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회
‘심’은 그렇게 하융의 곁을 떠난다.
하융과 여자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심’은 떠났지만, ‘희’가 남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심’이 떠난 후에도, 하융이 ‘희’를 찾지 않게 된 것이다.
하융은 그 이유를 알 만큼 어른스럽지 못하다.
다만 중요한 걸 잃고 말았다는 상실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심’을 보냈다는 무력감.
‘희’로 ‘심’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는 황망함.
그런 감정들이 머릿속에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쳤다.
그 감정을 버티게 하는 건, ‘희’가 아니라 글쓰기였다.
하융은 ‘심’에 관한 여러 가지 글을 쓴다.
그녀와 나눈 고차원적 이야기를 소설에 녹이거나, 그녀에게 보내고 싶은 시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희’에게 보냈던 사랑시는 아니었다.
우울에 깊이 잠긴 듯한 그 글들은, 마치 ‘심’이 다시 돌아오길 바라는 애절한 고백과 같았다.
어느 날 ‘희’가 하융의 하숙집에 찾아온다.
그런데 하필 하융은 외출 중이었고, ‘희’는 하융의 글을 훔쳐본다.
몇 시간 후.
하융이 귀가를 한다.
그리고 방에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란다.
지금껏 ‘심’을 생각하며 쓴 글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융은 놀라서 다시 마당으로 나섰다가, 뭔가를 불태운 흔적을 본다.
하융은 직감한다.
그곳에서 불탄 것은 잃어버린 글들이라는 걸.
그리고 그 재 위에 놓인 건… 한 뼘 정도 되는 ‘희’의 머리 타래였다.
기생들이 쓰는 항유와 잘 관리된 머릿결.
하융이 그걸 잊을 리 없었다.
머리 타래를 남겨 두고 간 ‘희’의 마음도.
그것은 ‘희’의 방식으로 던진 이별이었다.
‘심’은 이별하며 자신을 하융의 문학으로 남겼다.
‘희’는 이별하며 하융에게 자신의 신체 일부를 남겼다.
하융은 재가 된 글들과, ‘희’의 머리 타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머리 타래에 기름을 살짝 부어 불을 붙였다.
재 위에서 머리 타래가 타오르기 시작한다.
하융은 그렇게 두 사람 모두와 이별한 것이다.
하융의 한 시절이 또 그렇게 끝났다.
나는 그때까지 쓴 원고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봤다.
실수로라도 금홍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도록.
또… 워낙 예민한 내용이기에 더 조심스러워야 하니까.
이 이야기는 여자를 ‘선택’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결과적으론 하융이 ‘심’에게 더 마음을 주지만, 어느 쪽이 더 좋다거나 하는 건 사실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한 인간, 하융의 성장이다.
그 성장을 위해선 많은 사람이 그를 조금씩 상처 내며 스쳐 지나가기 마련이다.
‘심’과 ‘희’가 하융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융 또한 두 여자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것이 내가 이해한 ‘인간관계’다.
남녀관계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테고.
나는 소설을 다시금 읽어 본 후.
금홍에게 톡을 했다.
글을 다 썼으니 읽어 봐 줄 수 있느냐 물으니, 바로 그러겠단 답이 왔다.
나는 원고를 톡으로 금홍에게 보내 줬다.
― 지금 읽을게요.
금홍은 그렇게 말했다.
어쩐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해서… 글을 보여 주는 게 처음으로 부끄러워졌다.
* * *
금홍은 긴장되는 마음으로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재미도 재미지만, 이상이 어떤 메시지를 넣어 놨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처음에는 헷갈렸다.
이상이 어울리지 않는 장난을 치는 게 아닐까.
자신이 괜한 의미 부여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방어적인 생각들이 올라왔다.
하지만 저번 회의 때에 명백해졌다.
이상은 자신의 마음을 금홍이 알아 주기를 바랐다.
금홍도 그걸 눈치 못 챌 만큼 바보는 아니었고.
금홍은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었다.
남자에게 데어 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라서, 대뜸 다가오는 사람에겐 습관처럼 벽을 쳤다.
하지만 금홍은… 이번만큼은 싫지 않았다.
이상이라는 사람도.
