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74화 (174/204)
  • 174회

    “전 반대예요.”

    난 조심스레 내 의견을 밝혔다.

    그러자 조나단 감독은 약간 당황한 것 같았다.

    “어… 그런가요?”

    “네.”

    “왜죠?”

    “관객이 이 영화를 다 봤을 때….”

    “….”

    “컬트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스릴러적인 긴장감이 남길 바라니까요.”

    물론 영화는 나보다 조나단 감독이 잘 알 거다.

    하지만 이 영화는 ‘협업’으로 하기로 했으니, 내게도 이 정도 발언권은 있겠지.

    그래서 조나단 감독도 날 미국까지 초대한 것일 테고.

    하지만 조나단 감독도 쉽게 물러나진 않았다.

    “스릴러적인 건 이미 영화 전반에 깔려 있어요. 컬트는 그 분위기를 더 의미심장하게 만들어 줄 거고요.”

    “알고 있지만, 감독님이 만드신 그 ‘씬’, 그러니까 취조실의 양오빠가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건…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요.”

    이미지 자체로만 보면 훌륭하다.

    영화감독이라면 욕심을 내지 않을 수 없겠지.

    이를테면 이런 거다.

    소설가들이 소설에서 튀는 장면을 만들어 내는 것.

    자연스러움은 떨어지지만, 대부분 그런 장면에서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니까.

    일종의 ‘작가주의’랄까.

    “이미지가 다른 것들을 잡아먹을 것 같나요?”

    그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기서 이미지만을 드러내면, 지금까지 쌓아 왔던 많은 의미가 이미지 뒤로 밀려나고 말죠.”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 말을 수긍하겠다는 뜻은 아닌 것 같았다.

    한 마디로 ‘당신의 의견은 잘 들었다’는 뜻.

    상대는 비즈니스맨이 아니라 영화감독이다.

    효율성과 경제성을 따지는 자리라면 차라리 쉽지.

    이건 예술성을 따지는 논의이기에 그도 나도 쉽게 물러나기가 어렵다.

    대단히 섬세한 설득이 필요해.

    목소리가 크다고 이기는 종류의 회의가 아니다.

    “감독님. 방금 그 장면, 다시 보여 줄 수 있나요?”

    “얼마든지요. 수백 번 봐도 좋아요.”

    그는 영상을 돌렸다.

    약 십 초 정도밖에 되지 않는 씬.

    서로를 바라보는 양오빠와 수지.

    자신의 부모를 죽인 살인마를 죽여 준 양오빠.

    그를 구원자로 봐야 할지, 살인자로 봐야 할지….

    그 첨예한 갈등이 드러나는 수지의 표정.

    조나단 감독의 욕심이 과한 게 아니긴 하다.

    좀 더 컬트적인 뭔가를 넣으면… 더 강렬한 장면으로 남을 수 있긴 할 텐데.

    한 마디로, ‘한 방’을 먹일 수 있다는 것.

    문제는… 조나단 감독이 생각한 장면이,

    원작자인 내가 느끼기엔 ‘너무’ 강렬하다는 거다.

    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컬트적 느낌이 추가되는 것 자체는 찬성이에요.”

    “…오.”

    “다만 좀 더 소프트한 방법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소프트한 방법?”

    “네. 감독님이 제시한 이미지를… 좀 더 은은하게 전달해 보는 거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로선 한 발 양보를 한 셈이었다.

    조나단 감독은 턱을 괸 채, 영상 속 수지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커다란 눈동자가 빛났다.

    그리고 이내 나지막이 이렇게 말했다.

    “그래요, 좋아요.”

    “좋은 생각이 났나요?”

    “하하, 이제 해야죠.”

    그는 양손 깍지를 만들어 뒷머리를 괴었다.

    심각했던 표정은 간데없이, 그 특유의 여유와 유머가 넘치는 태도로.

    “물론 이 작가님과 함께요. 우리, 내일도 만나기로 했잖아요.”

    “그 말은… 내일까지 이 장면에 대한 나름의 답을 각자 찾아보자는 건가요?”

    “네. 작가님이 말했던 것처럼, 컬트를 은유적으로 풀 수 있는 방법을요.”

    이거, 일거리가 생겨 버렸다.

    그래도 조나단 감독의 계획은 나쁘지 않았다.

    우리에겐 하루의 시간이 더 있고, 그사이에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지도 모르니까.

    “좋아요. 내일 뭐라도 들고 와 볼게요.”

    우리의 1차 회의는 그렇게 끝이 났다.

    지하실에서 나왔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통유리창 밖이 어둑어둑했기 때문이다.

    “지훈인 어딨죠?”

    나는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2층에 있을 거예요. 거기에 게임룸이 있거든요.”

    고용인 한 명이 눈치 빠르게 2층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지훈이 고용인과 함께 내려왔다.

