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회
“금홍 샘은 어떻게 읽었어요?”
내 물음에 금홍이 살짝 놀랐다.
침을 꼴깍 삼킨 금홍은 오늘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건넸다.
“저요…?”
“네, 선생님이요.”
나는 금홍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그녀는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부끄러워한다거나 크게 당황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아마… 내 생각을 짐작해 보려는 거겠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라고.
그리고 나 역시 똑같은 마음이다.
금홍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한 가지 더.
내가 충동적으로 보냈던 톡.
‘그러고 싶었나 보죠’.
그 말을 듣고 금홍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금홍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융은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던데요.”
“뭘요?”
“아직 뭐가 사랑인지를 모르는 단계라고 해야 할까요… 여자1, 그러니까 ‘희’를 만나고 자신의 마음에 확신을 갖는 듯했지만 여자2, 즉 ‘심’을 만나니….”
금홍이 살짝 멈칫하더니,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또 끌리고 있잖아요. ‘희’를 사랑했다면 하융은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희’가 채워 주지 못한 어떤 결핍을 ‘심’이 채워 줄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한 거죠.”
“그 결핍이란 뭘까요?”
“…인간적 유대감.”
인간적 유대감.
금홍의 대답은 다소 확신에 차 있었다.
아직 하융의 ‘심’의 이야기는 제대로 시작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그런 고차원적 가치를 논한다는 건….
어쩌면 금홍은 눈치를 챘는지도 모른다.
‘심’이 자신을 모델로 했다는 것을.
나아가 하융이 나를 모델로 한 인물이란 것을.
나는 문득 이 대화에 매력을 느꼈다.
재미있지 않은가.
금홍은 소설 이야기를 하며 내 마음을 짐작한다.
나 역시 소설 이야기를 하며 금홍의 마음을 짐작한다.
마치 긴장감 넘치는 심리 게임처럼.
나는 금홍에게 물었다.
“그럼 ‘심’은… 인간적 유대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네요?”
“음… 저번에 혜경 샘이 해 주신 얘길 토대로 생각하면, 그렇다고 생각해요. 자신을 돌볼 줄 아는 사람만이 남을 돌볼 수 있는 법이니까요.”
“맞아요. 저도 그래서 좋아해요.”
“…네?”
“‘심’이라는 캐릭터를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금홍이 참 복잡다단한 표정을 지었다.
난 한 술 더 얹어 보기로 했다.
“하융에게도 그런 여자가 필요한 게 사실이고요. ‘희’는 하융과 비슷한 여자죠. 마치 거울처럼. 그런 남녀는 함께 성장하기가 어려워요. 그저 서로에게만 빠져들게 되고… 심각한 경우엔 마치 아이 같은 짓만 되풀이하며 퇴행만 할 뿐이죠. 물론 그 퇴행의 맛이란 달콤하지만.”
전생의 금홍과 나처럼 말이다.
우리는 참 닮은 점이 많았다.
문제는 그 ‘닮은 점’이라는 게… 하나같이 철없는 요소들이었다는 게 문제지.
누구 하나 어른스럽지 못했던 우리.
결국 한쪽이 떠나간 건 예상된 결말이었을지도.
그래도 금홍이 먼저 도망을 친 걸 보면… 나보다는 그녀가 더 어른스러웠던 모양이다.
우리가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나보다 한 박자 더 빨리 알았던 거니.
“혜경 샘.”
금홍이 날 불렀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뭔가를 다짐한 듯,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심’이 하융에게 답장을 보내기 전에, 이런 생각을 할 것 같아요. 이 남자가 왜 나한테 장난을 치는 거지? 실제로 하융의 편지는 장난이었고요. 그런데 왜 심이 정성을 들여 답장을 쓰는지 모르겠어요. 그 마음을.”
일리 있는 말이었다.
소설적으로도, 이 상황적으로도.
금홍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당신의 마음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어?’
물론 하융과 나는 차이가 있었다.
하융은 정말 장난을 치고 있지만, 난 단 한 순간도 장난이 아니었다는 것.
난 그녀에게 대답했다.
“‘심’은 이런 편지를 픽 비웃고 버릴 만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아주 작은 확률일지이라도, 그 고백이 진심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는 거죠. 저는 여기서 ‘심’의 성격이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좀 고지식할진 몰라도 상당히 존경스럽잖아요, 이런 성격.”
“‘심’이 존경스럽다고요?”
