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66화 (166/204)
  • 166회

    역사를 다루는 소설은 많다.

    개인의 감정을 다루는 소설도 많고.

    그리고 어떤 소설은 이 두 가지를 함께 다룬다.

    어느 소설이 더 위대하다곤 할 수 없다.

    소설이란 결국 선택과 집중의 문제니까.

    뭘 선택하건, 설득력과 미학을 갖추는 게 관건이지.

    그리고 난… <지팡이>를 통해 이 세 가지를 다 해 보려 한다.

    단편이라면 어려웠을 것이다.

    장편이었어도 무리였겠지.

    난 이럴 때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새로운 시도를 해 볼 때마다, 내가 대하소설을 선택한 게 퍽 만족스럽다.

    반골기질을 가질 수밖에 없던 하융의 어린 시절.

    사랑이라는 감정을 앓은 하융의 청년기.

    하융은 이런 경험으로 적잖은 성장을 했다.

    그리고 지금 하융이 가장 활력 있고 자신만만할 때.

    역사가 그의 소중한 이를 앗아갈 것이다.

    또 한 번의 성장을 위해.

    나는 <지팡이> 2부를 이어 쓰기 시작했다.

    ‘희’와 ‘심’을 만나느라 바빴던 하융.

    오랜만에 스승의 다방에 찾아간다.

    하융과 두 여자의 스캔들은 이미 문단에서 유명하다.

    글쟁이들이란 말로도 찧고 빻는 걸 좋아하니까.

    여자에 미쳐 문학을 버려 놨었구나.

    하융은 스승이 이렇게 말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으니.

    그러나 스승은 하융을 별말 없이 받아 준다.

    탓하지도, 놀리지도, 심지어 묻지조차 않는다.

    무심함일까 배려일까.

    하융이 생각하기에도 스승은 참 속 모를 인간이다.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한다.

    대부분 하융이 발표하는 소설들에 대한 논의였다.

    하융은 이미 일본어로 소설을 발표하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래야 많은 지면에 글을 발표할 수 있으니.

    일본 당국에 그런 ‘태도’를 취해 줘야, 쓸데없고 귀찮은 사상 검증을 당하지 않으니.

    스승은 그 점에 대해서도 하융을 탓하지 않았다.

    정작 자신은 절대 일본어로 글을 쓰지 않음에도.

    대신 그는 하융에게 이렇게 말했다.

    ― 네가 좀 더 유명해지면, 사람들은 네가 일본어로 소설을 쓴다고 욕을 할 거야. 하지만 네가 어떤 언어를 쓰건,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하융은 그때 그 말의 의미를 더 물었어야 했다.

    그러나 하융은 그 말을 그냥 위로 정도로 넘겨 버렸다.

    스승은 거기서 한마디를 더 했다.

    하융이 그 후 오랜 시간 잊지 못할 한 마디를.

    ― 중요한 건 네가 그들의 언어를 빼앗는 거야. 나는 그럴 재주까진 없지만, 넌 가능해.

    그게 무슨 말이었을까.

    ‘언어를 빼앗는 게’ 뭔데?

    그들의 언어라면, 일본어일 텐데.

    그럼 일본어를 빼앗으라고?

    말이 되는 소린가?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하융은 그게 무슨 말인지 물으려다가 말았다.

    자신의 힘으로 좀 더 생각을 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판단은 틀린 것이었다.

    며칠 후 스승은 사상범으로 체포가 됐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끌려간 지식인들이 모두 그랬듯, 살아서 경찰서를 나오지 못했다.

    하융은 큰 충격을 받았다.

    사람이 이렇게도 죽을 수 있구나.

    존경하는 이가 날벌레처럼 죽어도, 아무도 그 책임을 지지 않는 게 식민지인이구나.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가 남았다.

    ‘그들의 언어를 빼앗는다’는 것.

    그 말의 해답을 아직 듣지 못했다.

    방법은 하나였다.

    이제 스승은 없었다.

    그 답은… 하융 스스로 알아 나가야 했다.

    * * *

    기다리고 기다리던 ‘팀 이상’ 회의였다.

    금홍을 볼 수 있어 좋은 것도 있지만, 새로운 전환점을 맞은 <지팡이>를 소개하고 싶었다.

    오늘의 회의 장소는 우리 집.

    평소 같았으면 기분 전환도 할 겸 밖으로 나가지만, 오늘은 회의 후 특별한 행사가 있다.

    바로 어제.

    지훈이 이렇게 말했다.

    ― 리브레에서 낭독회가 벌써 열렸나 봐요. 장 스테판 씨가 영상 보여 줬는데. 내일 회의 끝나고 같이 볼까요?

