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회
크리스가 말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누들과 작은 행사를 하나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행사?
금홍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마 이번에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이걸 어쩌지?’ 하는.
나는 크리스에게 말했다.
“그게… 조나단 감독님과의 회의가 언제 끝날지 지금으로선 저도 알 수가 없어서요.”
“오, 정확한 일정이 아직 안 잡혀 있다는 거죠?”
“네. 게다가 일정 관리를 하는 매니저가….”
그러니까 ‘할 일’이 많다고 떵떵거리던 송지훈이….
“지금 저 위에서 쿨쿨 자고 있네요.”
나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그러자 크리스가 킥킥 웃었다.
“재밌군요, 이상 작가님은.”
“하하… 그나저나, 어떤 행사인가요?”
정말 필요하다 싶으면, 조나단 감독과 얘길 해서라도 시간을 낼 생각이었다.
“<그 집>의 독자들을 모시고 북콘서트를 하는 거죠. 책과 영화의 홍보를 하는 차원에서.”
크리스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사실 실감이 잘 안 나는 일이었다.
미국에서는 내가 막말로 ‘쌩’ 신인인데… 과연 많은 사람들이 와 줄까 싶었다.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요?”
“음….”
크리스가 신중하게 말했다.
“많은 인원이 올 거라곤 장담 못 드려요. 하지만….”
하지만?
“<그 집>의 매니아층은 분명 있어요. 게다가 조나단 감독이 <그 집>을 영화화하고 있는 지금… 독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죠. 작가님 생각보다 작가님은 미국에서….”
“….”
“영향력이 없지 않아요.”
“…흠.”
“미국 팬들을 생각해 주세요. 작가님 생각처럼 정말 소수라고 해도… 그분들은 작가님을 원하고 있을 거예요.”
크리스의 말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한국과 미국의 거리는 정말 멀다.
미국의 독자들을 만날 기회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르지.
몇 안 되는 사람들이라 해도, 만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거 일정이 정말 가능한가?
“크리스 씨, 저는 나흘 후면 비행기를 타야 해요. 그리고 앞으로 이틀은 편집 회의를 해야 하고요. 남은 시간은….”
“사흘 후, 단 하루가 남는군요.”
“준비하기엔 벅차지 않을까요? 저야 괜찮지만 일단 누들 쪽에서.”
“준비가 가능하면 하실 건가요?”
그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따지고 보면 위험한 제안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조나단 감독과의 편집 회의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하지만… 해 보자.
이런 기회는 두 번 오지 않는다.
“사흘 후 저녁, 세 시간 정도라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보죠.”
여차하면 북콘서트가 끝나고, 다시 조나단 감독에게 가는 수밖에.
“약속하신 거죠?”
나는 마지막 확인차 금홍에게 물었다.
“우리, 다른 스케줄 없죠?”
“음… 네. 없어요.”
나는 크리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크리스는 휴대폰을 들어 올리더니 씩 웃었다.
그의 커다란 손에 들린 휴대폰.
크리스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뭔가를 썼다.
우웅―
내 휴대폰이 울렸다.
나는 엉겁결에 휴대폰을 확인했는데, SNS 알림이 하나 떠 있었다.
“설마….”
나는 중얼거리며 SNS를 확인했다.
알림을 울린 건 방금 크리스가 작성한 누들의 피드.
― <그 집>의 작가 ‘이상’! 미국에 오다!
그 아래엔 사흘 후에 있을 북콘서트의 일정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홍보 끝.”
그는 양손을 들어 모든 일이 끝났음을 알렸다.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출판사’의 일인데, 이렇게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다니.
‘누들’이란 출판사가 얼마나 유연한지 새삼 느껴졌다.
영업에 성공한 크리스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리고 그제야 쇼핑백을 내게 내밀었다.
그 안에는 온갖 선물이 가득했다.
“이게 뭐예요?”
“제가 작가님의 열성적인 팬이라는 거, 그냥 한 말이 아니거든요. 존경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거예요. 먼저 드리면 북콘서트 해 달라는 뇌물처럼 보일까 봐.”
내가 느낀 첫인상처럼, 그는 신중하고 생각이 깊은 타입이었다.
