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63화 (163/204)
  • 163회

    “프랑스 독자들이 ‘사랑 이야기’에 반응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에바 편집위원이 말했다.

    마리옹 편집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건 정말이지 중요한 이야기였다.

    독일이 역사를 다룬 문학에 반응하는 것처럼, 프랑스는 사랑을 다룬 문학에 강하게 반응한다.

    독일은 인간은 역사의 산물이라는 인식이.

    프랑스는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이야기를 종합하면, 어쩌면 프랑스 문학계에도 <지팡이> 붐이 일지도 모른다는 뜻.

    “에바 편집위원.”

    “네.”

    “<지팡이>에서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죠?”

    “네. 하융과 ‘희’의 관계는 사랑이라기보단… 아직 유희의 단계예요. ‘심’은 그냥 스치듯 몇 번 본 게 다고요.”

    “그 두 여자와의 이야기가 깊이 있게 전개될 가능성은요?”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사실 본격적으로 ‘사랑 이야기’가 나온 건 아니었기에.

    앞으로의 이야기가 어떻게 풀릴지는, 이상과 번역자 정도만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에바 편집위원이 잘해 줘야 한다.

    앞으로의 전개를 예상한 후, 그에 대한 프랑스의 반응까지 예상하면… 리브레는 명확한 행동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독서 토론이나 행사 같은.

    그런 것을 많이 해둘수록, 추후에 <지팡이>를 독점 발간할 확률이 높아질 테고.

    사안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기에, 에바 편집위원은 살짝 긴장했다.

    그런 그녀에게, 마리옹 편집위원이 말했다.

    “파리 4대학 문학도의 힘을 보여 달라고요.”

    에바 편집위원의 눈이 반짝였다.

    파리 1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마리옹 편집장.

    그런 그녀가 문학으로 유명한 파리 4대학을 인정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은근한 응원에 힘입은 에바 편집위원이 말했다.

    “…사랑 이야기는 깊어질 수밖에 없어요.”

    “왜죠?”

    “하융은 젊으니까요. 그리고 다른 두 타입의 여성이 등장하잖아요. 이건 사랑 이야기를 다룰 때 쓰는 전형적인 구성이에요. 남녀를 떠나서요. 예를 들면 한 여자 주인공에게 스타일이 전혀 다른 두 남자가 나타나는 거죠. 그런 구조에서 사랑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

    “작가는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되는 거예요.”

    “인기를 끌 기회?”

    “그건 부차적인 거고요.”

    “그렇다면?”

    “캐릭터를 성장시킬 기회요.”

    “아.”

    마리옹 편집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하니 일리가 있는 것 같군요. 캐릭터를 성장시킨다… 좋아요. 일단 에바 편집위원이 이상 작가에게 연락을 좀 해 주겠어요?”

    “네, 그럼요.”

    에바 편집위원은 마리옹 편집장의 말을 기다렸다.

    편집장이 직접 지시를 내리는 건이라면, 그 규모가 작지 않을 거였다.

    “일단 앞으로의 전개에 대해 살짝 떠봐요. 티는 나지 않도록. 그리고 2부 내용이 다 공개됐을 때 그걸로 낭독회를 해도 좋을지 물어봐 주세요. 물론 비영리로요. 아직 우리와 계약을 한 건 아니니까.”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또…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프랑스에서도 종이책을 낼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고요.”

    “그건 장 스테판 사원이 몇 번이나 묻긴 했지만….”

    에바 편집위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웬만하면 기대하지 말란 뜻이었다.

    마리옹 편집장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뭐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죠. 모국에 그런 특전을 준다는데. 한국인들은 좋겠어요.”

    “그건 그래요. 어쨌건, 나중에라도 리브레에서 발간을 할 수 있도록 힘을 내볼게요.”

    “그래요. 일단 그 건은 기다려 보죠. 아무튼 에바, 고생해 줘요.”

    마리옹 편집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에바 편집위원이 따라 일어났다.

    “네, 명심할게요.”

    마리옹 편집장은 미소를 살짝 지어 보였다.

    그리고 말없이 회의실을 나갔다.

    “후우….”

    에바 편집위원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리옹 편집장을 회의실로 부른 건 일종의 충동이었다.

    ‘이건 말해야 해!’라는 충동.

    그런데 이런 기회까지 얻어 내다니.

    잘하면 <지팡이>로 낭독회를 열 수 있을 거다.

    이 낭독회만 성사된다면, <지팡이>의 종이책 계약에 에바 편집위원도 ‘한 건’ 한 셈이었다.

