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55화 (155/204)

155회

신라문학 디자인팀 회의실.

표지디자인 실무를 총괄하는 팀장은 긴급회의를 모집했다.

출근하자마자 회의실로 끌려온 사람들.

비단 디자인팀뿐만 아니라, 편집실의 직원까지 모두 모였다.

이들은 모두 <지팡이>의 실무진이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회의.

대체 웬 호들갑이냐라는 듯한 표정들이 가득하다.

무언의 짜증이 디자인팀장에게 은근히 쏟아졌다.

그러나 팀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회의를 시작했다.

“오늘 저는 저희가 맡은 <지팡이>의 이상 작가에게 메일을 한 통 받았습니다. 작가님께서 표지 시안을 그려 보겠다고 하셨고, 그 결과물을 보내 주신 거죠.”

“아, 그거 되게 중요한 일이잖아요.”

편집팀의 한 직원이 말했다.

다른 편집팀 직원이 덧붙였다.

“맞아요. 이준환 편집위원님께서 말씀하시길, <지팡이>에 대해서 한바탕 크게 논란이 있었고… 그걸 좀 잠재울 수 있는 방향으로 표지를 뽑아야 한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여기까지는 모두 공유된 이야기.

<지팡이>의 표지는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쯤 되자, 사람들은 슬슬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시안이 왔다니 그것부터 좀 보죠.”

“네. 시안을 보고 아예 이 자리에서 저희 편집팀과도 얘길 좀 해요. 디자인팀은 소설 원고를 확인하셨죠?”

“당연하죠.”

디자인팀원들은 좀 불쾌한 듯 대답했다.

물론 디자인팀은 편집팀보다 원고 볼 일이 적었다.

야근이 많아 책 볼 시간이 없기도 했고.

하지만 어떤 출판인이 이상 작가의 원고를 안 봤겠는가.

게다가 신라문학에 일하는 직원이 말이다.

날카로워지는 분위기를 디자인팀장이 얼른 무마했다.

지금 중요한 건 자존심이 아니라 시안이었다.

“네, 그럼 일단 다 같이 <지팡이>를 읽었다는 전제하에 그림을 좀 살펴보죠.”

팀장이 옆에 앉은 디자인팀 직원에게 눈짓했다.

그 직원은 노트북에서 이상이 보낸 사진을 열었다.

그러자 그림 하나가 프레젠테이션 화면 가득 나타났다.

회의실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다들 눈이 휘둥그레진 채 그 그림을 보았다.

그림에 문외한이라도 알 순 있었다.

<지팡이>를 봤다면, 저 얼굴이 무엇을 나타내는 건지를.

하융의 절망과 희망.

아니, 그렇게 쉽게 말로 정의할 수 없었다.

수없이 많은 감정이 그 그림에 담겨 있었다.

게다가 유화였다.

인물화를 하는 데에 있어 질감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다는 유화.

그 두터운 물감의 질감까지도, 하융의 깊고 어두운 내면을 드러내는 듯했다.

“저걸… 작가님께서 그리셨다고요…?”

편집팀의 누군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혹시 미대라도 나오셨는지… 복수전공이라도….”

디자인팀 직원도 조심스레 물었다.

미대를 나왔다고 해도, 엄청난 실력이었다.

팀장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는 한, 이상 작가님은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으신 적이 없어요.”

“하지만 저런 붓 터치는 전공자가 아니면 흉내 낼 수도 없는데요. 게다가 굉장히 클래식한 스타일이에요.”

“누가 도와준 거 아닐까요?”

편집팀 직원이 물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엔, 차라리 그편이 말이 됐다.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생각해 보니까 그것도 좀 이상하더라고요.”

“어떤 점이요?”

“이 표지는 저희가 읽은 하융의 내면을 아주 깊은 곳까지 반영하고 있잖아요. 이건 말로 지시해서, 누군가가 대신 표현해 주는 수준을 넘어섰어요.”

“….”

“작가 본인이 아니라면 그리기 힘든 그림이라는 게 제 결론입니다.”

디자인팀장은 한국 최고의 미대를 나온 인재였다.

그녀의 말에 다들 할 말을 잃고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전… 우리 계획을 좀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말입니까?”

편집팀 팀장이 물었다.

계획을 바꾼다는 건, 상당히 예민한 문제였다.

“저희 디자인팀에서는 이걸 시안으로 쓸 수가 없어요.”

“…왜죠?”

“이미 완성되어 있으니까요. 이 이상의 표지를 뽑을 수도 없고요. 표지디자인은….”