이상이라는 작가와 작품도.
이 묘하게 긴장감 있는 과정들도.
소설을 통해서 마음을 전달하는 것.
그것도 한 마디, 한 문장이 아니라, 소설의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통해 좋아하는 마음을 ‘느끼게 해 주는 것’.
사실 이상은 그런 방법을 쓰고 있었다.
<지팡이>를 두 사람의 관계에 이용하는 게 아니라, <지팡이>와 두 사람의 관계를 동시에 진전시키는 방법.
물론 어떤 여자에겐 이 방법은 답답할 거였다.
당장 달려와 고백하지 않는 남자에게 싫증이 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금홍에겐 이 속도가 딱 좋았다.
부담되지도, 조급하지도 않은 이 속도.
“후….”
금홍은 낮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글을 보기 시작했다.
‘심’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금홍은 손톱을 깨물며 소설을 읽었다.
그들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인간과 문학에 대해서 긴 논평을 나누었다.
두 사람은 동등해 보였으며, 가끔은 학문적 동지로 보이기도 했다.
“…대단해.”
이런 어려운 내용을 써서 대단하다는 게 아니었다.
어려운 내용을 쓸 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넘친다.
하지만 이런 대화 속에서 남녀관계의 긴장감을 드러내는 작가는 이상밖에 없을 거였다.
“…떠나가네.”
금홍은 ‘심’이 기차를 타고 떠나는 걸 보며 말했다.
왠지 아쉬웠다.
‘심’이 금홍 자신도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잠시 후.
“…어?”
이야기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전개됐다.
사실 금홍은 이렇게 생각했다.
하융에겐 ‘심’만이 유일한 사랑으로 남을 거라고.
그래서 ‘희’의 존재를 생각지도 못했다.
하융이 ‘심’을 두고 쓴 시와 소설.
부분 부분만 드러나 있지만, 대단히 아름답고 애절한 작품들이었다.
누가 봐도 이입이 될 만큼.
그런데 ‘희’가 그것을 모두 불태우고, 자신의 머리 타래를 그 위에 남기고 갔을 때.
금홍은 자기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처음으로, ‘희’라는 인물이 생생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희’가 하융에게 느끼는 서늘한 분노와 뜨거운 사랑.
그것은….
‘아마도 하융이 ‘심’에게 느낀 진심 어린 마음에 대한 복수겠지. 그걸 ‘희’만의 방법으로 드러낸 거야.’
이윽고 하융이 그 머리 타래마저 불태우고 만다.
하융의 손에 남은 건 글도, 머리 타래도 아닌, 형체조차 알 수 없는 잿더미.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면 하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철없던 소년이 처음으로 이별을 경험한 그 뒷모습.
어느새 어른으로 자라 버린 넓은 등.
그런 이미지들이 마구마구 떠올랐다.
금홍은 비로소 하융도, ‘심’도, ‘희’도 이해가 됐다.
어쩌면 금홍은 내심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융이 ‘희’를 버리고 ‘심’을 선택해 주기를.
‘심’을 하융이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를.
하지만 <지팡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한 사람의 성장에 ‘유일하게’ 영향을 주는 사람은 없다고.
다만 아름답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은 있을 수 있다고.
마치 ‘심’이 하융에게 그랬던 것처럼.
금홍은 가만히 생각에 빠졌다.
물론 처음에는 조금 서운했다.
‘심’을 다룬 만큼 ‘희’ 역시 깊이 있게 다뤘으니까.
하지만 만약 하융이 ‘심’만을 생각했다면… 과연 자연스러운 일일까?
지금 본 이 원고처럼 그 관계가 아름답게 느껴질까?
지금 금홍은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 사람의 이별이 이토록 아름다워서 다행이라고.
이런 이별이 있기에, 세 사람 모두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남녀관계를 바라보는 이상의 시선.
이 시선은 묘하게 금홍을 설득하고 있었다.
그 정도면, 좋아해도 나쁘지 않을 남자라고 말이다.
금홍은 생각 끝에 이상에게 톡을 보냈다.
― 원고 정말 좋은데요?
답장은 바로 왔다.
마치 저쪽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 네. 저는 특히 하융이 좋더라고요.