    에바 편집위원은 회의실을 박차고 나가며 말했다.

    “좋아. 파리 4대학의 힘을 보여 주겠어.”

    * * *

    한국대학교 도서관.

    근현대사 서재 중에서도, 박사 논문을 모아 둔 칸을 들락거리는 중이었다.

    지금 가진 자료도 적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논문을 구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렇게 가끔씩 학교에 와서 논문을 찾곤 한다.

    그렇게 도서관 한구석에 앉아 있을 때였다.

    우웅― 우웅―

    하필 이럴 때 지훈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말이지 귀찮지만 지훈이 전화를 안 받을 순 없지.

    나는 바쁜 걸음으로 도서관 로비로 나갔다.

    학생들이 들락거려 번잡한 로비.

    나는 커다란 기둥에 기대어 전화를 받았다.

    “어, 지훈아.”

    ― 형. 전데요. 아까 아침에 왔던 리브레 쪽 메일이요.

    “응. 그거 뭐래?”

    ― 번역 맡겼더니 좀 중요한 건 같아서요. 빨리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연락 드렸어요. 그… 리브레 쪽에서 <지팡이>로 낭독회를 하고 싶대요. 비영리로요. 모든 비용은 리브레가 부담한다고 하는데요?

    “낭독회? 프랑스 쪽이 좋아할 내용이 아닐 텐데?”

    ― 그게, 그 대상이 1부가 아니라 2부래요. ‘희’랑 ‘심’ 이야기요. 사랑 이야기.

    난 문득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지훈아. 지금 웹에 공개된 이야기, 어디까지 진행됐지?”

    ― 음… 하융이 이제 ‘심’한테 첫 편지를 써 보려고 하는 부분? 장난으로 고백 편지 쓰는 부분이요.

    “그건 오늘에야 공개된 장면이고, 그전까진 ‘심’과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몰랐을 텐데? ‘희’와의 관계도 다 풀지 않았고.”

    ― …어? 그러게요? 아…!

    지훈이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외쳤다.

    ― 그래서 에바 편집위원님이 그런 말을 했나 봐요.

    “무슨 말?”

    ― 저도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그냥 넘어갔는데… 번역된 거 보면 이런 말이 있거든요. ‘하융에게 펼쳐질 첫사랑의 길을 프랑스 독자들과 함께 걸어 보고 싶다’ 이 말이요.

    ‘펼쳐진’이 아니라 ‘펼쳐질’.

    이 말인즉슨, 에바 편집위원이 <지팡이>의 내용을 예상했다는 거다.

    누가 프랑스 편집자 아니랄까 봐.

    남녀의 미묘한 감정 문제를 귀신같이 알아본다.

    또 그만큼… 내 작품을 잘 읽어 봤단 뜻이겠지.

    낭독회라.

    사실 썩 내키진 않았다.

    완결이 날 때까진 집필에만 신경을 쓰고 싶으니까.

    하지만 에바 편집위원이라면….

    그래, 맡겨도 좋겠지.

    일본 도마크 출판사의 토론도 허락한 상태니까.

    또, 웬만하면 프랑스에선 리브레와 계약을 하려 했고.

    “좋아. 그럼 일단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더 얘길 해 보자고 답장을 좀 보내 줘.”

    ― 네, 알겠어요. 형님.

    그렇게 전화를 끊었을 때였다.

    허락하긴 했지만, 이거 점점 일이 커지네.

    신경 쓸 것도 많고 말이다.

    사실 집필만 해도 꽤 벅차다.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을 버티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

    여기에서 해외의 일까지 늘어나면… 당분간 바쁜 건 각오해야겠군.

    그리고 신경 쓰이는 또 한 가지.

    바로 금홍이와의 일이다.

    ‘조만간’ 식사 한번 하자고 한 것도 열흘 전.

    금홍도 좋다는 뜻을 밝혔지만, 집필 때문에 도저히 시간이 안 나 연락조차 못 했다.

    팀 이상 회의에서도 일 얘기만 실컷 했고.

    만나면… 내 마음을 확실하게 전달하고 싶은데.

    이렇게 바쁘니 또 생각이 복잡해진다.

    만약 금홍과 내가 잘 된다고 해도, 당분간은 신경을 써 주기 어려울 것 같은데.

    “이 작가님?”

    “…!”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네이비색 투피스를 입은 김미소 작가가 있었다.

    “무슨 그런 표정으로 서 계세요?”

    “…제 표정이 어땠는데요?”

    “…바보 같은?”

    …할 말이 없다.

