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회
―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작가님.
미쯔하루 편집장이 말했다.
굉장히 조심스러운 말투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가만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 …저도 한국의 뉴스를 봤습니다. <지팡이>가 친일적 이야기라고 한때 비난을 받으셨다고요.
“그렇긴 합니다만… 독자분들을 이해합니다. 전혀 근거 없는 얘긴 아니니까요.”
― 그러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도 한국판 <지팡이> 1권과 작가의 말을 보고, 작가님께서 독자분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계시다 느꼈어요. 현명하게 대응하셨습니다. 어찌 됐건 한국에서 그런 논란이 있었을 때 일본은….
일본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일본의 반응은 같은 전범국인 독일과도 달랐을 것이다.
<지팡이>의 배경과 심리적 거리감이 가까운 만큼, 아마도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했겠지.
― 일본 문단과 평론가, 독자층에서는 정말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터져 나왔습니다. <지팡이>의 하융의 친일적 태도를 표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좋아하는 사람들, 하융이 일본을 이용할 뿐이라는 비판들, 결국 그 역시 인간의 성장이라 말하는 사람들… 하지만 비율로 치면 역시 하융의 친일을 반기는 이들이 많았죠.
나는 피식 웃었다.
“그분들은 지금쯤 실망하셨겠군요.”
― 네. 하융의 친일이 성장기의 치기임이 밝혀지는 순간… 말도 못 할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런 인간의 복잡한 마음과 역사적 사실을 연결하여 표현한 작가님의 의도가… 또 다른 독자층들의 마음을 건드린 게 확실합니다.
“또 다른 독자층이요? 하융의 행동을 인간의 성장 과정이라 생각한 사람들 말씀이십니까?”
― 아니요. 그런 독자층은 하융을 일찍이 이해하고 있었지요. 제가 말씀드리는 독자층은 하융이 일본을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제 소설을 이해하곤 있지만 일본인으로서 불쾌하셨던 분들이군요.”
― 그런 셈이죠. 후우… 아무튼 이런 시끄러운 과정 속에서 도마크도 쉼 없이 회의를 했습니다. <지팡이>를 내야 한다, 아니다, 작품의 훌륭함과 별개로 출판사에 해가 될 수 있다. 아니다, 일본 독자층에도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느냐… 이런 식이었습니다. 끝도 없는 도돌이표 같았죠.
“애를 쓰셨군요, 모두.”
비꼬는 건 아니었다.
생각해 보라.
굴지의 출판사에서 단 하나의 작품으로 저토록 긴 회의를 했다고?
그것만으로도 <지팡이>에 적잖은 정성을 쏟은 셈이다.
―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출판사라면 독자층의 변화를 누구보다도 빨리 읽어 내고, 발간에 적용해야 한다는 것을요. 당장에야 욕을 먹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작가님 작품의 판권을 가지는 출판사가 되는 게… 출판사의 본질에 맞지 않겠습니까.
“….”
― 그래서, 도마크를 통해 <지팡이> 일본판 발간을 제안드리는 바입니다.
…그렇게 된 거군.
일본 독자층의 반응이 우호적으로 변한다 해도, 도마크의 선택은 결국 도박이다.
물론 이미 밝혔던 것처럼, 완결 전까진 한국판 외에는 종이책을 낼 생각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할 순 있겠지.
“일단 완결 때까지 기다려 주셔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합니다.”
― 이해합니다, 작가님.
“하지만 완결이 되었을 때, 도마크의 계약 조건을 제일 먼저 들어 보겠습니다.”
애매한 대답이긴 했다.
다른 출판사가 훨씬 좋은 조건을 들고 올 수 있기에.
하지만 아무 의미가 없는 말 또한 아니었다.
‘도마크와 이상의 관계가 깨지지 않았다.’
내 말엔 이런 의미 역시 담겨 있었으니까.
―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드립니다. 작가님.
“더 좋은 대답을 못 드려 죄송하군요.”
― 아닙니다. 완결이 날 때까지, 멀리서나마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나와의 관계가 깨진다는 최악의 결과를 피해서였을까.
그의 말엔 일말의 아쉬움도 없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내 어쩔 수 없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갈림길>을 일본에서 발간하지 못했던 일.
그 일이 내심 마음에 남아있었나 보다.
어쩌면 전생부터 갖고 있던 일본에 대한 미움까지도.
