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54화 (154/204)
  • 154회

    오랜만에 붓을 잡았다.

    예전에는 화가가 되지 못한 게 서글펐다.

    하지만 지금은 뭐랄까… 오히려 가벼운 마음으로 캔버스 앞에 설 수 있었다.

    화가로서 그리는 그림이 아닌, 작가로서 그리는 그림.

    이 그림이 완성되면 사진을 찍어 신라문학에 보낼 생각이다.

    원래 보내겠다고 한 건 시안이지만, 시안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밝힐수록 좋을 테니까.

    나는 소설을 쓰면서 때때로 옥상으로 올라왔다.

    옥상의 창고는 내겐 멋진 화실이었다.

    한쪽 벽에 붙여 놓은 표지 시안.

    그 앞에 놓은 이젤과 커다란 캔버스.

    며칠 전, 캔버스에 검푸른색 물감을 칠해 놨다.

    한 곳도 빠짐없이, 캔버스 가득.

    이제 슬슬 이 위에 ‘나’를 그릴 차례다.

    어느 정도 완성된 시안이 있지만 때때로 거울을 본다.

    내가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그 안에 전생의 내 모습이 어떻게 뒤섞여 있는지.

    그런 것들을 가만히 바라보면, 뭔가를 그리고 싶은 마음을 누를 수가 없다.

    나는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밝은 회색으로 그리는 피부.

    붉은색과 검은색을 섞어 칠한 머리카락.

    면적이 꽤 크다 보니 시간도 오래 걸렸다.

    터치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했고.

    흰색으로 콧대를 세우고, 붉은색으로 입매를 살짝 잡았다.

    남은 건 가장 중요한 눈.

    사실 지금까지 나온 그림도 꽤 마음에 든다.

    하융의 혼란과 독선, 외로움을 모두 담은 듯한 얼굴.

    이 눈만 화룡점정이 되어주면 완벽할 텐데.

    나는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한동안 고민했다.

    물감은 많다.

    아무 색이라도 칠할 수 있다.

    신념을 보여 주는 검은색.

    광기를 드러내는 노란색.

    신비를 나타내는 보라색.

    우울을 상징하는 푸른색.

    분노를 표현하는 붉은색.

    뭐든 다 말이 됐다.

    자, 집중하자.

    내가 뭘 표현하고 싶은지 다시 생각하자.

    적어도 <지팡이> 1권에서 보여 주고 싶은 것.

    하융의 탄생과 비뚤어진 마음 아닌가.

    그렇다면… 푸른색이다.

    푸른색은 비단 우울만을 드러내지 않는다.

    자폐성과 독선이라는 나쁜 뜻과 더불어, 그것을 초월하는 영원성을 상징하기도 하니까.

    자폐적 고립 혹은 한계의 초월.

    하융의 미래는 어디로 흘러갈지 모른다.

    이 푸른 눈을 통해 독자들도 하융의 불안과 가능성을 느낄 수 있기를.

    나는 하융의 눈을 채워 넣었다.

    눈을 그리는 작업은 인물화에서 가장 중요하다.

    당연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고, 붓을 뗐을 땐 이미 밤이 늦어 있었다.

    “후우….”

    한 걸음 물러나 그림을 바라보았다.

    마무리 단계만 남겨 놓은 그림은 적어도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불안한 세계 속에 덩그러니 놓인 것만 같은 사내.

    바짝 마른 그 얼굴엔 독선과 우울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 사내는 푸른 눈으로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아직 나를 판단하지 마’라고.

    나는 핸드폰으로 그림을 찍었다.

    신라문학 쪽에서 잘 참고할 수 있도록, 화면 가득 차게.

    * * *

    다음 날.

    지훈과 나, 금홍은 ‘팀 이상’ 회의를 열기로 했다.

    이번 회의는 금홍이 우리 집으로 왔다.

    사실 금홍은 대학원에 간 이후.

    한동안 우리 집에 들락거리는 걸 어색해했다.

    거리가 멀어진 만큼 마음도 괜히 불편해졌던 거겠지.

    하지만 이제 금홍은 자연스레 집을 드나든다.

    자주 열리는 회의가 그녀를 편안하게 한 모양이다.

    예의 차리듯 선물을 사 오는 버릇도 사라졌고 말이다.

    아무튼 우리 세 사람은 작업실 원탁에 모여 앉았다.

    지훈이 먼저 운을 띄웠다.

    “이번 원고 진짜 좋던데요? 일본 관련한 불편한 내용도 많이 사라진 것 같고요. 물론 전의 불편한 이야기가 하융의 캐릭터를 잘 잡아 줘서 그 뒤의 내용 전개에 적잖은 기여를 한 거지만요. 특히 이 ‘스승’ 캐릭터, 정말 좋았어요.”