“….”

“이 그림 그대로 가시는 걸 추천해 드려요.”

회의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어떤 직원은 놀라서 고개를 설레설레 젓기만 했다.

간혹 그림 재주가 좋은 작가들이 있다.

그들이 표지를 그리는 경우도 있고.

하지만 그 역시 시안에 그치거나, 채색을 한다 해도 결국 디자인팀의 재구성이 필요했다.

질감이나 색감은 전문가들을 따라갈 수 없으므로.

결국 디자인팀장 역시 이례적인 결정을 내린 셈.

다들 말이 없는 가운데, 편집팀 팀장이 입을 열었다.

“디자인팀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편집팀도 따라가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림을 다시 보았다.

“편집위원님들께는 제가 보고를 해야겠군요.”

* * *

며칠 전, ‘팀 이상’의 회의에서 나왔던 수정 사항.

나는 며칠째 그 부분에 매달리고 있었다.

하융이 스승을 만난 후.

자신의 공허를 알아 가는 과정.

하융은 스승의 말을 거부했다가.

또 혼자 생각했다가.

또 한 번 스승의 말을 거부했다가.

결국 자신의 내면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더.

하융은 자신의 그 공허와 권태가, 자신의 것만은 아님을 깨닫는다.

나만 외로운 게 아니라는 것.

외로움은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

이 깨달음은 하융의 반골 기질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린다.

이건 비단 하융의 심리적 안정 문제가 아니다.

한 인간이 자신의 공허 즉 약점을 인정하는 순간, 타인에 대한 연민의 감정 역시 이해하게 되니까.

즉, 하융의 작가 인생에 대단히 중요한 전환점이다.

타인에 대한 연민과 이해.

이거야말로 소설을 쓰는 최고의 동기 중 하나이기에.

그리고… 이런 하융의 마음가짐을 토대로, 하융의 작가 생활이 담긴 2부가 열릴 것이다.

며칠 내내 수정을 한 결과.

그럴듯한 원고가 만들어졌다.

나는 지훈에게 그 부분만을 다시 읽혔다.

자신이 요청한 수정 사항이라 그런지, 지훈은 평소보다 심각하게 체크를 했다.

“…훨씬 좋은데요? 문학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쓰인 것 같아요.”

“그래?”

“네. 사실 원래 원고에도 내용은 문제가 없었어요. 그걸 표현하는 방법을 좀 더 친절하게 해달라는 거였으니까…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요.”

라고, 송지훈 평론가님께서 ‘패스’를 해 주셨다.

나는 한시름 놓고, 마지막으로 원고를 살펴본 후, 그것을 톡으로 금홍에게 보냈다.

― 수정 원고예요. 초벌 번역 들어가 주세요.

답장은 바로 왔다.

― 네. 그럼 이제 1부는 끝이죠?

― 그런 셈이죠.

― 바로 2부 시작하실 거예요?

― 연재를 멈추고 싶진 않으니까… 그러지 않을까요?

― 흠….

― 왜 그러세요?

― 아니, 피터 한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더라고요. 1부가 끝났으면….

― 끝났으면?

― 파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파티.

‘조선인’인 나는 생각지도 못했다.

‘한국인’인 금홍과 지훈도 마찬가지.

하지만 자유의 나라에서 태어난 ‘미국인’ 피터 한.

역시 유전자가 남다르다.

그렇게 놀기 싫어하는 얼굴을 해 놓고도, 친해지고 나니 은근히 노는 건 잘 챙긴단 말이지.

― 그럼 조만간 추진해 보죠.

― 네. 전달할게요^^

그렇게 금홍과 톡을 마쳤다.

“파티라….”

나는 제 방에서 작업을 하는 지훈에게로 갔다.

똑똑, 하고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지훈이 침대에 누워 책을 보고 있었다.

“뭔 일 있어요?”

내가 지훈의 방을 들락거리는 일은 잘 없기에, 녀석은 웬일이냐는 눈이다.

“피터 한 교수가 파티하자는데?”

“…파티?”

“응. <지팡이> 1부 마감 파티라고 해야 하나. 어때? 하고 싶어?”

이미 추진한다 해 놓고 묻는 것도 이상하지만.

지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침대를 데구루루 구르더니 벌떡 일어났다.

“완전 좋죠! 아~ 안 그래도 요즘 계속 원고만 보다 보니 머리 아팠는데, 한번 식혀 주고 가야 인지상정 아닙니까?”

“그래. 그럼 조만간 열어 보자. 간단한 홈파티로.”

