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회
프랑스 파리, 리브레 출판사.
해외문학팀 팀장 에바 편집위원은 심각한 얼굴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모니터에 뜬 건 <지팡이>.
에바 편집위원은 요즘 <지팡이>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세 남녀 사이의 밀고 당기는 긴장감.
특히 하융와 ‘심’의 관계가 그녀를 미치게 했다.
문학과 역사,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분명 서로에 대해 빠져들고 있는 게 분명한 분위기.
우아하고, 고급스러우며, 그럼에도 매혹적인 관계였다.
그리고 이 관계의 매력은… ‘심’이 하융의 곁을 떠나며 완성된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절절함이란 게 있으니.
“편집위원님?”
옆자리의 장 스테판 사원이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대답했다.
“응. 무슨 일이야?”
“<지팡이> 낭독회, 결재 좀 부탁드리는데요.”
“어. 일단 줘.”
에바 편집위원은 옆으로 손을 스윽 내밀었다.
장 사원은 그 손에 결재 서류를 올려 두곤, 애써 웃음을 삼키곤 말했다.
“그렇게 재밌으세요?”
“말 걸지 마. 지금 하융이 두 여자의 흔적을 다 불태우고 있다고.”
“아, 그 부분. 섬뜩하기도 하고 좀 슬프기도 하고….”
에바 편집위원은 장 사원 쪽으로 의자를 빙글 돌렸다.
“네가 보기엔 어때? 이 두 여자 말이야. 어느 쪽에 하융의 기억에 ‘사랑’으로 남을까?”
“음… 저라면 ‘희’일 것 같아요.”
“하여간 남자들이란.”
“그렇게 말씀하셔도 소용이 없다고요. 머리카락을 잘라서 놓고 간 여자를 어떻게 이겨요. 싫어도 죽을 때까지 기억할 수밖에 없는 것 같은데요.”
“하지만 ‘심’도 만만치 않아. 하융에게 가장 중요한 ‘글’을 남기도록 했잖아.”
장 사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피차 생각은 다르지만, 논쟁하고 싶지 않다는 뜻.
대신 그는 말을 돌렸다.
“확실히 연애 얘기가 나오니까 활력이 좀 붙죠.”
“프랑스인들이 죽고 못 사는 분위기 있잖아. 시간대는 약간 과거인데, 사랑은 뜨거운. 네오 오리엔탈리즘이 아니라 네오 로멘티시즘이라니까.”
에바 편집위원이 <지팡이>에 푹 빠져선 말했다.
장 스테판은 생각했다.
역시 프랑스인들은 사랑 얘기를 좋아한다고.
에바 편집위원도 분명 1부엔 이 정도로 열광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아무튼, 편집위원님 예상이 맞아서 다행이에요.”
“예상?”
“<지팡이>가 사랑 이야기로 진행될 거라는 예상이요. 편집위원님이 제일 먼저 알아보셨잖아요.”
“기본이지. 딱 보면 각이 나오잖아.”
에바 편집위원이 우쭐해서 말했다.
하지만 이 정도 우쭐거림은 당연한 일이었다.
리브레는 <지팡이> 2부 낭독회에 힘을 쏟고 있었다.
현재 리브레의 행사 중 가장 중요한 건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도 빨리 기획한 사람이, 바로 에바 편집위원이었고.
“장 사원, 낭독회 준비는 어때?”
에바 편집위원이 이제야 결재 서류를 넘겨봤다.
실무 책임자인 장 사원이 설명을 시작했다.
“장소 대여도 끝났고 일정도 이번 달 말로 잡아 놨어요. 특이한 점은… 작년 <내외인> 낭독 때는 신청자 연령이 꽤 높았는데, 이번에는 연령대가 많이 내려갔다는 거예요.”
“<지팡이>가 웹에서만 연재가 되고 있는 상황이니까. 젊은 독자층이 많이 모여 있을 수밖에. 그럼 그 독자층에 맞춰서 행사를 준비해 보자구. 너무 무겁지 않게 말이야.”
“네. 계획안 다 짜면 보여드릴게요. 아, 그리고….”
장 스테판이 뭔가가 떠오른 듯했다.
막 결재 서류에 사인을 끝낸 에바 편집위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리브레 문학잡지 이번 호에 최근 <지팡이>에 대한 논평이 올라왔어요. 아직 출시는 안 됐는데 그 팀 제 동기가 글을 보내 줘서 읽어 봤거든요. 글이 꽤 괜찮던데 혹시 보시겠어요?”