    진짜 바보 같은 생각 중이었으니까.

    “그런데 어디 가세요? 맨날 트레이닝복만 입으시더니.”

    바보 지적에는 옷차림 지적으로.

    내가 치사하게 응수하니 김미소 작가가 픽 웃는다.

    “교양 강의 끝내고 오는 길이에요.”

    “오, 요즘 강의 잘 되세요?”

    김미소 작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이번 수업에는 공대랑 자연대 애들이 많아서요. 서양 문학 강의인데 그쪽 교양 필수인가 봐요.”

    “저런. 고생하시겠네요.”

    한국대 공대와 자연대.

    이과 쪽으로 머리가 특출난 학생들만 모여 있을 텐데.

    그런 친구들 가운데에서 문학을 논해야 한다니.

    “외계어 듣듯이 듣더라고요. 아, 같이 저녁이나 드시겠어요? 배고픈데.”

    “그러죠.”

    나는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 논문을 챙겨 내려왔다.

    데스크에서 대출을 한 후, 로비에 서 있는 김미소 작가에게 다가갔다.

    “잘 차려입었으니 국밥 먹어요.”

    내 농담에 김미소 작가가 기가 막히단 듯 웃었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로 국밥을 먹으러 왔다.

    나는 다른 걸 먹을 생각이었는데, 알고 보니 김미소 작가가 국밥 마니아라고.

    아무튼 그렇게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뜨거운 국밥을 잘도 먹던 김미소 작가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이렇게 만나서 밥 먹은 적 있지 않았어요?”

    “저번에 저 영화 시나리오 준비할 때요.”

    그때도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났지.

    김미소 작가랑 밥 먹은 후, 같이 소극장에서 컬트 영화를 보려 했지만, 김미소 작가는 토를 할 것 같다고 도망갔다.

    “기억나죠? 컬트 영화.”

    “어우, 제 앞에서 컬트 영화 얘기 금지예요. 그런데 <그 집>은 미국에서 만들고 있다면서요? 제목도 그대로 가고.”

    “잘 아시네요?”

    “조나단 감독 팬이거든요. 아무튼 저도 기대하는 중이에요.”

    “배우 캐스팅도 끝났으니 열심히 찍고 있을 거예요.”

    “그때는 생각 못 했어요. 웬 징그러운 영화를 저렇게 보시나 했더니… 미국 진출을 하실 줄이야. 이 작가님 생각은 진짜 모르겠다니까요.”

    “그땐 고민이 얼마나 많았다고요. 영화 쪽은 생전 처음 해 보는 거라.”

    “하하… 요즘은 고민 없어요?”

    김미소 작가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없어요’라고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없긴 뭘 없어.

    방금 전까지 ‘바보 같은’ 얼굴로 고민하고 있던 주제에.

    “있어요.”

    “뭔데요? 말해 보시죠. 후배님.”

    “제가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요.”

    멈칫.

    김미소 작가가 말 그대로 ‘멈칫’했다.

    그녀가 입으로 넣으려던 숟가락이 그대로 멈췄다.

    김미소 작가는 경악을 숨기지 못하고 날 봤다.

    뭐랄까… 컬트 영화 보던 그 표정 같기도 하고.

    “…왜 그렇게 봐요?”

    “아, 아니… 생각지도 못한 얘기라서. 이 작가님도 누구 좋아하시는구나. 신기하다….”

    이 여잔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여하튼 좀 짜증은 났지만, 사실 매달려 볼 동아줄도 김미소 작가 정도였다.

    강인춘 PD에게 묻겠는가, 조인후 감독에게 묻겠는가.

    나는 그간의 일을 간략하게 말했다.

    물론 번역자라든가 금홍이라든가 하는 얘기는 말고.

    약간의 픽션을 섞어서, 정체를 유추할 수 없도록.

    김미소 작가는 심각하게 얘길 들었다.

    “…그래서, 아직도 연락을 못 하고 있다고요?”

    “네. 그 여자랑 잘해 보고 싶은 생각은 분명한데, 상황적 여유가 없어서요.”

    “흠… 연락 안 한 지는 얼마나?”

    김미소 작가가 컵에 물을 따르며 말했다.

    “열흘.”

    “풉! 콜록! 콜록! 여, 열흘…?! 콜록!”

    김미소 작가는 얼마나 놀란 건지 사레까지 들렸다.

    그리고 기침을 해 대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날 봤다.

    하지만 나도 답답하다고요, 선배님.

    김미소 작가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정말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말했다.

    “…지금 저랑 국밥이나 먹을 땝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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