그 답답한 마음이, 이제야 좀 풀어진다.
* * *
약속했던 것처럼, 홈파티를 열었다.
올 사람이라 해봤자 ‘팀 이상’이 전부지만.
딱히 준비할 건 음식과 음악, 조명 정도.
지훈이 잔뜩 뭔갈 사더니, 집 곳곳에 조명과 스피커를 달았다.
와인잔을 닦고 있는 내게 지훈이 물었다.
“형, 음악 뭐로 할래요?”
“아무거나. 너무 시끄럽지 않은 걸로.”
“그럼 힙합.”
…?
어째 답을 정해 놓고 물은 느낌인데?
지훈이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조작하니, 스피커에서 비트가 쿵쿵 울렸다.
어휴, 시끄러워.
“이따 해 지면 소리 줄여라?”
“당연하죠.”
지훈이 어깨를 들썩이며 대답했다.
뭐, 음악이 곁들여지니 분위기가 살긴 한다만.
준비한 음식은 로스트 치킨과 스테이크.
요리는 내가 맡았는데, 오븐 온도에 문제가 있었는지 상태가 좀 이상하다.
“야, 지훈아. 이것 좀 먹어 봐.”
나는 급한 대로 치킨을 좀 잘라서 지훈에게 내밀었다.
지훈은 날름 받아먹더니 몇 번 씹고는 날 슥 봤다.
“…고무 같은데요.”
“이건?”
난 스테이크도 한 조각 썰어 줬다.
지훈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그것도 받아먹었다.
“…이건 종이.”
“…망한 걸까?”
“망한 거죠.”
“어쩌지?”
지훈이 내 휴대폰으로 뭔갈 열심히 했다.
그리고 내게 내민 휴대폰엔 배달 어플 앱이 켜져 있었다.
“너무 늦기 전에 시키세요. 포장 박스는 얼른 버리면 되니까.”
“…어.”
그렇게 어떻게든 수습을 하려고 하던 때.
띵― 동―
현관 벨이 울렸다.
지훈과 나는 망연자실하게 서로를 봤다.
“…어쩌지?”
“…형님 창피할 일만 남은 거죠.”
그렇게 내 최측근이자 매니저인 송지훈은, 우리 사이에 선을 싹 그어 버리곤 현관으로 갔다.
의리도 없는 놈 같으니.
“저희 왔어요!”
“오랜만입니다.”
설상가상 금홍과 피터 한이 함께 왔다.
금홍은 원피스에 피터 한은 양복에.
뭘 그리 우아하게 하고 왔는지.
“이건 뭔 소립니까?”
피터 한이 얼굴을 찌푸리며 스피커를 봤다.
“이건 무슨 냄새예요?”
금홍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주방으로 왔다.
그리고 어쩔 줄 모르는 나와, 내 앞의 ‘요리이고 싶었던’ 것들을 보곤….
“저런….”
하고 안타깝다는 탄식을 내뱉었다.
그때, 피터 한이 쇼핑백을 식탁에 올려 두었다.
그 역시 요리를 슬쩍 보더니 픽 비웃었다.
“이걸 안 들고 왔으면 큰일 났겠군요.”
“네?”
내가 물어도 그는 슥 가 버릴 뿐이었다.
주방 쪽보단 스피커 쪽이 신경에 거슬린 모양이다.
“뭘 가져오셨어요?”
“피터 한 교수님께서 홈파티에 갈 땐 요리 하나씩 해 가는 게 예의라 하셔서, 저는 콜드 파스타하고, 교수님께서는 파이 만들어오셨어요.”
금홍이야 대충 그림이 그려지는데.
피터 한 교수가 파이를 만들었다고?
“…교수님이 직접이요?”
“네. 정말 멋지죠?”
아, 나는 그 말을 듣고 살짝 절망했다.
그리고 금홍이 쇼핑백에서 파이를 꺼냈을 때….
그 황금빛 광채를 보았을 때….
내 실패작들이 여간 부끄럽지 않았다.
갑자기 짜증 난다, 피터 한.
금홍이에게 ‘멋지다’는 소릴 들은 것도,
정말 ‘멋진’ 요리를 해 온 것도,
애초에 이 파티를 기획한 것도 다 그가 아닌가.
“이건 혜경 샘이 만드신 거예요?”
