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64화 (164/204)

164회

“…지금 저랑 국밥이나 먹을 땝니까?”

김미소 작가가 말했다.

…왜 화를 내지?

난 멀뚱히 그녀를 바라봤다.

“전혀 이해를 못 하시는군요. 연락을 기다리고 있지 않겠어요?”

“…잘 모르겠는데요. 어차피 모레 함께 회의를 하기도 하고요.”

김미소 작가는 뭐라고 반박을 하려다가,

“흐음….”

하고 날 빤히 보았다.

그리고 약간은 개구진 표정으로 다시 밥을 먹었다.

“뭐, 그분과의 사정이야 이 작가님께서 알아서 할 일이지만… 같은 여자 입장에선….”

입장에선?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개인적인 연락도 없이 열흘이 흘렀으면… 이렇게 생각할 때도 됐네요.”

“…어떻게요?”

“연락이 없다니. 벌써 질린 모양이로구나. 아니면 그냥 장난이었나…? 라고.”

난 김미소 작가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질리다니. 장난이라니.

내 머릿속에 또 하나의 가능성이 팡 하고 터졌다.

바로… 금홍의 거절.

그래.

난 아직 금홍의 대답을 제대로 들은 것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일수록, 내가 더 조급했어야 했는데.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저, 지금 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어머, 왜요? 그냥 모레까지 기다리시지.”

“아오, 알았으니 그만 놀려요.”

“잘 되면 나중에 밥이나 사요.”

사지.

열 번도 더 살 거다.

나는 가방을 챙겨 들고 바로 도서관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급하게 차를 타고 가는 목적지는 뻔했다.

바로 한국외대.

금홍이 있는 곳이었다.

나는 내 마음에 확신이 있다.

금홍을 좋아하고, 그녀와 잘 됐으면 한다.

하지만 그 확신이 오히려 독이었을까.

금홍의 마음을 미처 헤아려 보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먼저 다가간 건 내 쪽인데, 더군다나 금홍의 마음을 흔들어 놓지 않았나.

그런 상태에서 연락을 놓고 있었다니.

내가 금홍이라도 많이 불안했을 거다.

무슨 정신으로 차를 몰고 왔는지 모르겠다.

대한 외대 정문 근처에 주차를 하고 나서야, 아직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웬만한 일들은 계획에 어긋나지 않게 하는 편인데.

금홍과 관련된 일만 이렇게 엉망진창이다.

나는 바로 금홍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잠시.

금홍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상당히 가라앉은 말투.

김미소 작가가 맞았다.

지금까지 연락을 하지 않은 건 내 패착이다.

“저, 제가―”

이걸 뭐라고 설명하지.

대뜸 대한외대 앞으로 왔으니 나오라고?

그건 좀 예의 없지 않나?

“어… 지금 뭐 하세요?”

― 저 학교 앞 카페예요. 공부 중이었어요.

일단 헛걸음 한 건 아니구나.

잠깐, 학교 앞 카페?

“샘 어디 카페예요?”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학가 카페는 수십 개쯤 될 거였다.

금홍은 흔한 프랜차이즈 카페 이름을 댔다.

놀랍게도 그 카페는… 바로 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놀라운 건, 통유리 창 앞에 앉아 전화를 받는 금홍이었다.

나는 조수석으로 몸을 빼곤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급한 대로 손을 흔들자, 금홍이 날 알아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

근데 금홍이 이상하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귀까지 새빨개지는 게 아닌가.

…우나?

머릿속에 물음표를 수백 개쯤 달고 차에서 내렸다.

어쨌건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직진이다.

“…샘? 괜찮아요?”

헐레벌떡 카페로 들어가 금홍에게 물었다.

내게 앉으란 말도 안 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길래, 내가 그냥 마음대로 앞에 앉았다.

“…울어요?”

하고 슬쩍 묻자.

“제가 왜 울어요!”

하고 손을 휙 내렸다.

아, 정말 우는 건 아니었다.

그냥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당황했을 뿐.

“무, 무슨 일이세요? 여긴?”

금홍이 물었다.

“식사하자고 해 놓고, 제가 연락을 너무 오래 못 드린 것 같아서 얼굴 보고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런데 연락을 먼저 드린다는 걸 잊고 말았네요.”

참, 내가 말하면서도 좀 그렇다.

이게 말이야 뭐야.

앞뒤가 하나도 안 맞잖아.

감당이 안 될 정도의 긴장감.

그게 날 바보로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금홍이 나를 빤히 본다.

그리고 뭔가 울컥했는지 얼굴을 찌푸린다.

