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회
어제와 별 다를 바 없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조식을 먹고, 적당한 옷을 갈아입고 호텔방에서 나오는 것.
그러나 호텔 앞 분위기는 달랐다.
어제처럼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벤.
그 벤 주위로 기자들이 서 있었다.
헐리웃 배우를 따라다니는 파파라치라기보단, 문화부 기자들 특유의 칙칙하고 진지한 분위기.
“…뭘까요?”
금홍이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진을 찰칵찰칵 찍어 대는 그들을, 우리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모르죠. 일단 확실한 건, 얼른 여길 벗어나야겠는데요.”
기자들이 뭔가를 묻기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경험상, 저들에게 한 번 잡히면 상당히 곤란해진다.
지금 필요한 건… 영어 같은 건 하나도 못 알아듣는다는 얼굴.
그런 순진무구한 동양인의 얼굴을 하고, 우리는 겨우 벤에 올라탔다.
어제의 직원이 웃으며 우릴 맞이했다.
“하룻밤 사이에 인기가 많아지셨네요?”
“저희도 이해가 안 가요. 어제 찍힌 사진이라고 해 봤자….”
물론 어제 조나단의 저택에서 파파라치를 만났다.
사진이야 좀 찍혔겠지만, 그 사진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조나단이 아닌가.
기자들이 우리를 따라다닐 이유는 없을 텐데.
“일단 얼른 도망치죠.”
그는 벤을 몰아 호텔 거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인터넷 저널에 작가님에 대한 칼럼이 올라왔다던데요? 아마 그 글 때문에 기자들이 몰린 것 같아요.”
“그래요?”
“네. 꽤 유명한 사람이 썼다고 해요. 문학 쪽은 전 잘 몰라서… 뭐, 대단한 작가가 미국에 왔다고 쓴 모양이에요.”
대단한 작가가 미국에 왔다니.
누가 그런 바람을 넣은 거지?
“어디서 볼 수 있어요, 그 칼럼?”
“LJ라고 하는 곳인데… 사이트를 알려 드릴게요.”
금홍이 얼른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직원이 말해 주는 대로 사이트를 찾아갔다.
복잡다단한 사이트를 뒤적거리던 금홍.
“푸핫!”
하고 갑자기 웃어 버렸다.
“왜 그래요?”
“피터 한 교수님이에요.”
“네?”
“그 칼럼, 피터 한 교수님이 쓰신 것 같아요.”
그 말에 나와 지훈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그런 바람잡이를 했는지 궁금했는데, 피터 한이었다니.
우리가 갑자기 웃기 시작하자, 운전을 하던 직원이 궁금했는지 슬쩍 물었다.
“재밌는 일 있어요?”
“그 칼럼을 쓴 사람, 우리 팀원이었어요.”
“아하. 그럼….”
그럼?
“굉장한 사람을 팀원으로 두셨네요. 그 칼럼을 쓴 사람, 미국 문학계에서 꽤 유명하다고 들었거든요.”
우리 세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좀 재수 없긴 하지만 피터 한 교수는….
“맞아요, 대단한 사람이죠.”
이렇게 적재적소에 칼럼을 써 주고 말이다.
물론… 그 덕에 기자를 피해 다니게 됐지만.
“무슨 얘길 썼는지 좀 볼까요?”
금홍이 칼럼을 훑어보았다.
그녀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독해를 마친 후, 우리에게 설명을 해 줬다.
“총 세 가지 얘길 쓰셨네요. 첫째는 <지팡이>의 네오 오리엔탈리즘이 왜 대단한지에 대한 설명, 둘째는 그 대단한 개념을 소설화한 이상 작가의 이전 작품 <그 집>이 조나단 란스마이어 감독과의 협업으로 영화화될 거라는 점, 셋째는 그걸 위해서 지금 이상 작가가 시애틀에 와 있으니 그를 보고 싶다면 누들에서 진행하는 북콘서트에 반드시 가볼 것.”
“그 얘기가 거기 다 들어가 있어요?”
모르긴 몰라도 대단했다.
칼럼 길이는 그리 길지도 않은데, 그 안에 저 복잡한 내용이 다 들어갔다니.
금홍이 어깨를 으쓱했다.
“피터 한 교수님이잖아요.”
“아무래도 북콘서트 홍보 때문에 칼럼 쓰신 것 같아요.”
내 말에 지훈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 교수님 보면 볼수록 웃긴 것 같지 않아요?”