프랑스 문학잡지에서 아시아 작가의 글을 논한다는 것.
그 글이 심지어 웹에서 ‘연재 중’이라는 것.
정말이지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에바 편집위원은 놀라지 않았다.
이상 작가는 항상 예상을 뛰어넘곤 했으니.
“그럼 줘 봐.”
“뽑아서 드릴게요.”
잠시 후, 장 스테판이 종이를 한 장 들고 왔다.
출판을 위한 교정쇄 종이에 프린팅된 한 편의 글.
그 글을 에바 편집위원은 신중하게 읽었다.
“…흠.”
“글 괜찮죠?”
“이거… 정말 괜찮잖아? 멋진 글이야.”
<지팡이> 2부의 매력을 개성적으로 분석한 글이었다.
프랑스인들만 보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저기, 장 사원.”
“네.”
“바빠?”
장 사원은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시키실 일 있으세요?”
“이거, 시간이 되면 한국어로 번역을 좀 해서 이상 작가에게 보내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오, 좋아요. 해 볼게요.”
장 사원은 흔쾌히 일을 받아들였다.
다른 일이면 몰라도, 이상 작가의 일이라면 돕고 싶었다.
아시아인도 유럽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준 사람이니까.
또, 장 사원은 직감하고 있었다.
이 글이 이상에게 적잖은 응원이 될 거라는 걸.
* * *
집필에 집중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어떨 때는 끼니를 거르기 일쑤라서, 알람까지 맞춰 놓을 지경이다.
막 작가로서 활로를 타고 있는 하융.
그런 하융이 맞이해야 할 시련.
특히 그 시련이 ‘스승의 죽음’이란 점에서, 나는 한 글자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그렇게 오늘도 책상 앞에 붙어 앉아 있을 때였다.
휴대폰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삐빅, 삐빅, 삐빅.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다.
저녁을 먹고 몇 자 더 쓰다 보면 잘 시간이겠고.
오늘 하루도 이렇게 저물어 가는구나.
밥 차릴 여력이 없어 대충 한식을 배달하기로 했다.
지훈은 저녁 생각이 없다 해서 일 인분만.
그렇게 거실에서 쉬고 있는데, 지훈이 태블릿 피시를 가지고 나왔다.
윽, 저 태블릿 피시 꺼내는 건 일하자는 건데.
“형.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뭔데? 일이지?”
경계 가득한 투로 묻자, 지훈이 웃었다.
“아니에요. 리브레 쪽에서 메일이 왔거든요. 그쪽 문학잡지에 <지팡이>에 대한 비평이 발표됐나 봐요. 그거 번역본을 보내 줬는데… 내용이 정말 좋아서요.”
일은 일이되, 기분 좋은 일이었군.
나는 태블릿 피시를 받아서 그 내용을 읽었다.
제목은… <재가 된 시>.
―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한국의 작가 이상. 그가 발표한 <지팡이>가 우리 프랑스 문단에서 적잖은 호평을 이어 가고 있다. 특히 <지팡이>는 2부로 넘어오며 그 감정적 깊이를 더해 가고 있다. 역사와 개인적 운명에 천착해 있던 세계관을 ‘스승’이나 ‘연인’이라는 타인과의 관계로 확장하여 넓힌 덕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주인공 하융과 두 연인의 에피소드는 지금까지 나온 <지팡이>의 내용 중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남을 것임이 틀림없다.
여기까지는 보통의 찬사였다.
내 눈길을 잡은 부분은 이어지는 글이었다.
― 하융과 두 여자의 사랑이 어떻게 끝나는지 보라. 먼저, ‘희’는 하융의 마음이 ‘심’에게로 떠났음을 알게 된다. 그녀는 그녀의 질투 어린 캐릭터에 맞게 ‘심’에 대해 쓴 하융의 글을 모조리 태워 버린다. 그리고 그 위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놓고 떠난다. 전통적 동양의 관점에서 ‘여인의 머리칼’은 서구 사회가 짐작하는 감정의 깊이를 넘어선다. ‘희’가 남기고 온 것은 단순한 신체 일부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하융과 자신이 사랑했던 ‘한 시절’이자 떠나간 그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기도 하다. ‘희’는 그 시간과 마음을 결코 자신이 품지 않으며 그것을 하융에게 떠안게 하며 복수를 완성한다.
