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67화 (167/204)
  • 167회

    낭독회는 야외에서 진행됐다.

    모두 프랑스어로 이루어져 있어 알아들을 순 없지만, 그들의 감정과 표정으로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회를 맡은 사람은 장 스테판.

    오랜만에 그를 보니 정말 반가웠다.

    그는 네 명의 참가자와 앞에 앉아 있었는데, 주위로 수십 명의 관객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낭독회가 시작되었다.

    장 스테판이 단상에서 내려가고, 무대엔 두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

    시간이 조금 지나니 알 수 있었다.

    한 남자는 해설.

    나머지 남자는 하융.

    두 여자는 각각 ‘심’과 ‘희’를 맡았다는 걸.

    그들은 이를테면, ‘연기’를 하고 있던 것이다.

    비록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지만, 노래처럼 부드러운 프랑스어의 힘 때문일까.

    우리 세 사람은 낭독에 빠져들었다.

    “아름답네요.”

    금홍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화답하듯 그녀의 손을 잠깐 잡았다 놓았다.

    화면 속 사람들은 분명 <지팡이>에 몰입하고 있었다.

    특히 네 사람을 보고 있는 시민들은 마치 명작 영화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듯, 그렇게 낭독에 집중하고 있었다.

    낭독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해설자가 마지막 줄을 읽고 책을 덮는 순간.

    객석에선 큰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와… 멋져.”

    지훈은 힘껏 박수를 쳤다.

    그리고 간만에 진지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진짜 멋져요, 형. 지구 반대편에서 형 소설을 저렇게 낭독한다는 게… 저 진짜 믿기질 않아요.”

    지훈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나는 이 모든 일이 나만의 힘은 아니라는 뜻으로.

    지금까지 지훈 역시 적잖은 역할을 해 왔다는 의미로.

    녀석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줬다.

    파리에서의 낭독회는….

    그래, 따지고 보면 지구 반대편의 일이다.

    하지만 단순히 기분이 좋다는 점 외에도 얻은 게 있다.

    내가 좋은 글을 쓰고 있다는 ‘실감’.

    그 생생한 실감은 집필의 큰 원동력이지.

    이렇듯 프랑스에서 열리는 이벤트를 한 번 보고 나니, 또 다른 해외 이벤트가 떠올랐다.

    바로 일본의 토론회였다.

    “지훈아, 도마크가 연다는 토론은 얘기 없어?”

    “아, 그거. 곧 열릴 거예요. 이번 주 토요일이었나. 그런데….”

    “그런데?”

    “토론 신청 인원이 많았나 봐요. 그중엔 유명인사들도 적지 않다고… 그래서 아예 유튜브 라이브 방송으로 송출할 것 같다던데요?”

    그래?

    생각보다 일이 커지는군.

    나는 멈춰있는 빔프로젝터 화면을 가만히 보았다.

    일본은 은근한 경쟁을 즐기는 나라다.

    굳이 나쁘게 표현하자면, 질투가 많은 나라.

    프랑스가 <지팡이>로 이렇게 멋진 행사를 열었다는 걸, 그들도 모르지 않을 거다.

    어쩌면… 토론으로 뭔가를 보여 주고 싶은 이들이 많을지도.

    * * *

    일본 도쿄.

    도마크 출판사 사옥 꼭대기 층의 행사장.

    시민토론이란 명분으로 모인 사람들이지만, 문단은 물론이고 기자, 사회운동가들까지 모여 있었다.

    구석에 서 있는 미쯔하루 편집장은 내심 놀랐다.

    사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었다.

    종이책으로 발간되지도 않은 한국 작가의 소설.

    그 소설에 대한 토론에 얼마나 많은 독자가 모일지.

    하지만 이 풍경이 증명하고 있었다.

    <지팡이>는 알게 모르게 일본 문화시장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그러지 않고서야 이 많은 유명인사가 모일 리가 없다고.

    물론 이들이 순수하게 ‘문학’을 논하러 온 건 아니다.

    20세기의 인물 하융이 보여 주는 친일적 면모.

    그 면모에 자신들이 원하는 ‘프레임’을 씌우고 싶겠지.

    한일관계는 일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정치적 이슈다.

    그런데 ‘그 유명한’ 이상이 일제강점기에 대한 글을 썼으니, 정치권에서도 가만히 있을 리가.

    토론의 주제는 하나였다.

    강렬하지만, 원론적인 주제.