잠시 답이 없었다.
금홍의 심장이 뛰었다.
저번 회의에서, 이상은 말했다.
자신은 ‘심’이라는 캐릭터가 좋다고.
그것이 금홍이 이해한 것처럼, 금홍이 좋다는 뜻이었다면… 방금 금홍은 화답을 한 셈이었다.
나도 당신이 좋다고.
억만년 같은 시간이 흘렀다.
우웅 하는 진동과 함께 답이 왔다.
― 조만간 저랑 식사 한번 하실래요?
* * *
프랑스 파리 리브레 출판사 회의실.
오늘은 다소 기이한 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마리옹 편집장과 에바 편집위원 단둘이 회의를 하게 된 것.
까탈스럽고 고지식한 마리옹 비누쉬 편집장.
화끈하고 충동적인 에바 위페르 편집위원.
사실 두 사람은 사사건건 의견이 부딪치지만, 단 한 가지만큼은 이견이 없었다.
프랑스의 <지팡이> 판매 추이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
사실 <지팡이>의 초반 반응은 기대 이하였다.
작품이 시작되었을 때야 ‘이상’의 이름 때문에 꽤 화제가 되었지만,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하융의 갈등을 다루는 순간, 프랑스에서의 인기는 떨어지고 말았다.
두 사람은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그런’ 소재는 독일에서 더 잘 먹히기 마련이니까요. 프랑스 쪽 반응이 미진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에바 편집위원이 말했다.
마리옹 편집장은 지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에요. 한 마디로 ‘독일스러운’ 데가 있는 서사에요. 역사 앞에서 휘청거리는 인간의 이야기라… 문화부 기사 지표를 보니 그 당시 독일에서는 꽤 인기를 끈 것 같네요?”
“네. 또 미국에서는… 마니아층 한정이긴 하지만 ‘네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관점으로 <지팡이>를 해석하고 있나 봐요.”
“네오 오리엔탈리즘이라. 새로운 거 만들기 좋아하는 미국 학계가 또 한 건 했네요.”
마리옹 편집장이 살짝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팔짱을 끼곤 에바 편집위원에게 대뜸 물었다.
“그래서, 왜 날 부른 이유는 뭐예요?”
이 회의를 연 건 에바 편집위원이었다.
아무리 직장 내 서열이 약한 리브레 출판사라 해도,
상사인 편집장을 회의실로 부른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에바 편집위원은 침착하게 말했다.
“최근 프랑스 내의 <지팡이> 반응이 심상치 않아서요.”
“…그걸 확인할 수 있나요?”
<지팡이>는 이상의 홈페이지를 통해서만 유통된다.
기사 언급 지표를 사용하여 반응을 유추할 순 있지만,
‘최근’ 반응을 아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온라인 SNS 반응이 그래요.”
“온라인은 믿을 수 없는데… 아무튼 말해 봐요.”
마리옹 편집장은 미심쩍다는 듯 말했다.
그녀 역시 이상을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프랑스 문학계는 아직도 ‘지면’ 중심이었다.
“<지팡이>는 홈페이지를 통해서만 볼 수 있으니, 당연히 웹이나 휴대폰으로 글을 보는 사람들만 읽는 추세예요. 그런 사람들은 SNS에 자신의 감상을 남기는 게 어색하지 않은 타입들이고요. 일종의… 표준 집단이랄까요?”
마리옹 편집장은 새삼 놀랐다.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저 문학도 입에서 ‘표준 집단’이라는 말이 나오고.’
“그래서, 반응이 어떻죠?”
“2부에 들어서면서부터 독자들이 코멘트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어요.”
에바 편집위원은 직접 휴대폰의 SNS를 보여 줬다.
마리옹 편집장은 그 내용을 심각하게 바라보았다.
대부분 ‘희’와의 사랑에 대한 말들이었다.
또한, 아직은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심’이라는 여자가 뭔갈 할 것 같다는 짐작들.
마리옹 편집장은 바로 눈치를 챘다.
“아하.”
“맞아요. 편집장님.”
에바 편집위원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프랑스 독자들이 ‘사랑 이야기’에 반응하기 시작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