“네. 처음부터 그런 캐릭터로 설정했는데요. 그래서 매력 있는 캐릭터로요. 물론 하융은 장난으로 시작했지만… 그 뒤부터는 쭉 진심이에요.”
“….”
“하융의 마음이 안 느껴지셨어요?”
금홍은 아닌 척하려고 상당히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내 말의 속뜻을 서서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니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거겠지.
나는 그저 내 마음을 간접적으로 전달하려는 건데… 어딘지 괴롭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더 얘기하는 건 무리가 있을 것 같아서, 난 애먼 지훈에게 한마디 했다.
“가만히 있지 말고 무슨 말이라도 해 봐.”
“아니, 뭐 전… 두 분이 얘기 잘 나누시길래.”
지훈은 별다른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일 모드’인 지훈은 글에 푹 빠져 있어서일까.
“그런데 저도 ‘심’의 마음이 잘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희’는 하융의 거울상이라서 하융의 마음을 알면 ‘희’의 마음도 자연히 이해할 수 있지만… ‘심’은 아니잖아요.”
“역시 그런가? 그럼 수정을 해서 드려야겠네.”
“네, 그게 좋겠어요.”
그 이후로 평소와 같은 회의가 이어졌다.
금홍은 금방 평정심을 찾을 것 같았지만, 딱히 내게 말을 걸거나 하진 않았다.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그리 길지 않은 회의가 끝났다.
원래 회의를 하면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곤 하는데, 오늘은 금홍이 먼저 가겠다고 했다.
번역 일이 좀 쌓여 있다나.
아님 그냥 어색했을지도.
지하철역까지 금홍을 데려다주던 길이었다.
요란한 벨소리가 들리더니, 지훈이 멈춰 섰다.
“저, 청탁받은 출판사 쪽에서 전화가 와서요. 잠깐 통화 좀 할게요.”
“그래라.”
지훈은 골목 쪽으로 가더니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어색하게 남겨진 우리 둘은 잠시 멀뚱하게 서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건 금홍이었다.
“혜경 샘.”
“네?”
날 빤히 바라보는 눈.
아직도 조금은 혼란스럽고, 의심이 가득했다.
잠시 망설이던 금홍이 조심스렘 물었다.
“그… ‘심’이랑 하융이는 앞으로 어떻게 돼요?”
“궁금해요?”
“…네.”
나는 대답 대신,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도 원고 제일 먼저 보여 드릴까요?”
금홍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답이어서 그랬을까.
내 말의 의도가 잘 전달됐다면 금홍은 이렇게 이해했을 것이다.
혼란스럽겠지만, 나를 좀 더 지켜봐 달라고.
잠시 후.
금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한테 제일 먼저 보여 주세요.”
* * *
지훈과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운전을 하던 지훈이 뭔가 문득 떠오른 듯했다.
“맞다. 형, 저 회의 들어오기 전에 인터넷에서 잠깐 봤는데요.”
“뭘?”
“도마크 출판사에서 큰 이벤트를 하나 봐요.”
“이벤트?”
“네. <지팡이>를 가지고 시민 중심의 독서 토론을 한 대요. 그것도 정기적으로요. 그런데 놀라운 게 뭔지 아세요?”
“…일본에서 <지팡이>로 독서 토론을 한다는 것부터가 놀라운데, 또 뭐가 있어?”
“토론 패널이 여럿인데, 그중에 그 원로 평론가도 있대요. 그 있잖아요, <지팡이> 초반에 하융이 국민이 아닌 인간의 길을 간다고 말했던.”
아, 기억난다.
연재 초반의 일본의 극우 독자들.
그들은 하융의 행위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기 바빴다.
나와 한국을 비웃기도 했지.
그런 상황에서 그 평론가는 소신있는 인터뷰를 했고, 그 여파로 우익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도마크가 큰일했네.”
<지팡이> 토론에 그를 패널로 앉힌다는 것.
그건 우익 독자들의 비난을 감수한단 뜻이었다.
나는 적잖이 감동스러웠다.
사실 미쯔하루 편집장이 <지팡이>를 종이책으로 내겠다 했을 때,
난 이런 생각을 했다.
그 말이 실현되지 못할 수도 있을 거라고.
미쯔하루 편집장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도마크 출판사의 입장에서 확실히 무리인 일이니까.
그럼에도 도마크는 이런 시도를 해 줬다.
반드시 <지팡이>를 내겠다는 의지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일에…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집으로 돌아온 후.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도마크 편으로 메일을 보냈다.