    ‘하융은 친일적 인물인가. 하융의 친일 행위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20세기 조선인의 ‘친일’을 일본이 논한다는 것.

    굉장히 기묘한 일이었다.

    토론은 안정적으로 흘러갔다.

    일명 ‘우익’이라고 불리는 기자도, 일본의 역사의식을 지적하는 사회운동가도, 서로에 대한 예의와 매너를 지켰다.

    그러나 토론은 이내 불이 붙기 시작했다.

    우익 기자의 황당한 한 마디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하융은,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의 지식인 아닙니까. 친일은 그런 상위 엘리트 지식인의 이성적 통찰의 결과고요.”

    “뭐라고요? 조선인의 입장에서 친일이 어째서 이성적인 통찰의 결과가 될 수 있는 겁니까?”

    사회운동가가 발끈했다.

    그러자 기자가 피식 웃었다.

    “물론 당시 조선인들의 입장에서 옳고 그름만 두고 따지면, 일본과 친해져선 안 되겠죠. 그들은 우리를 적으로 보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융이 가진 지식인적 측면을 보자는 겁니다. 많이 배운 이일수록 많은 걸 보죠. 다각적인 측면에서 당시 조선인이 일본과 친해지려 했던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이겁니다.”

    “하융이라는 인물을 그저 그 당시 수많은 조선의 지식인 중 한 명에 불과하다고 치부하다니. 그에게 얼마나 복잡한 내면적 서사가 있는데요. 아무래도 <지팡이>를 다시 읽으셔야겠습니다.”

    이번에는 기자가 발끈했다.

    그는 펜으로 책상을 탁, 찌르더니 외쳐 물었다.

    “지금 제가 책조차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겁니까?! 어떻게 자국의 기자를 이렇게 무시해가면서 한국의 작품을 옹호할 수 있습니까?”

    “한국의 작품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 소설 속 인물에 대한 독해가 잘못되었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옹호하셨다고 하셨는데… 제가 옹호했다는 결과가 성립이 되려면, 기자분께서 <지팡이>를 비판했다는 전제가 깔려야 할 텐데요. 제가 잘못 이해했습니까?”

    반격에 반격을 이어 가는 토론이었다.

    미쯔하루 편집장은 턱을 괴고 그 상황을 지켜봤다.

    ‘이거 생각보다 토론이 굉장히 뜨거운데. 이들은 <지팡이>가 일본 사회에 미칠 영향을 예견하고 있는 거다. 그래서 미리 자신의 편으로 <지팡이>를 끌어들이려는 거지. 그래야 <지팡이>를 좋아하는 대중까지 자기 진영 논리로 설득할 수 있으니.’

    그리고 한 가지 더 스쳐 지나가는 생각.

    ‘좋아. 이 정도로 논란이 되는 작품이라면 도마크에서 종이책을 발간하더라도 괜찮을 거야. 대중들은 ‘문제작’을 원하니까. 그래, 차라리 더 세게 불타올라라.’

    다분히 출판사 편집장다운 생각이었다.

    격렬해지는 토론에, 그는 가만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경을 쓴 한 작가가 목소리를 냈다.

    “다들 제대로 보셨다면, 하융은 몰래 일본을 찬양하는 시를 쓰기까지 합니다. 그게 친일을 하고 싶은 하융의 욕망을 보여 주는 장면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그 장면을 그렇게 단순하게 봐도 좋을지 모르겠군요.”

    토론에 끼어든 건 원로 평론가였다.

    <지팡이> 초기에 소신 있는 인터뷰를 했던, 바로 그 평론가.

    “네. 표면적으로 하융은 친일 행위를 했죠. 하지만 중요한 건, 그가 바로 그걸 태워 버린다는 거예요.”

    “그렇겠죠. 겁쟁이니까. 다른 조선인들의 눈에 들어 미움을 살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게 아닙니다.”

    원로 평론가는 그 어떤 감정의 동요 없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차분했는지, 소란스러운 행사장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만약 그랬다면 그 뒤에 이어지는 하융의 심리가 ‘두려웠다’거나 ‘부끄럽다’가 되어야 합니다. 조선인에게 들킬까 두려웠거나, 자신의 그런 욕망이 발현된 게 조선인으로서 부끄러워야 하죠. 하지만 하융의 심리가 어떻게 서술되었는지 아십니까?”

    작가는 말문이 막혔다.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이 날 리가 있나.