“응. 이것도 우리에 대한 애정이라기보단….”
금홍이 내 말을 받았다.
“본인이 번역한 책 북콘서트에 사람이 안 오는 꼴은 못 보시는 거죠.”
금홍의 말에 지훈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피터 한의 목적이 무슨 상관이랴.
북콘서트의 규모는 생각보다 더 커질지도 모르겠다.
벤은 시애틀 외곽 부촌에 진입했고, 이윽고 조나단 감독의 저택에 도착했다.
조나단 감독은 가운을 걸친 채, 현관 기둥에 기대어 서 있었다.
차에서 내린 나는 물었다.
“괜찮아요?”
“…숙취가.”
하긴 좀 드셨어야지.
어제 지훈과 부어라 마셔라 하던 게 눈에 선하다.
그래도 지훈은 몇 살 젊다고 말짱한데, 중년을 바라보는 조나단 감독은 아닌가 보다.
“그래도, 내가 굉장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놨다고요.”
조나단 감독이 생색을 내며 말했다.
어련하시겠습니까, 하는 마음으로 웃었다.
“저도요.”
“오, 그럼 바로 내려갈까요? 지훈 씨는….”
조나단 감독이 고개를 쏙 빼서 지훈을 봤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위층을 가리켰다.
아마도… 게임룸을 말하는 거겠지.
“뭐, 하는 수 없죠.”
지훈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입 찢어지겠다, 인마.
우리는 어제 갔던 지하의 작업실로 갔다.
다시 한번 문제의 장면을 돌려보고, 바로 회의를 시작했다.
“먼저, 이 작가님 아이디어를 들어 보죠.”
그가 손바닥을 쭉 펴서 날 가리켰다.
나는 빼지 않고 대답했다.
“어젯밤에 문득 이런 생각을 했어요. 어쨌건 취조실의 장면은 수지와 양오빠의 첫 만남과 연결되어 있는 장면이니까… 앞선 장면을 이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요.”
“흠.”
그가 오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렸을 적 수지가 양오빠에게서 봤던 후광이, 다시금 보이게 되죠. 보이게 되는데… 영화에서 그걸 좀 다르게 표현하고 싶어요.”
“어떻게요?”
“수지의 얼굴 클로즈업을 유지한 상태에서, 그녀의 눈동자에 반사되는 빛을 보여 주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거다.
애초에 조나단 감독의 의견은 이랬다.
취조실의 양오빠를 어렸을 적 모습으로 바꾸자고.
그 이미지는 나쁘지 않지만, 너무 강렬하다.
따라서 이미지의 일부인 양오빠의 ‘후광’을 가져오되, 그걸 수지의 ‘시선’이 아닌 ‘눈동자’에 담는 거다.
나는 설명을 덧붙였다.
“시선과 눈동자는 달라요. 시선이란 건 의도를 담고 있죠. 만약 카메라가 여기서 어렸을 적 모습으로 변한 양오빠를 담는다면… 그 카메라는 수지의 시선을 대변해요. 즉, 지금의 양오빠가 ‘신’으로 보이는 수지의 심리가 반영된 장면이라는 거예요.”
“….”
“하지만 눈동자에 비친 ‘상’은 달라요.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걸 생물학적으로 보는 거니까요. 여기선… 물리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단 양오빠가 신인 양 군다는 은유적인 표현이 되겠지만요. 어쨌건 이렇게 되면 후광 자체는 수지의 심리와는 한 발 더 멀어지죠. 수지가 이 일을 보다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반증도 되고요.”
“….”
“그리고 결과적으로, 수지는 제 양오빠를 구원자가 아니라 살인마로 보기로 결정했잖아요. 그 결정에 어울리는 건, 시선보다는 눈동자죠.”
긴 설명이었다.
내가 영화를 더 잘 알았다면, 보다 간결하고 멋지게 설명할 수 있었겠지.
그래도 조나단 감독은 끈기 있게 내 설명을 들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턱을 괸 채 날 빤히 바라보았다.
내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나로선 알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후우… 감독님의 생각은 어떤가요?”
참다못한 내가 물었다.
그러자 조나단 감독은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건… 이건 정말….”
“네?”
“정말 놀랍군요.”
“뭐가 말이죠?”
“작가님의 아이디어, 제 생각과 거의 비슷해요.”
“…정말입니까?”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에요.”
조나단 감독은 품에서 노트를 하나 꺼냈다.