나는 마다하지 않고 받기로 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 팀과 나눠 쓸게요. 저 때문에 먼 길을 오느라 고생이 많았거든요.”
“그럼요. 뜻대로 하세요.”
그는 상관없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이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생색을 내는 건 아닙니다만… <그 집> 단행본을 조나단 감독님께 보낸 건 저였어요. 누들이 보낸 척을 했지만, 저의 독단적인 행동이었죠.”
“…네?”
나는 깜짝 놀랐다.
조나단 감독이 <그 집>을 읽게 된 건, 누들의 홍보 덕분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눈앞의 이 한 사람의 행동이었다고?
“<그 집>을 읽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거든요. 보시다시피, 저는 흑인이잖아요?”
그는 자신의 손등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 그는 피부는 명백하게 어두웠다.
“흑인에 관한 문학은 수없이 많아요. 하지만 대부분 정치적 메시지를 주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죠. 차별을 하지 말아야 한다. 뭐 이런… 그런데 작가님 작품은 달랐어요. 흑인 한 명 나오지 않는데… 제 삶을 되돌아보게 되더라고요. 비단 흑인들만 이런 감정을 갖진 않을 거예요. 아마 자신이 미국 사회의 하위 계층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기분을 느꼈겠죠. 그러니까 <그 집>은 저와 같은 독자들에겐….”
“….”
“정치적이면서도 예술적이죠. 그런 ‘인생 소설’을 만난 거예요. 지구 반대편의 작가에게서.”
그는 조곤조곤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설사 금홍의 번역을 통했다 하더라도… 내게 따뜻하게 스며들어 왔다.
지구 반대편의 작가라….
내게는 크리스가 지구 반대편의 독자겠지.
전생이었다면 꿈도 못 꿨을 만남이다.
일본조차도 벗어나기 힘들었던 걸 생각해 보면….
크리스와 나는 좀 더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그 집>에 관해 궁금한 게 많은 듯했다.
대체 몇 번을 읽었는지 감도 잡히지 않을, 깊고 심오하면서도 학술적인 질문들.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하나씩 하다 보니,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시애틀에서의 첫날은 그렇게 호텔에서 저물어갔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이런 독자는 미국을 다 뒤져도 만나기 힘들 테니.
* * *
다음 날, 오전.
미국에 온 지도 하루가 지났다.
우리 셋은 아침 일찍 조식을 먹고 나갈 준비를 했다.
약속대로라면… 곧 조나단 감독이 보낸 벤이 올 것이다.
그 벤을 타고 그의 사무실로 가게 되겠지.
“형, 나가시죠? 시간 다 된 것 같은데.”
세미정장을 차려입은 지훈이 말했다.
“뭘 그렇게 차려입었어?”
“그래도 비지니슨데, 매니저라면 이 정도는 해 줘야죠.”
“…그런데 왜 내 옷은 이런 걸 가져왔어?”
사실 떠나기 전까지 원고 때문에 워낙 바빠서, 내 짐은 지훈이 챙겼다.
남자 짐이야 뻔해서 별문제는 없는데… 옷이 하나같이 너무 ‘무드’가 살아 있다.
베이지색 셔츠에 슬랙스, 단추 없는 가을 코트.
뭐 이런 ‘나 작가요’ 하는 듯한 옷들.
그런데 저는 저런 딱 떨어지는 정장을 입다니.
하지만 정작 지훈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다.
“작가는 꾸안꾸를 해 줘야 작가스럽죠. 각 잡고 정장 입고 가면 그것도 촌스러워요.”
“꾸안꾸가 뭔데?”
“꾸민 듯 안 꾸민 듯 꾸민 거요. 형님 요즘 유행을 모르시네.”
“너 많이 알아라, 유행. 됐으니까 얼른 가자.”
옷이 이것뿐인데 별수 있나.
그렇게 방에서 나갔는데, 금홍이 기다리고 있다.
검은 정장 투피스를 입고.
“준비 끝났죠? 어서 가요.”
말끔하게 포니테일까지 한 금홍은… 완벽한 비즈니스우먼이었다.
뭐야, 이러면 나만 철없어 보이는 거 아냐?
나는 지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이걸 어떻게 할 거냐는 원망을 담아.
그러자 지훈은 괜찮다는 듯 내 등을 툭툭 밀었다.