금홍이 맛을 보려 했다.
난 혼신의 힘으로 막아섰다.
“아! 아니에요. 이건 버릴 거라서요.”
“네? 버린다고요?”
그녀가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도 물러날 순 없었다.
“네. 맛볼 것도 못 돼요. 요즘 레스토랑들, 다 배달되니까 지금 얼른 시키려고요.”
“음… 잠깐만요.”
금홍이 날렵하게 스테이크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리며 우물거리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날 보며 물었다.
“아무것도 안 뿌렸어요?”
“아, 아뇨. 오븐에서 꺼내고 소금 후추 다 했는데….”
“아니, 굽기 전에요. 올리브유에 재워 둔다든가… 최소한의 향신료라든가.”
“…그래야 해요?”
“…나오세요.”
금홍이 상냥하지만 어딘지 무섭게 말했다.
나는 왠지 거부할 수 없어서 그대로 물러났다.
금홍은 손을 씻더니, 닭고기도 조금 떼어 먹었다.
그리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요리 처음 해 보시죠?”
“…네.”
“오븐에만 넣으면 뚝딱 완성될 줄 아셨고?”
“…네.”
금홍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금홍은 찬장을 열어 온갖 재료를 살폈다.
그리고 뭔가를 열심히 하는데, 나로선 뭘 하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
난 요리 바보였구나.
나는 내 자신의 단점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금홍을 방해하지 않도록 슬그머니 주방을 나왔다.
거실에 나와 보니 이곳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주방에선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힙합 음악은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스피커 앞에서 모인 지훈과 피터 한.
슬쩍 가보니, 피터 한이 뭔가를 설치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웬 오르골 상자처럼 생겼는데, 놀랍게도 그 안엔 작은 LP판이 들어 있었다.
“…저게 뭐야?”
나는 지훈에게 슬쩍 물었다.
“턴테이블이래요. 직접 가져오셨어요.”
“…저걸? 왜?”
“파티는 무엇보다도 음악이 중요하니까… 라던데요?”
“그럼 네 힙합은?”
“…저런 것까지 가져온 파티 오타쿠를 제가 어떻게 이겨요….”
그렇게 불쌍한 지훈은 단번에 밀려나 버린 것이다.
아니, 주방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금홍을 보니 나도 좀 불쌍한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우리가 준비하려 했지만 결국 우리 손을 떠나 버린 파티가 시작됐다.
쇼팽인지 뭔지 모를 클래식이 스피커로 퍼져 울렸고, 금홍이 부활시킨 음식들은 상당히 먹을 만했다.
그나마 면을 살린 게 있다면 와인이었다.
어제 급하게 산 고가의 와인.
그건 우리 네 사람의 입맛을 충분히 만족시켰다.
“그럼, 건배부터 할까요? <지팡이> 1부가 무사히 끝난 걸 축하해야죠.”
지훈이 분위기를 돋웠다.
“그러자. 다들 고생 많으셨어요.”
나는 먼저 잔을 들었다.
그러자 금홍이 웃으며 말했다.
“에이, 건배사 해 주세요. 뜻깊은 날인데.”
피터 한 교수도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 역시 건배사를 원한다는 듯.
건배사라….
이런 건 해 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뭐, 지금 ‘팀 이상’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끝까지 갑시다.”
<지팡이> 마지막 편까지 이들이 함께해 주길 바라는 것.
“…그건 영화 제목 같은데요, 형?”
“별로군요.”
지훈과 피터 한이 한마디씩 했다.
금홍을 보니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는 끝까지 갈래요. 건배!”
“건배!”
“건배!”
미국식 파티에 한국식 건배가 울려 퍼졌다.
그렇게 깔깔대며 그간의 이야기를 하다가,
피터 한 교수가 문득 내게 물었다.
“그런데 작가님.”
“네. 교수님.”
“2부의 내용은 어떻게 됩니까.”
“아, 궁금하신가요?”
와인을 한 모금 마신 금홍이 거들었다.
“그럼요. 미리 알고 있으면 마음에 준비도 할 수 있고요.”
흠… 그렇단 말이지.
그럼 숨길 것도 없지.
“2부는 하융의 작품 세계가 펼쳐질 예정이에요. 그리고 그 물꼬를 트는 일이 벌어지죠. 바로….”
“….”
“하융의 첫사랑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