    좋은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낭독회가 어떻게 열렸을지 궁금했는데.

    ― 그런데 어디서 보지? 그냥 휴대폰으로 보면 심심하잖아.

    ― 저한테 다 생각이 있죠.

    라고 말을 하더니.

    회의날인 오늘, 어디선가 빔프로젝터를 꺼내 왔다.

    하여간 없는 게 없다니까, 송지훈.

    “그건 또 어디서 났어?”

    “집에서 영화 보는 거 좋아해서요. 벽에다 쏴서 보고 싶어서 샀죠. 뭐, 하도 바쁘니 모셔만 두고 있었지만요.”

    지훈은 거실에서 빔프로젝터를 척척 설치했다.

    연결된 노트북으로 뭔가를 설정하자, 벽에 노트북 바탕화면에 커다랗게 떴다.

    “신기하네.”

    “이 정도로 뭘요.”

    띵― 동―

    “금홍 샘이다.”

    나는 일어나려는 지훈의 어깨를 꾹 눌렀다.

    “내가 나가볼게. 넌 설치 마저 해.”

    “어, 저 다했….”

    나는 지훈의 말을 못 들은 척 현관으로 달려갔다.

    묻지도 않고 문을 여니, 금홍이 날 보고 배시시 웃었다.

    “왔어요?”

    “네.”

    하지만 미소도 잠시.

    금홍은 지훈이 볼 새라 새침한 얼굴로 들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지훈이 손을 흔들었다.

    “금홍 샘, 하이.”

    “하이. 이따 낭독회 보려고 설치하는 거예요?”

    “네. 오늘 금홍 샘 뭐 이리 신경 쓰고 왔어요?”

    “아, 어디 다녀오느라고요.”

    두 사람이 사담을 나누는 동안, 나는 주방에서 회의를 위한 커피를 세 잔 내렸다.

    우리가 만나기로 했다는 건, 지훈에겐 비밀이었다.

    굳이 숨길 일은 아니지만… 같이 ‘일’을 하는 상황에서는 밝혀서 좋을 게 없으니.

    적어도 <지팡이>가 끝날 때까진 비밀로 해 두기로.

    우리는 거실에서 회의를 시작했다.

    “지훈아, 넌 어떻게 읽었어?”

    “이번 원고는 좀 슬프던데요? 형이 역사와 개인의 감정을 엮어서 표현한다고 했을 때, 말로는 이해하긴 했는데 그게 어떻게 구현될지는 몰랐거든요. 그런데 하융의 스승이 일본 경찰서에서 죽임을 당하니까 알 것 같아요. 하융은 스승이라는 소중한 사람을 일제에게 빼앗긴 거잖아요.”

    “그래. 그 차이가 굉장히 중요해. 누군가 역사적 부조리 때문에 목숨을 빼앗기면… 남겨진 사람은 굉장히 혼란스럽거든.”

    “어떻게 혼란스러운데요? 구체적으로.”

    금홍이 물었다.

    “이런 거예요. 슬픈데, 마음껏 슬퍼할 수가 없는 거죠. 스승을 죽인 이들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오를 테니까. 하지만 그런 화를 분출하기엔… 또 너무 슬픈 거죠. 이런 죽음은 남은 사람들에게 굉장한 고통을 줘요. 슬픔과 분노, 그 두 가지 감정을 모두 감당해야 하잖아요.”

    “….”

    “소중한 이가 죽은 후에 미쳐 버리는 사람들이 있죠. 그런 경우들을 잘 보면, 그 죽음들이 대부분 이런 식이에요. 보낸 게 아니라 빼앗겨 버리는 경우. 그 황당함과 억울함을 감당하지 못하는 거죠.”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거리감을 지키기 어려운 이야기라 그런 거겠지.

    “금홍샘이 냉철하게 번역의 길을 잡아 주세요. 너무 감상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이런 얘기는 오히려 객관적으로 쓸수록 독자들이 생생하게 느끼거든요.”

    “네. 알았어요.”

    금홍이 글씨를 꾹꾹 눌러 썼다.

    “아, 그리고 형. 이 스승의 죽고 난 후에 하융의 미래를 한두 줄 정도 더 넣어 주는 게 어때요? 하융의 혼란스러운 내면은 잘 보인 것 같은데… 앞으로 하융이 나아갈 길이 좀 더 잘 보였으면 해요.”

    “음… 일단 하융은 이 질문을 마음에 품고 살게 돼. ‘그들의 언어를 빼앗는 일’ 말이야. 그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면 <지팡이> 2부도 끝날 거야. 네 말대로 한두 줄 넣어 보자.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아.”