    나는 지훈의 말에 덧붙였다.

    “이 스승은 하융이 만난 첫 번째 ‘어른’이야. 지금까지 하융은 두 ‘어른’ 즉, 부모와 조국의 수혜를 받지 못했어. 그것이 하융을 비뚤어지게 만들었고. 하지만 이 스승은 뭐랄까, 하융이 자신의 마음을 처음으로 직시하게 만들어 준 사람이야.”

    “‘오지게 심심했던 모양이구만, 불쌍하게도.’ 그 말 말이죠?”

    “응. 하융은 거기서 큰 충격을 받잖아. 자신의 마음속 분노의 핵심에는… 공허함이 있다는 걸 발견하거든.”

    “맞아요. 공허함… 지금껏 하융의 행동은 어딘가 속 빈 강정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온 힘을 다해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온 힘을 다해 저항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도 하융의 내면을 채워 주지 못했으니, 하융이 가진 분노도 힘이 없을 수밖에. 단적으로 일제를 찬양하는 글을 기껏 써 놓고 그것을 결국 태워 버리는 행위를 들 수 있지. 저항을 하고 싶은데, 그것을 드러낼 마음까진 들지 않는 거지. 결국 하융이 하고 싶은 건 보란 듯한 저항이 아니었던 거지. 그냥….”

    “….”

    “그냥 자신의 권태감을 채울 뭔가를 하고만 싶었던 거야. 그것이 ‘저항’이나 ‘반골 기질’로 드러났던 거고.”

    “…불쌍하네요.”

    그 말을 한 사람은 금홍이었다.

    금홍은 언제부터 그랬는지, 우리의 모든 말을 빼곡하게 필기로 남기고 있었다.

    “맞아요, 불쌍한 인간이죠. 그런 불쌍한 인간이 스승을 만난 건 하늘이 준 행운이고요.”

    그건 내 스스로에게 하는 말과 같았다.

    나도 조인창 교수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성장한 작가가 되지 못했을 테니까.

    금홍이 물었다.

    “그럼 이번 원고에서 중요한 지점은 뭘까요? 번역에서 반드시 살려야 할 부분이요.”

    “하융의 마음이 혼란에서 안정으로 변해가는 과정이죠. 물론 완벽한 안정이라곤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친일파는 흉내 내는 유치한 행동을 더는 하지 않잖아요.”

    “결국 성장통이었네요.”

    성장통.

    나는 그 말이 마음속 깊이 와닿았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 전생에 끊이지 않았던 혼란은.

    어쩌면 나라는 인간의 성장통이 아니었을까.

    “…그렇죠.”

    “형, 저는 이 스승이 한 말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융은 처음엔 스승의 말을 거부하잖아요. 자신은 텅 빈 인간이 아니다, 자신은 불쌍한 인간이 아니다… 이렇게요. 하지만 이 스승은 매번 하융에게 강조해요. 작가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속이는 작가가 가장 나쁘다.”

    “맞아. 그리고 정말 중요한 말을 하지.”

    “자신에게 솔직한 작가만이 시대를 초월한 작품을 쓸 수 있다고요?”

    “…응.”

    “좀 더 부연 설명을 해 주실 수 있어요?”

    금홍이 물었다.

    “작품 내적으로는 이해가 되는데, 좀 더 확실히 알아 둬야 정확한 번역의 길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이런 거예요.”

    나는 설명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작품은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래기 마련이에요. 사람들의 환경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고, 심지어 말투까지도 변하니까요. 하지만 절대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어요. 바로 독자가 ‘인간’이라는 점이에요.”

    “인간….”

    금홍이 원고에 작은 글씨로 ‘인간’이라 적었다.

    “그래요. 우리는 무엇이든 소설로 만들 수 있어요. 눈에 보이는 사물. 인간관계, 추상적인 감정, 역사적 사실… 모든 것을 다 소설로 만들 수 있죠. 하지만 그런 것들은 사물의 가치, 감정과 관계에 대한 가치관, 역사에 대한 평가에 따라서 결국 변하고 빛바래게 돼요. 하지만 인간의 심층에 있는 솔직한 감정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죠. 수백만 년이 지나도 인간은 별수 없이 똑같은 인간의 본능을 가지고 살아갈 테니까요. 우리가 ‘명작’이라는 이름으로 읽고 있는 작품들도 바로 그런 본능과 감정을 다룬 소설들이고요.”

    “그런 감정은… 예를 들면 뭐가 있을까요?”

    금홍이 또 물었다.