“아유, 절 믿으시라니까. 형 패션 하나도 모르잖아요.”
지훈은 얼른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뭐… 패션 하나도 모르는 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전생에도 단벌 신사에 봉두난발 신세였는데.
다시 태어난다고 없던 패션 감각이 생기는 건 아니지.
억울하지만 믿고 가는 수밖에.
호텔 밖을 나서니 정말 벤이 하나 대기하고 있었다.
차에서 낯익은 사람이 한 명 내렸다.
예전에 도쿄에서 조나단을 만났을 때, 조나단이 데리고 온 직원이었다.
그와 가볍게 인사를 하고 벤을 탔다.
“조나단 감독의 사무실로 가는 거죠?”
내 물음에 그가 킥킥댔다.
“아니요. 여러분들을 다른 곳으로 납치하는 거예요.”
…납치?
“우린 동양인들이라 힘이 없어서 값을 별로 못 받을 텐데.”
내 농담에 그가 낄낄거렸다.
“멋진 말이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조나단 감독의 집으로 가는 길이니까.”
“…조나단 감독의 집이요?”
지훈이 놀라 물었다.
그러자 그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대해도 좋아요. 감독님 집, 꽤 좋거든요. 꽤 가야 하니까 좀 쉬어 두세요.”
“그래요. 그럼 운전 잘 부탁할게요.”
그는 걱정 말라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지훈이 팔꿈치로 날 툭 쳤다.
“형.”
“응?”
“아마 엄청 부촌으로 갈 것 같은데요.”
“…그렇겠지.”
“그냥 형 정장 입힐걸.”
“…야.”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지훈을 봤다.
그러자 녀석은 장난이라는 듯 작게 웃었다.
금홍이 말했다.
“꽤 간다는 걸 보니 부촌이 맞긴 한 것 같아요. 미국은 도심에서 떨어질수록 집이 크고 비싸거든요.”
물론 나도 사람이기에, 미국 톱클래스 감독의 재력이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무실이면 충분한데.”
나는 진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일하는 장소는, 부담이 없을수록 좋았다.
그런 의미에서 집 초대는… 굉장히 부담스러웠고.
벤은 한참을 달렸다.
낮은 산등성이가 보이고, 잘 닦인 도로를 올라갔다.
양옆으로 영화에서나 봤던 저택들이 줄지어 있었다.
사람 하나 없이 간간이 차만 다니는 풍경.
끼익― 하고 벤이 멈췄다.
철제 대문 앞이었다.
하지만 아직 내릴 때는 아닌 것 같았다.
운전을 한 직원이 경비와 무슨 얘길 나눴다.
철컹, 하고 철제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대박.”
지훈이 중얼거렸다.
엄청나게 커다란 정원과 수영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앞을 벤은 천천히 지나갔고, 이윽고 현관 앞에 선 조나단 감독이 보였다.
그는 벤을 보자마자 큰 보폭으로 다가왔다.
챙이 곧은 캡모자, 편안한 셔츠 차림.
내가 입고 온 옷들과 큰 위화감은 없었다.
“제가 말했죠?”
지훈이 씩 웃으며 어깨를 폈다.
아무래도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 같긴 하지만.
“…그래.”
인정을 안 할 수가 없다니까.
아무튼 우리는 벤에서 내렸다.
그리고 조나단 감독과 뜨거운 악수와 포옹을 나눴다.
그는 날 보고 굉장히 좋아했다.
감정을 숨기거나 돌려 말하는 법 따윈 모르는 사람이었다.
“현관 앞에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새 한 마리 날아갈 때마다 움찔움찔했다고요. 다들 들어와요. 오, 그런데 당신은 처음 보네요. 누구시죠?”
조나단 감독은 지훈을 보고 말했다.
맞다. 도쿄에서 금홍을 봤지만, 지훈은 초면이지.
“제 매니저예요.”
“역시 대작가는 다르군요. 매니저라니. 전 영화를 세 개를 찍고 나서야 한 명 겨우 고용했는데요.”
하고 또 호탕하게 웃었다.
할 말이 없었다.
난 데뷔하자마자 이 두 사람을 고용했으니까.
“어쨌든 들어오시죠. 제 성에.”
그는 그렇게 말하며 저택의 현관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