“맡겨 주십쇼. 제가 한번 기깔나게 준비해 볼게요.”

지훈은 벌써부터 신이 났다.

머리를 식힌다는 지훈의 말이 새삼 와닿았다.

<지팡이> 1부를 쓰며 힘들었던 일들, 한 번은 정리하고 2부로 넘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렇게 지훈과 홈파티에 대해 이야기할 때였다.

우웅― 우웅―

내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인을 확인해 보니, 이준환 편집위원이었다.

“여보세요.”

― 이상 작가님. 저 이준환입니다.

“네, 편집위원님.”

이준환 편집위원이 전화를 할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내가 보낸 표지 시안, 아니 표지 그림.

그에 대한 피드백이겠지.

― 작가님이 보내 주신 표지를 보고 디자인팀과 편집팀이 회의를 한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원래 시안만 보내드리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제가 너무 과했을까요?”

사진을 보내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아무리 작가라지만, 출판사의 일을 빼앗은 게 아닌가 하는.

또, 내 그림이 오히려 디자인팀을 애먹일 수도 있으니까.

만약 그들이 조금이라도 곤란해한다면… 원래의 시안을 다시 보내 줄 생각이었다.

― 아, 절대 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히려?

― 그 그림을 그대로 표지로 쓰고 싶습니다.

“…네?”

― 디자인팀에서 올린 요청 사항이기도 합니다. 작가님이 그리신 그림을 그대로 <지팡이> 표지에 싣는 거죠.

“…아.”

이건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생각을 했다면… 그림을 그리지 못했을 거다.

작가 입장에선 너무나 부담스러운 일이니까.

“그… 렇게 해도 될까요?”

― 그 대답 대신 이렇게 말씀드리면 될 것 같군요.

“….”

― 디자인팀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팡이>에 그보다 더 나은 표지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요.

확신과 극찬을 담은 말.

나는 그 말 앞에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내가 그림에 담은 진심과 집념.

그런 것들이 오로지 그들에게 전달된 것 같아서.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 다만 저희 측에서 사진 촬영 작업과 약간의 보정 작업이 있을 예정입니다. 그림을 저희에게 보내주시면, 알아서 작업에 들어갈 수 있는데… 가능하겠습니까?

“아, 그럼요.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 그럼 곧이겠군요.

“네?”

― <지팡이> 발간 말입니다. 지금 편집 작업은 모두 마쳤어요. 표지만 넣으면 되는데… 그 표지를 완성해서 주셨잖습니까.

아, 얘기가 그렇게 되는구나.

나는 일찍이 원고를 신라문학에 보냈다.

딱히 내용을 바꾸거나 윤문을 하지 않았으니, 그쪽도 사소한 오탈자 교정 정도 손을 봤을 것이다.

― 아무튼 그림을 보내 주시고, 또 한 가지, 작가의 말을 좀 써 주시길 바랍니다.

“아, 네. 준비해서 드리겠습니다.”

작가의 말.

사실 작가의 말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점점 그런 구구절절한 말들을 없애는 추세이기도 하고.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다르지.

오직 한국 독자들만을 위한 책이다.

응당 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실어야 한다.

전화를 끊고 나는 통화 내용을 지훈에게 말했다.

지훈은 이제 놀라지도 않았다.

“형 그림 잘 그리는 건 알고 있으니까요. 저도 옥상에서 형 작품 봤어요. 표지가 될 만하다고 생각해요.”

“….”

“하지만 역시 좀 질투나. 난 언제 형처럼 성공하나.”

지훈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너도 이미 성공하고 있어. 청탁 밀려서 잠도 별로 못 자는 놈이.”

빈말은 아니었다.

지훈은 문단에서 차곡차곡 커리어를 쌓아 가는 중이니까.

“흥, 됐어요. 가서 그림 포장해서 소포로 보내자고요. 그것도 큰일일 텐데.”

“정 뭐하면 직접 갖다 주지 뭐.”

우리는 함께 옥상으로 올라갔다.

신문지로 그림을 싼 후, 그것을 얇은 스티로폼으로 덧대고, 다시 신문지로 한 바퀴 둘러 노끈으로 고정했다.

일반 오토바이 퀵으로는 배송이 불가능해서, 특수배송업자를 불러 그림을 전달했다.

배송 차량이 골목을 떠나가는 걸 본 후,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그림이 도착하면,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지팡이> 1권이 발간된다.

내 삶을 담은 대하소설.

그 첫 번째 결과물이 실물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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