“샘 정말 최악이네요.”

…!

머리에 바위가 떨어진 느낌이었다.

최악이라니. 최악이라니.

“아니, 소설에 제 이름을 쓰질 않나 그 캐릭터가 좋다고 하질 않나. 그렇게 사람 마음 다 흔들어 놓더니 정작 식사하자고 말해 놓고 열흘이나 연락도 없고,”

“그건….”

“또, 하필 이러고 있을 때 오면 어떡해요! 누가 연락하고 오면 안 만나 준대요?”

금홍이 조곤조곤 쏘아붙였다.

덩달아 나까지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내 모든 이성적 사고를 필사적으로 쏟아부어.

그녀의 말을 머릿속으로 재조합했다.

첫째, 사람 마음 흔들어 놓았다고 했다.

이 말은 마음이 흔들렸단 뜻이겠지.

둘째, 열흘이나 연락이 없다고 했다.

이 말은 날 기다렸다는 뜻이겠지.

셋째, 연락하고 오면 안 만나 준대요? 라고 했다.

이 말은 금홍 쪽도 만날 의향이 있다는 뜻이겠지.

여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하필 이러고 있을 때’라고?

나는 그제야 금홍의 ‘상태’를 보았다.

긴장 때문에 전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

하나로 대충 묶은 머리.

위아래 세트인 연분홍색 트레이닝복.

기숙사 학생들만의 특권인 슬리퍼.

테이블에 너저분하게 부려 놓은 책들.

나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왜요? 귀여운데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겨우 진정되는 것 같던 금홍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금홍은 참 말로 설명하기 복잡한 얼굴을 하더니,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래요… 제가 무슨 수로 혜경 샘을 이기겠어요.”

그리고 금홍은 비로소 미소를 보여 주었다.

“…그런데, 정말 어쩐 일로 오셨어요? 이렇게 갑자기.”

“더 늦을까 봐요. 회의 때까지 기다릴까 생각도 해 봤는데, 더 늦으면 오해하실 것 같아서.”

“안 그래도 오해하기 일보 직전이었어요.”

“….”

“잘 오셨어요. 제 꼴이 좀 이렇긴 하지만.”

꼴이라니.

귀엽다니까 그러네.

아무튼 금홍의 말에 난 좀 용기를 얻었다.

전생에도 많은 여자를 만났지만, 이번에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뭐랄까.

전생의 내 사랑이 하융과 ‘희’의 관계였다면.

지금의 내 사랑은 하융의 ‘심’의 관계를 닮았다.

철없는 끌림이나 육체적 매혹보다는, 서로가 좋은 사람임을 알기에 더 조심스러운.

이제야 비로소 우리는 솔직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하융과 ‘심’을 경유하지 않고, ‘혜경’과 ‘금홍’으로서.

나는 진심을 다해 금홍에 대한 내 마음을 밝혔다.

‘좋아한다’는 말은 생각보다 어렵게 나왔다.

마음속에서 몇 겹의 벽을 뚫고 꺼낸 듯한 그 말.

그 말을 들은 금홍이 ‘나 역시’라고 말했을 때… 물론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이긴 했지만, 나는 그제야 긴장이 풀려 몸이 떨려 왔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이야긴 여기부터였다.

나는 허세도 거짓도 없이 내 상황을 밝혔다.

“사실 지금까지 연락을 따로 드리지 못했던 건, <지팡이> 연재 때문에 금홍 샘과의 관계를 뒤로 미뤄 둘 수밖에 없는 상황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그 상황은… 연재가 끝날 때까진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서요.”

어쩌면 금홍은 내게 실망할지도 몰랐다.

당분간 금홍에겐 시간과 마음을 쏟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꼭 해야 말 말이기도 했다.

‘작가’라는 인간의 현실을 굳이 숨기고 싶진 않으니까.

그런데 금홍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당연한 얘길 하시네요. 우린 <지팡이> 끝날 때까지 데이트할 시간 없을걸요?”

“…네?”

“혜경 샘이 바쁘면 저도 바빠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생각해 보니 그렇다.

내가 <지팡이>를 쓰는 만큼, 금홍도 회의와 초벌 번역에 매달려 있어야 하니까.

여유가 없는 건, 금홍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점은… 앞으로도 한 가지 일에 함께 매달려 볼 수 있단 점이겠지.

“그럼 좀 기다려 주세요. <지팡이>가 끝나면… 열과 성을 다해 잘해 줄 자신 있어요.”

내 말에 금홍이 하하, 하고 웃었다.

나는 용기 내서 한 말인데 뭐가 웃긴 걸까.