    “잘 놀았어?”

    “와… 형, 정말 최고였어요.”

    얼마나 게임을 했는지 녀석의 눈이 시뻘겠다.

    나는 실컷 일하다 왔는데… 정말 부럽구나.

    “이제 저녁 식사를 하러 갈까요? 제가 대접하게 해 주세요.”

    조나단 감독은 차 키를 들고 나왔다.

    지훈은 이미 간식을 잔뜩 먹은 얼굴이지만, 우리 세 사람은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차고에 들어가니 그의 커다란 지프가 있었다.

    높은 확률로 그가 가진 차‘들’ 중에 하나겠지.

    우린 그의 차를 타고 저택을 나섰다.

    그리고 그때부터, 양옆 길 나무 사이로 뭔가가 반짝였다.

    “저 불빛들은 뭐죠?”

    “아, 파파라치들이에요. 양심도 없다니까. 좀 티 안 나게 찍어 주면 어디가 덧나나. 밤이라고 플래시도 켠다니까요?”

    조나단 감독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나로선… 상당히 신기한 경험이었다.

    저렇게 많은 사람이 누군가의 사생활을 궁금해한다는 게.

    그리고 어부지리이긴 하지만, 그 관심 속에 내가 들어갔다는 것 역시.

    * * *

    “…배 터질 것 같아요, 형.”

    “우리 없는 동안 간식 너무 많이 먹은 거 아니냐?”

    “아~ 거기 완전 파라다이스. 돈 많이 벌어서 저도 그런 데에서 살고 싶어요.”

    지훈이 황홀하다는 듯 말했다.

    지금 시간은 열한 시.

    우리는 이제야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조나단 감독은 좀처럼 우리를 보내 주지 않았다.

    저녁을 먹이고, 맥주를 먹이고, 마지막으로 와인까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금홍이 아니었더라면, 새벽까지 달리다가 그의 집으로 돌아가 아이디어 회의를 했을지도.

    “대체 그 게임룸에서 뭘 했어?”

    “가니까 온갖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이 가득하더라고요. 와… 게임 고르는 것도 일이었는데, 아직 한국에는 공개되지도 않은 게 있어서 그것 좀 하다가… VR 게임도 했어요. 그리고 제가 피곤해하니까 메이드가 온갖 과자랑 맥주를 갖다 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거 먹었죠. 먹으니까 또 힘이 나서 또 게임하고… 무한 반복.”

    “실컷 놀았구만. 우린 지하실에서 일했는데.”

    “어쩔 수 없다잖아요. ‘프라이빗’하게 형을 보고 싶다는데 제가 빠져 줘야죠.”

    언제 배운 제스처인지, ‘프라이빗’이라 말하며 양손 검지와 중지를 까딱까딱하는데… 그것참 얄밉기 짝이 없구나.

    “형은 어땠어요? 조나단 감독, 말 잘 통해요?”

    “그럼. 자기 세계가 확실한 것에 비해선, 유연한 타입이야.”

    “그래요?”

    나는 오늘 있었던 회의에 대해 말해 줬다.

    지훈은 어느새 침대에 앉아 이야기를 들었다.

    “흐음… 그 장면에 손을 대고 싶기는 한 모양이네요.”

    “그렇지. 본인이 보기엔 임팩트가 부족한 거야. 어쨌거나 영상은 그쪽이 전문가니까… 그의 의견에 따라 주면서도 정도를 조절해 봐야 할 것 같아.”

    “어렵네요.”

    “감당해야지. 협업이란 그런 거잖아.”

    남과 같이 일한다는 건, 짐을 더는 게 아니다.

    상대의 짐을 나눠서 지는 거지.

    “도와드릴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방해라도 안 되게 얼른 씻고 잘게요.”

    지훈이 비척비척 욕실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술도 꽤 마셨다.

    녀석은 썩 영어를 잘하는 편은 아닌데도, 온갖 보디랭귀지를 섞어가며 조나단 감독과 어울렸다.

    이럴 때 보면 정말 대단한 성격이라니까.

    지훈이 샤워를 하는 동안, 나는 옷을 갈아입고 작은 테이블 앞에 앉았다.

    저녁 식사 이후 내내, 머릿속엔 영화 <그 집>의 장면만이 가득했다.

    조나단 감독과 합의를 보지 못한 취조실 장면.

    그 장면에 어떻게 효과적인 컬트적 요소를 넣을지… 여간 고민이 되는 게 아니었다.

    “흠….”

    호텔 객실에 비치된 기본 노트와 펜.

    의미 없는 낙서를 하며 고민을 이어 갔다.

    “은은하지만… 강력한 한 방이라.”

    만약 글로 표현하라 했다면 더 쉬웠을 거다.