    원로 평론가는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는 해방감을 느꼈다, 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해방감이란, 제가 인터뷰에서도 밝힌 거지만… 조선인이니 일본인이니 하는 기준들에서 정신적인 자유를 찾은 거지요. 애초에 이건 국적과는 상관없는 문제입니다.”

    장내에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은 동요했다.

    국적과는 상관없다고?

    20세기 조선인이 친일을 했는데?

    그것은 참으로 획기적인 결론이었다.

    원로 평론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하융의 이런 행위는 그가 가진 기질적 ‘씨앗’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체제에 융합하지도, 권력에 기생하지도 않는 기질을 가지고 있죠. 아주 독립적이며… 전복적인 기질 말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 하융이란 인물의 미래가 굉장히 기대됩니다.”

    “흠. 어떻게 말입니까?”

    사회운동가가 물었다.

    그의 눈에는 원로 평론가에 대한 존경이 가득했다.

    원로 평론가가 덤덤하게 말했다.

    “조만간 크게 한번 사고를 칠 것 같거든요. 조선에게건, 일본에게건.”

    토론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의 말에 대한 가열찬 반박이 일어났고, 그 반박에 대한 반박 역시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윤리적으로 옳은 논리를 이기긴 어려운 법.

    점점 사회운동가나 원로 평론가의 말에 힘이 실렸다.

    이 장면을 라이브로 보고 있을 대중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건 당연한 일.

    이런 식의 토론을 반복하다 보면… 대중에게 하융은 단순한 ‘친일파’가 아니라 ‘정신적 해방자’에 가까워질 거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미쯔하루 편집장.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본에서 <지팡이>를 종이책으로 내기 위한 밑 작업.

    생각보다 잘 먹혀 가고 있는 것 같다.

    * * *

    도마크 출판사가 주관한 토론.

    미쯔하루 편집장에겐 내색하지 않았지만, 유튜브 라이브로 처음부터 끝까지 토론을 지켜봤다.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일본은 워낙에 역사의식이 보수적이니까.

    하지만 토론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사회 각계 인사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낼 때마다, 하융의 행동에는 다양한 의미가 부여되었다.

    하융을 친일파로 보건, 정신적 해방자로 보건, 작가 입장에선 재밌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한국에도 번졌다.

    가장 먼저 반응이 온 건 홈페이지였다.

    나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지팡이>는 일본에서 비교적 인기가 없었다.

    아무래도 그들이 보기에 ‘불편한’ 배경과 소재를 사용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토론 이후.

    <지팡이>의 일본어판 결제 수는 세 배가 뛰었다.

    그 격렬한 토론이 일본 대중에 영향을 준 게 분명했다.

    그리고 또 하나.

    그 토론은 장면 장면 번역되었고, 한국의 여러 사이트를 떠돌아다녔다.

    네티즌들의 댓글은 말할 것도 없었다.

    ― 저 기자 미친 거 아님?; <지팡이> 제대로 읽어보고 하는 소리야? 열받네.

    ― 평론가님 말씀하시는 게 다 맞음. 소설에 정치적인 부분은 전혀 중요하지 않아. 하융은 그냥 어느 나라의 국민도 되고 싶지 않고 그냥 하융 자신으로 남고 싶은 게 아닐까. 난 그런 게 진짜 인간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함.

    ― 나도 솔직히 저 우익 기자처럼 하융이 강한 권력 편에 붙고 싶어서 친일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저 새끼 말하는 거 보니까 선 긋고 싶어진다. 좀 다른 관점으로 <지팡이> 다시 봐야겠어. 내가 좀 편협했던 듯.

    ― 그런데 진짜 <지팡이> 인기 좋다. 일본에서 저런 토론도 하고. 부럽다.

    ― 맞음. 일본에선 종이책도 안 나왔는데 저 난리 피웠대잖냐. 종이책은 한국에서만 냈대. 우리 특별대우 받는 거였음ㅋㅋㅋㅋㅋ

    요즘 댓글을 보다 보면 느낀다.

    하융의 친일 행위로 떠나갔던 독자들이, 서서히 서서히… 그리고 지금은 꽤나 많이, 다시 <지팡이> 돌아왔다는 걸.

    도마크의 토론을 허락하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이런 용단을 내린 미쯔하루 편집장도,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지팡이>에 더 속력을 내보기로 했다.

    스승이 죽은 후 슬픔과 분노에 잠긴 하융.

    그 이후에 그는 기행을 일삼고, 그 기행과 천재적인 작품이 만나 문단의 스타가 된다.

    하지만 난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구상을 멈췄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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