미쯔하루 편집장에게 직접 말을 걸 수도 있지만, 이런 감사 인사는 공식적으로 해 주는 게 더 좋겠지.
내용은 간단했다.
<지팡이>에 대한 토론을 열어 줘서 감사하다는 점.
그리고 또 하나는… 도마크와 나 양 측의 ‘상황이 허락하면’ 나중에라도 토론에 참여해 보겠다는 점.
물론 어디까지나 ‘상황이 허락하면’ 이지만.
나는 메일을 전송한 후, 바로 <지팡이>의 집필을 이어 갔다.
‘심’에게 보낼 편지를 쓴 하융.
그는 심이 일하는 집의 하녀를 몰래 불러낸다.
입주 가정교사가 외간 남자와 편지를 주고받는 것.
그걸 들키면 그녀에겐 치명적인 흠이 생길지도 몰랐다.
이 하녀는 아무래도 주인의 편일 테니, 가정교사의 그런 ‘부도덕함’을 곧장 일러바칠 테고.
― 이걸 가정교사에게 갖다 주거라. 만약에 가져다주는 일 외에 어떤 말과 행동을 더한다면 내 너와 정을 통했다는 소문을 낼 거다. 그럼 가정교사도 쫓겨나고 너도 쫓겨날 테지.
하녀는 사색이 되어선 편지를 숨겨 가져갔다.
물론 뒤에선 하융을 미친놈 보듯 보겠지만, 하융은 애초에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약속한 날, 하융과 ‘심’은 다방에서 만난다.
두 사람은 허리를 곧게 펴고, 서롤 똑바로 마주 본다.
그리고 편지에서 다 못한 대화를 나눈다.
하융은 끊임없이 말하고, ‘심’은 끊임없이 듣는다.
‘심’은 이따금 현학적인 질문을 덧붙인다.
여자에게 받아본 적 없는 깊고 심오한 질문들.
그럼 하융은 또 온 힘을 다해 대답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인식의 지평이 점점 넓어지고, 자신의 말속에서 쓰고 싶은 글감을 찾는다.
‘심’과의 대화에서 창작욕이 생기는 순간, 하융은 이미 그녀에게 빠져 버릴 수밖에 없게 된다.
둘의 만남은 몇 번이나 계속된다.
동네에 소문이 돈 건 당연한 일이다.
기방에서 일하는 ‘희’의 귀에도 일찍이 들어간다.
하지만 ‘희’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자신도 기생 일을 하니, 하융도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게 공평하다는 태도다.
그 안엔 어차피 하융이 자신에게 돌아올 거라는, 일종의 자신감이 깔려 있었지만.
사실 두 남녀는 충분히 소문을 예방할 수 있었다.
조금 더 비밀스럽게 만난다거나, 만남을 그만한다던가.
하지만 둘 중 누구도 그런 제의는 하지 않는다.
둘의 만남은 공공연하게 반복되었고, 결국 ‘심’이 입주 가정교사에서 잘린다.
하융은 그때 대단히 큰 혼란을 느낀다.
그런 감정은 난생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지켜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심’이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는 놀라움.
하융이 그 혼란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심’은 요령 좋게 먼 동네의 가정교사로 취업한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다방에서 대면을 한 날.
하융은 차마 아무 말도 못 한다.
사실 ‘심’도 하융과의 만남을 피해 오지 않았다.
하융이 ‘희’라는 기생의 애인이란 걸 알면서도 그랬다.
그러므로 이 일이 전적으로 하융의 책임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
문제는, 그럼에도 하융이 제 탓을 하고 있다는 점이지만.
‘심’이 말했다.
― 지금까지 해 주셨던 답변들에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하융은 그게 뭐냐 물었다.
― 제게 묻고 싶은 게 있으십니까? 단 하나라도.
없지 않았다.
이를테면 ‘심’이 취업한 집의 주소.
가능하다면 편지를 계속 주고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미련한 짓이었다.
그런 편지를 주고받는 걸 걸렸다간, 그녀는 또 일터를 잃게 될 것이다.
그럼 대학을 그만둬야 할지도 모르지.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십 분 후, 하융이 끝내 대답을 못 하자, ‘심’은 겉옷을 챙기며 일어난다.
하융도 가만히 일어나 그녀를 배웅해 준다.
그리고 전차의 앞코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
하융이 겨우 질문을 한다.
당신과의 일을 시나 소설로 써도 되겠냐고.
여자에게 이런 허락을 구한 적은 처음이었다.
‘심’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리고 다가오는 전차를 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전차는 오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