    하지만 ‘장면화’를 염두에 둬야 하기 때문에… 낯설고, 쉽지 않다.

    그렇다면 근본으로 돌아가자.

    영화의 근본은 장면과 장면의 연결이다.

    취조실의 장면이… 어디와 연결되지?

    …양오빠를 처음 만난 장면이다.

    ‘신’을 흉내 내는 양오빠를 봤을 때 수지는….

    “…눈이 부셨지.”

    소녀였던 수지는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 모습에, 양오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고.

    취조실 장면은 그 첫 만남의 변주다.

    양오빠가 수지의 ‘신’이 될 수도 있는 순간 말이다.

    문득, 아이디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영상으로 통할지 안 통할지 모르지만… 나로선 꽤 그럴듯해 보이면서도, ‘컬트적’인 아이디어.

    나는 급하게 노트에 아이디어를 갈겨 적었다.

    그리고 노트 페이지를 북, 하고 찢었다.

    달칵, 하고 문이 열리고 지훈이 나왔다.

    “어후, 시원해. 형 씻으세요.”

    “어, 그래. 먼저 자라.”

    지훈이 바로 침대로 뛰어들었다.

    나는 찢은 노트 페이지를 내 외투 주머니에 넣고, 조금은 후련한 마음으로 욕실로 들어갔다.

    * * *

    그 시각, 서울의 대한외대 교수실.

    피터 한 교수는 오후의 커피를 마시며, 인터넷 영문 기사를 훑어보고 있었다.

    미국의 정세에 대한 칼럼들.

    유가나 주식에 대한 낭설들.

    그 어떤 기사 앞에도 덤덤하던 그의 눈썹이 움찔했다.

    기사의 제목은.

    ― 조나단 감독, 동양 작가와 밀회.

    “제목도 참 천박하게 지었군.”

    그는 비웃음이 만연한 얼굴로 기사를 눌렀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가장 좋아하는 ‘동양 작가’ 이상의 사진이었다.

    ‘팀 이상’이 조나단 감독의 저택으로 들어가는 모습.

    “저택에 초대를 받았어? 제법인데?”

    파파라치가 붙은 셀럽들은 남을 집 안에 들이지 않는다.

    이렇게 사진이 찍혀 불쾌한 기사가 나니까.

    그걸 감당하고서라도 이상을 초대했다는 건….

    “조나단 감독이 홀딱 빠졌군.”

    피터 한 교수는 피식 웃었다.

    사진이 찍혔을 뿐, 기사 내용이야 속 빈 강정.

    피터 한 교수는 관련 기사로 시선을 옮겼다.

    “응?”

    그의 눈에 들어온 건.

    ― 누들 출판사, 개봉 임박 영화 <그 집>의 북콘서트를 열다.

    란 기사 제목이었다.

    “뭐야… 이런 얘긴 없었는데?”

    그는 기사를 살펴봤다.

    읽어 보니… 어떻게 된 건지 비로소 이해가 갔다.

    이상이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누들 측과 만나서 급하게 잡은 일정이라고.

    “…흠.”

    피터 한은 의자에 꾹 눌러앉았다.

    북콘서트 일정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시애틀 시간을 따지면… 이틀 뒤.

    기사가 난 게 어제임을 생각해 보면….

    “이건 뭐 관객을 부르겠단 거야 말겠다는 거야.”

    미국은 한국이 아니다.

    이상의 팬이 적지 않다 하더라도, 그들이 시애틀 밖에 살면 행사에 오기 힘들다.

    그러니 독자들이 많이 모일 확률?

    극히 적었다.

    아마 동네 독서회 정도 되겠지.

    뭐, 누들도 그걸 감안하고 이 행사를 여는 걸 테지만.

    “내가 번역한 책인데. 그 꼴은 못 보지.”

    피터 한은 워드 창을 켰다.

    그리고 시계를 봤다.

    미국의 가장 큰 인터넷 문학 저널 ‘LJ’.

    피터 한은 매주 그 저널에 문학 칼럼을 썼다.

    그의 칼럼이 미국 내에서 상당한 인기를 구사하는 만큼, 피터 한의 자부심도 상당했다.

    이번 주 원고 마감은 지금으로부터 세 시간 후.

    물론 원고는 어제 다 썼다.

    21세기의 낭만주의에 대한 심도 있는 해석.

    ‘하지만 그 글은 다음 주에 보내 버리고….’

    피터 한 교수의 눈에 불이 켜졌다.

    ‘지금 당장 필요한 글을 쓰자. 3시간이면 충분하지.’

    피터 한은 그렇게 마감을 3시간 남기고, 새로운 칼럼을 위한 제목을 지었다.

    그 제목은… 학술적이면서도, ‘어그로’가 상당했다.

    ― 미국 문단이 사랑하는 ‘네오 오리엔탈리즘’의 기수가 미국에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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