    마치 내 강의를 듣는 학생처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을 거예요. 인간이 인간에게 가지는 성적 끌림, 질투, 본능 같은 거요. 그런 건 사회적 관습이나 가치관 같은 걸 모두 배제하고 솔직한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만 파악할 수 있는 감정이에요. 하융의 경우에는… 채울 수 없는 공허감이겠죠. 인간은 본능적으로 공허감을 가지고 있어요. 자신이라는 존재는 세상에 한 명밖에 없잖아요. 타인이 아무리 자신을 이해해 주려 해도 한계는 존재하고, 분명 어딘가는 이해받지 못하는 부분이 덩그러니 남게 돼요. 남들과 닿을 수 없는 그 부분이 사실은 극도의 외로움을 낳아요. 인간이 가진 ‘우울’이란 지극히 정상적인 기질도 바로 그곳에서 발생하고요.”

    “형, 그럼 하융이 가진 권태라는 기질도….”

    “이 공허감에서 나온 거지. 우리 모두 가지고 있는 지극히 당연한 감정에서. 다만 하융은 그 공허감을 남들보다 강하게 자극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성장기를 보냈을 뿐이야.”

    “음… 설명을 들어보니 알겠어요. 다만 지금 소설 안에서는 다소 추상적으로 표현이 되어 있는 것 같은데, 몇 문장을 더 넣어서 구체화해보는 건 어때요?”

    지훈의 말에 나는 원고를 다시 봤다.

    쓸 때는 내 이야기에 빠져 몰랐는데, 다시 보니 확실히 그런 면이 없잖아 있었다.

    너무 세련되게 표현하려다 보니 빠진 문장도 있었고.

    “네 말이 맞네. 이 부분은 좀 더 수정을 한 뒤에 드릴게요, 금홍 샘.”

    “네. 그럼 여긴 마지막에 번역 작업 들어가죠.”

    금홍이 가볍게 체크를 했다.

    그렇게 한 가지 수정 사항이 잡힌 후, 회의는 계속됐다.

    “지훈아, 그 뒤의 내용은 어때?”

    “하융이 스승과의 갈등 끝에 마음의 안정을 찾는 내용이요?”

    “응. 자연스러운 것 같아? 스승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작품 세계를 점점 구축해 나가잖아. 문단에서도 인정을 받게 되고.”

    “네. 그럴 법한 게… 스승 캐릭터가 진짜 능글맞은 너구리 같은 데가 있잖아요.”

    능글맞은 너구리.

    그 표현에 우리 세 사람은 좀 웃었다.

    “그런 스승이라면 넘어갈 수밖에 없죠. 그러니 하융도 스승의 말을 듣고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결국 마음의 텅 빈 부분을 발견하고… 자신이 느끼는 공허와 권태에 대한 소설을 쓰잖아요. 전 그 부분 정말 인상적이었거든요. 지금까지 하융은 세상에 시비를 걸듯 문학을 하고 있단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이때 쓰는 소설은….”

    “…소설은?”

    “하융 자신을 위한 소설 같아서요. 어휴… 제 동생이었으면 잘했다, 이 자식아! 하고 싶은 마음이랄까요.”

    지훈에게 동생 취급을 받는 건 좀 싫었지만,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반응이었다.

    하융의 긍정적인 변화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또… 1부가 끝나가기도 하고.

    총 3부로 구성될 <지팡이>

    그중에서도 1부는 가장 짧다.

    하지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1부여서 그랬을까.

    어려운 고비를 잘 넘겼단 생각이 들 뿐이었다.

    * * *

    신라문학 본사, 디자인 팀.

    디자인 팀장은 아침 일찍 메일을 확인했다.

    그녀는 신라문학에서 발간하는 소설 표지를 담당했다.

    책임이 막중한 만큼 바쁜 건 당연한 일.

    하룻밤 안에 메일이 많이도 쌓였다.

    러시아워를 뚫고 출근한 직장인답게,

    그야말로 권태로운 표정으로 메일을 지우던 팀장.

    하나의 메일을 보고 살짝 놀란다.

    “오, 이상이다.”

    출판사에 있으면서 어떻게 이상을 모르겠는가.

    이상에 대한 ‘팬심’으로 신라문학에 입사하고 싶은 취준생들도 많은 상황인데.

    신라문학 내부야 말할 것도 없었다.

    팀장은 메일을 진지하게 읽어 보았다.

    ‘시안’을 그리다가 ‘그림’을 그리고 말았다는 내용.

    그녀는 어딘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픽 웃었다.

    ‘그림 그리는 취미가 있으신가. 일단 작가 의도를 최대한 살리되 깔끔하게 뽑아 보자.’

    가벼운 마음으로 메일 속 첨부 파일을 열었을 때였다.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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