반면 ‘심’과 하융의 사랑은 보다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하융이 ‘심’에 대해 표현하는 마음은 사후적이다. 하융의 마음은 ‘심’이 떠난 후 작품으로 형상화되며 깊어지며, ‘심’과 함께 했던 과거를 ‘문학’ 속에 가둬서 영원한 것으로 만든다. 하지만 영원함을 거부하는 게 사랑의 태생적 운명이기 때문일까. 그 글들은 ‘희’에 의해 모두 불타 버리고 결국 재로 남는다. 하지만 이 사라진 글들이 아름다움으로 남을 수 있는 이유가 있다. 바로 그 작품이 하융 그리고 <지팡이>를 읽는 독자들에게 남는다는 것이다. ‘심’을 형상화한 하융의 작품이 소설 속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독자’에게 남는다는 것. 그것은 <지팡이>가 끝난 이후에도 독자만큼은 그 작품을 영원히 기억하게 된다. 즉, 이마저도 ‘치밀하게 계산된 구조’다. 내가 만약 누군가에게 ‘연애 소설’에 대해 설명할 기회가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재로 변한 글과 머리카락을 보라고. 우리는 그것을 ‘여운’이라고 부른다고 말이다.
…좋은 글이었다.
하융과 두 여자의 사랑을 감각적으로 승화시킨 글.
<지팡이>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글.
“이거, 누가 썼어?”
나는 좀 흥분해서 물었다.
“프랑스의 문학 평론가가 썼대요.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지훈은 내게 이름을 말해 주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이거, 우리만 볼 글이 아닌 것 같아.”
“네?”
“리브레에 연락을 좀 해 줄래? 혹시 괜찮으면 이 글을 신―문학 웹페이지에 올려도 되겠냐고 말이야. 나도 신라문학 측에 얘길 해 볼게.”
“어? 그렇게까지 하시게요?”
“응. 지금 한국 문단엔 그런 글이 필요해.”
한국 문단의 비평 수준은 뛰어나다.
세계 어느 나라와 견주어도 떨어지지 않지.
하지만 한국 문단의 경향은 독일과 비슷하다.
한 작품에서 인간 감정과 역사의식이 동시에 보이면, 감정보다는 역사의식에 집중을 한다.
<지팡이> 역시 그렇다.
스승에 대한 이야기나 연인들에 대한 이야기나, 비평들은 대체로 그것을 역사적 맥락으로 풀어 간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의미들도 물론 가치가 있지만… 인간 본연의 ‘감정’에 집중하지 못하는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배달시킨 저녁을 가볍게 먹은 후.
나는 더 늦기 전에 이준환 편집위원에게 전화를 했다.
프랑스에서 온 비평에 대해 설명을 하니, 그 역시 그 취지가 좋다고 했다.
― 리브레 출판사에서 허락을 하면 바로 글을 주시죠. 신―문학 웹페이지에 올리는 건 일도 아니니까요.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아마 리브레 쪽도 싫다곤 하지 않을 거다.
신라문학에서 비평을 영리적으로 이용하는 것도 아니니.
그 비평가 역시 거절할 이윤 없을 거고.
<재가 된 시>가 한국 독자들에게 오픈이 되면, <지팡이>를 보는 관점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역사성에 치중해 있던 그 관점들이 아마 자연스럽게 사랑이란 감정에 집중하게 되겠지.
잠시 후, 지훈이 방에서 나왔다.
“형, 메일 보냈어요.”
“그래? 수고했어.”
주방 스툴에 앉아 있던 내 앞에 지훈이 앉았다.
“작업은 잘 되어가요?”
“응. 나쁘지 않아. 다음 내용도 정해졌고.”
“오, 역시. 다음 내용은 뭐예요?”
지훈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방금 리브레의 메일을 보고 나 역시 깨달은 게 있다.
내가 앞으로 쓸 내용에 대해서, 머릿속으로 싹 정리가 됐다고 해야 하나.
“스승이 죽을 거야. 일제에 의해서.”
지훈은 내 말에 깜짝 놀랐다.
“스승이요…?”
“응.”
“캐릭터가 너무 아까운데… 왜요?”
“1부에서는 역사와 개인에 대해 다뤘잖아.”
“그렇죠.”
“2부에 들어서면서 개인의 감정에 대해 다루고.”
“네. 그리고요?”
“이제 그걸 동시에 다루는 거지. 하융은 역사와 개인의 감정, 그 두 가지가 어떻게 엮이게 되는지 알게 될 거야.”
그리고 그 경험은, 하융의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