    “아, 그리고 저 그거 진짜 궁금하던데요. 언어를 빼앗는 일이 뭐예요?”

    지훈이 물었다.

    나는 씨익 웃었다.

    “안 가르쳐 줘. 좀 기다리면 나중에 나올 거야.”

    “치사하네요.”

    “유추해 보든가. 넌 평론가잖아.”

    “됐어요. 전 기다릴래요. 안 그래도 <지팡이>가 일이 되는 바람에 순수하게 즐기지도 못하는데.”

    뭐, 그래도 지훈 정도면 ‘일’을 즐기는 편이지.

    취미가 일이 되면 애정이 사라지는 법이니 말이다.

    어쨌건 회의는 계속 진행됐다.

    관건은 스승의 죽음 이후의 내용.

    “이 부분….”

    금홍이 간만에 입을 열었다.

    “하융의 세계가 뒤집히는 느낌이 들잖아요.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금홍의 말이 맞다.

    하융은 스승의 죽음 후 말 그대로 ‘막 나간다’.

    쓸데없고 가치 없는 글을 게재하기도 하고.

    매일같이 종로에 나가 술에 취하기도 한다.

    “맞아요. <실족>의 내용이 여기에 포함되죠.”

    에세이 <갈림길>을 단편소설화 한 <실족>.

    그 소설의 주인공은 일본어로 소설을 쓴다는 이유로 종로 술집에서 동료 작가와 싸운다.

    그리고 혼자 종로를 떠돌며 탄식한다.

    ‘나는 참으로 역사의식이 없구나’라고.

    이 부분은 하융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스승의 말처럼 문단 사람들은 하융에게 시비를 건다.

    그가 일본어로 글을 쓰는 걸 ‘반민족’ 행위로 치부한다.

    하융은 <실족>의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비웃고, 싸우고, 결국 혼자 떠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실족>의 주인공과 좀 다르다.

    <실족>의 주인공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셈이다.

    금홍이 말했다.

    “하융이 종로를 떠돌 때 이런 말을 하잖아요. ‘일제가 내 스승을 죽였다고 일본어를 버리는 건 우스운 짓이다. 그러나 일본어를 빼앗는 방법을 모르니 답답한 노릇이다.’ 라고요. 하융이 일제를 미워하기 시작했단 건 알 수 있는데… 이때의 감정이 자신에 대한 실망인지 그럼에도 의지를 다지려 애쓰는 건지 좀 헷갈려요. 한국어 표현에서는 둘 다 드러내는 게 부자연스럽지 않은데, 영어는 확실한 표현을 좋아하거든요. 여기서 혜경 샘이 선택을 하셔야 할 거예요.”

    “음… 그런 문제가 있네요.”

    이런 대화를 하다 보면, 번역가와 작가가 많은 소통을 해야 함을 느낀다.

    만약 이런 대화가 없었으면, 번역가는 자신이 이해한 대로 길을 잡아 버리니까.

    나는 생각 끝에 말했다.

    “아직까지는… 실망에 가까운 것 같아요.”

    “그 이유는요?”

    “하융은 아직 슬픔을 극복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니 계속 자기 파괴적인 기행을 하겠죠.”

    전생의 나처럼 말이다.

    나는 내 운명이 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마다, 기인처럼 밖을 나돌며 미친 사람처럼 놀곤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다.

    아마 하융도 그런 마음이리라.

    “이거, 내용이 점점 흥미진진해지지 않아요?”

    지훈이 금홍에게 물었다.

    금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하융에게 이런 시련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오, 왜요?”

    나는 물었다.

    금홍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음하융이 점점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게 느껴지잖아요.”

    어른이 되어가는 하융.

    <지팡이> 속의 내 또 다른 자아는 그렇게 자라간다.

    나 역시 <지팡이>를 쓰면 쓸수록, 하융이 좋아진다.

    마치 내가 낳은 자식을 사랑하듯.

    아무튼 그렇게 회의가 끝난 후.

    우리는 간단하게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캔 맥주 세 개를 준비하고 빔프로젝터를 켰다.

    불 꺼진 어두운 거실.

    한쪽 벽에 쏘아 놓은 커다란 화면.

    각자의 손에 들린 캔 맥주.

    이런 분위기도, 나쁘지 않단 생각이 들었다.

    만약 우리가 직장인이라면, 이런 게 ‘퇴근 후 가볍게 맥주 한 잔’이겠지.

    “영상 틀까요?”

    “응.”

    지훈이 영상을 재생했다.

    익숙한 파리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지팡이>의 첫 낭독회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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