워낙 악필처럼 보여 알아볼 수가 없었지만, 마지막 결론이라는 듯 동그라미를 친 단어.
그 단어는 분명 ‘eye’, 그리고 ‘pupils’였다.
“pupil은 눈동자란 뜻이에요.”
금홍이 내게 작게 속삭였다.
“하….”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 안에는… 어제 넣어 놓았던 메모가 반으로 접혀 있었다.
나는 그 메모를 펼쳐 보여 주었다.
그 메모에는, 잡다한 고민의 흔적과 함께, ‘눈동자’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금홍은 얼른 조나단 감독에게 메모의 의미를 설명했다.
그러자 조나단 감독의 얼굴에 감동이 번졌다.
“이건 정말….”
그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멋지군요, 작가님. 이런 멋진 작업은… 처음이에요. 정말… 어디 가서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인데요.”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협업을 하는 입장에서 갈등에 부딪혔을 때, 같은 해결책을 생각했다는 건…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특히 예술에서는 더더욱.
이건 아이디어가 겹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비슷한 감성 코드와 같은 결의 예술관.
그게 아니었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벅차오른다고 해야 하나.
그런 감정에 나는 자꾸 들뜨고 있었다.
겨우 이성을 유지하고 나서야, 그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감독님께서 생각한 부분을 풀어 주시죠. 저와 생각이 같다고 해도요. 완전히 같을 순 없을 테니까요.”
“음… 수지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상태에서 그녀의 눈동자를 통해 혼돈을 보여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거기까지는 작가님과 같죠. 다만 저는 그 안에 어렸을 적 양오빠의 모습을 넣는 거죠.”
아하. 알 것 같다.
애초에 자신이 생각했던 이미지.
그 이미지를 눈동자에 비치게 하려 했구나.
그것도 나쁘지 않은 시도였다.
“그리고 후광의 표현은 수지의 눈 떨림을 통해 드러내 볼까 했어요.”
“눈 떨림이요?”
“네. 이미지와 후광을 모두 눈동자에 담기에는 부담스러우니까요. 눈동자에는 양오빠의 어린 시절만 비추게 하고, 후광은 눈 떨림으로 표현하는 거죠.”
역시 조나단 감독은 영상미학적으로 섬세했다.
다양한 요소를 한 장면에 넣을 줄 안다고 해야 하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쯤 되면 누구의 아이디어를 따라가도 괜찮을 것 같다고.
그렇다면… 결정은 감독에게 넘기는 게 맞겠지.
“그 생각도 나쁘지 않은 것 같네요. 저는 어느 쪽이건 좋은 것 같아요. 수지를 클로즈업한 씬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마무리는 맡겨 주시는 건가요?”
“네. 편집권이야 감독님께서 가지시는 게 맞죠. 저는 제 의견을 다 말씀드린 것 같고요.”
“그럼… 제가 좀 더 고민해 보죠. 큰일이에요. 작가님의 아이디어가 자꾸 절 흔들어서.”
그리고 그는 쾌활하게 웃었다.
이정도면 양쪽 모두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그 이후로 회의는 좀 더 이어졌다.
편집점에 관한 소소한 논의들이었다.
취조신 씬과는 달리, 나머지 문제들은 합의점을 찾는 게 어렵지 않았다.
몇 시간 후, 비로소 회의가 끝났다.
지하실에서 나온 조나단 감독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힘찬 악수를 나눴다.
“작가님을 모시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
그는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오늘은 조나단 감독도 저녁 약속이 있어서,
벤이 우리를 호텔까지 데려다줬다.
우리는 호텔 앞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었다.
식사를 다 마쳐 갈 무렵, 지훈이 말했다.
“두 분 다 이제 호텔 올라가서 쉬실 거죠? 저 잠깐 누구 좀 만나고 올게요.”
“갑자기 누굴 만나?”
“아, 이 근처로 유학 온 친구가 하나 있거든요. 정확히는 아버지 친구 아들. 아버지가 만나고 오래서요.”
사업가 집안끼리의 인맥 이런 건가.
“그래. 언제 올 건데?”
“많이 안 늦을 거예요. 별로 친한 애도 아니라서. 맥주나 한잔하고 오려고요.”
그렇게 지훈은 식당에서 나온 후,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나와 금홍은 그렇게 덩그러니 남았다.
물론 이틀 연속 이어진 회의에 굉장히 피곤했고,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바로 뻗어 자려 했지만….
금홍도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런 금홍에게 말했다.
“와인이라도 한잔하고 들어갈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