이번에는 내 얼굴이 달아오를 지경이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금홍이 말했다.

“피차 마찬가지네요.”

* * *

…데이트하고 싶다.

나는 작업실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대한외대 앞에서 금홍을 만나고 온 지 사흘이 지났다.

그때 우리는 참으로 이성적이었다.

당장은 <지팡이>에 집중하고, 연재가 끝나면 서로에게 집중하기로.

어제는 ‘팀 이상’ 회의가 있었다.

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회의였다.

뭐, 지훈이 있으니 개인적인 이야기 나누는 것도 어렵긴 했지만.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우습다.

어른스럽고 고상한 각오는 오간 데 없이,

시시때때로 금홍 생각이 튀어나온다.

어제 얼굴을 보니 오늘도 보고 싶다.

물론 일상적인 연락의 빈도야 훨씬 늘었다.

다른 평범한 연인들처럼 식사를 챙기기도 하고.

하지만… 보고 싶은 게 문제다.

예전에는 이런 기분까진 아니었는데, 마음을 확인하고 나니 더 조바심이 났다.

이건 참, 위기라면 위기인데.

자랑은 아니지만 전생에 적지 않은 여자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 어떤 여자들도, 집필보다 우선시된 적은 없었다.

그땐 아마 작가로서의 이성이 감정을 꾹 눌렀겠지.

지금은 감정 앞에 이성이고 나발이고 던져 버리기 일보 직전이지만.

“…정신 차려야 해.”

나는 슬리퍼를 탁탁 끌며 칠판 앞에 섰다.

그리고 귀퉁이에 이렇게 썼다.

‘집중’이라고.

집중을 하기 위해선 집필에 전념해야 한다.

사실 평소엔 그 집중이 어렵지 않은데, 이젠 특수한 경우로 접어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렇지!

“보상이 필요해.”

나는 ‘집중’ 밑에 ‘보상’이라고 적었다.

“이 보상이란….”

말할 것도 없다.

‘금홍과의 만남’이지.

데이트를 할 시간은 안 되겠지만, 회의라도 더 자주 하면 얼굴 보기가 편하겠지.

“회의라.”

회의 후 가벼운 커피 한잔.

지금 우리에겐 그조차도 감지덕지다.

그렇다면 회의를 한 번이라도 더 하려면…?

나는 컴퓨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앞에는 <지팡이> 자료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더 열심히 쓰는 수밖에 없구나.”

어디로 가나 답은 하나였다.

비록 체념이 섞여 있을지언정, 나는 다시 힘이 났다.

<지팡이>에 집중할 힘이.

아무튼 그렇게 심기일전을 한 후.

나는 한 걸음 물러나 칠판을 바라보았다.

칠판 왼편에는 1부의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이제 중앙의 2부 내용을 채우는 중이었다.

하융의 첫사랑은 이미 내 손을 떠났다.

지금쯤 금홍이 초벌 번역을 하고 있을 테고, 머잖아 피터 한의 손을 거칠 것이다.

이제는 다음 내용을 정리할 때였다.

사실 정해놓은 이야기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융은 지금까지 두 번의 성장을 이뤄 냈다.

첫째는 스승을 만나서 한 내적 성장.

둘째는 여자를 만나서 한 감정적 성장.

그렇다면 이번 차례는….

“‘위기’로구나.”

하융에게 위기를 줄 때가 왔다.

결국 이 역시 성장으로 연결될 테지만, 아마도 이 일은 하융에겐 좀 아플 거다.

나는 칠판에 이렇게 적었다.

‘스승의 죽음’

내가 쓰고 싶은 죽음은….

전생의 내가 경험한 식민지인의 억울한 죽음이다.

내가 전생에 일본 경찰청에 갇혀 있던 몇 달.

그 차가운 기운과 냉혹한 눈빛들.

그 사이에서 점차 생명의 빛을 잃어 가던 때.

나는 ‘식민지인의 죽음’이 뭔지 뼈저리게 알았다.

하융을 나와 같은 방법으로 죽게 할 순 없었다.

다만 나는 하융이 알았으면 한다.

‘식민지인의 죽음’이 얼마나 가슴 아픈 것인지를.

그리고 그 죽음을 토대로, 또 한 번 작가로서 성장을 이뤄 냈으면 한다.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명확한 목표를 세운 머리의 명령대로, 키보드의 손가락이 춤을 추듯 움직인다.

금홍과의 일로 흐트러졌던 정신.

그 정신마저 하나로 그러모아지는 게 느껴진다.

나는 그렇게 <지팡이>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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