머리 검은 미국인 다됐어요. 저 문학 공부한다니까 겁나 비웃는 거 알아요? 돈도 안 되는 거 왜 하냬요. 얼른 철들어서 아버지 사업 도우라나… 나중엔 한 대 칠 것 같아서 그냥 늦었다고 하고 왔어요.”

“그럴 땐 어~ 그래, 하고 넘어가. 다시 볼 사이도 아니고. 설득해서 어디다 쓰게.”

“그래도 열 받잖아요.”

“대체 무슨 얘길 하다가 그렇게 된 건데?”

“어떻게 사냐고 묻길래 대답했을 뿐이에요. 한국에서 평론가 하고 있다, 형 일도 돕고 있고, 교수를 할 기회가 온 것 같은데 고민이 된다, 뭐 이런 거요. 그런데 분명 그놈도 한국에 있을 땐 소설 쓴다고 오지게 유난 떨었거든요? 신춘문예에서는 계속 떨어지고. 그런데 미국물 먹으니까 인간이 회까닥 돌았나 봐요.”

음… 그렇단 말이지.

알 것 같다.

“네가 잘못했네.”

“제가요? 뭘요?”

“네가 부럽게 했잖아.”

지훈은 눈만 껌뻑거렸다.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는 듯, 입을 막았다.

“재수 없었던 건… 저였나요…?”

“그쪽 입장에선 그랬을지도? 그래도 재수 없음을 당하는 것보단 재수 없게 구는 쪽이 나으니 그만 잊어.”

“그렇구나….”

지훈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지훈은 이런 쪽에 눈치가 없다.

너무 겸손해서 그럴 수도 있고.

이런 걸 보면… 아버지 사업 물려받으면 안 될 녀석이긴 하다.

사업은 눈치와 과시의 게임이니까.

“형, 그런데….”

지훈이 코를 킁킁거린다.

“술 마셨어요? 술 냄새나는데?”

아차.

금홍과 와인을 마신 걸 들킬까 샤워부터 하려 했는데, 그새 지훈이 들어와 버린 상황이었지.

“술은 네가 마셨지. 난 샤워한다.”

나는 욕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 * *

이제 미국에서의 마지막 일정.

누들이 여는 북콘서트만 남았다.

북콘서트의 장소는… 누들 본사.

조나단 감독과의 일정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고 하자, 크리스는 시간이 되는대로 누들 본사로 와 달라 했다.

미적거릴 이윤 없었기에, 우리 세 사람은 점심을 먹고 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크리스가 알려 준 주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누들의 ‘본사’라는 곳은… 길가 건물의 지하였다.

마치 클럽 같은 분위기.

깨끗하지만 어둑어둑한 계단은 조심스레 내려갔다.

“…형, 여기가 진짜 맞아요?”

“맞는 것 같은데. 일단은.”

계단의 끝엔.

네온사인으로 만든 ‘누들’이란 글자가 빛나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복도에 진입하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크리스가 끝쪽 방에서 나왔다.

“오셨군요.”

“아, 안녕하세요. 크리스 씨.”

“잘 찾아오셨네요. 처음 오시는 분들은 잘 못 내려오시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딘지 모르게 위험한 분위기가 풍기지 않는가.

나는 침착한 척 우리 팀을 소개했다.

“제 매니저 송지훈이에요. 이금홍 씨는 저번에 봐서 알죠?”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크리스가 붙임성있게 손을 내밀었다.

지훈과 짧은 악수를 한 후, 그는 사무실로 우릴 안내했다.

“이상 작가님 오셨어.”

사무실 안엔 한 남녀가 있었다.

고스족 코스프레를 한 것 같은 백인 여자와 멀끔한 차림의, 어딘가 얄미운 인상의 백인 남자.

먼저 여자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드디어 만나는군요! 이상 작가님! 제가 파멜라에요.”

파멜라 조이.

메일과 전화로만 얘길 나누던 사람이었다.

내가 짐작하기엔, 누들의 대표이자 실세인 여자.

그런데 그녀가 이런 고스족이었다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멋진 분이시네요.”

내 말에 파멜라가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알아, 라는 듯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머지 백인 남자.

그는 내게 빼빼 마른 손을 내밀었다.

“숀입니다.”

“이상이에요.”

우리는 건조한 악수를 나눴다.

그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를 꽤나 탐탁지 않아 한다는 걸.

비즈니스 관계에서 감정을 드러내다니.

장담하건대 여기서 제일 철이 없는 사람일 거다.

뭐, ‘누들’의 색깔 중 하나가 ‘솔직함’이니, 이런 캐릭터 하나쯤은 나쁘지 않을지도.

우리는 다 낡은 소파에 모여 앉았다.

보면 볼수록 독특한 곳이었다.

소파나 냉장고 등의 기본 시설은 낡고 더러운데, 컴퓨터와 전자 기기는 손대기 무서울 정도로 좋아 보였다.

이 불균형을 그들은 나름대로 즐기는 것 같았고.

이정도 캐릭터는 있어야 미국에서 출판사로 생존할 수 있는 거군.

모두에게 병맥주를 나눠 준 후, 파멜라가 입을 열었다.

“자, 북콘서트가 세 시간 정도 남았죠?”

난 손목시계를 슬쩍 보고 말했다.

“그렇네요.”

“그럼 이제 슬슬 콘서트 계획을 세워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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