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회
내 전생은 여러모로 아쉽다.
부모 복이 없는 건 둘째 쳐도, 이렇다 할 스승마저 없지 않았나.
만약 날 잡아 주는 스승이 있었다면.
그래서 조선 땅에 조금 더 정이 있었다면.
나는 일본으로 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럼 그렇게 젊은 나이에 요절하지 않았을지도.
그래서 이번 생에 조인창 교수를 만났을 때.
그에게 남다른 애틋함과 존경심을 느꼈다.
나 스스로 느끼기에도.
내가 남들보다 오만한 편임에도.
나는 조인창 교수를 완전하게 믿고 따랐다.
내가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건, 아마 전생의 외로움 때문이겠지.
나에게 먼저 손 내밀어 준 스승은 처음이니까.
그래서 나는 하융에게도 스승을 주고 싶다.
스승이 있는 삶이 가진 안정감과 따뜻함.
그거야말로 하융의 외로움과 반골 기질을 달래 줄 따뜻함일 테니.
이번 생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지팡이>를 이어 쓰기 시작했다.
이미 30화를 훌쩍 넘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게 몇 화가 될지 확신할 수 없다.
쓰고 싶은 만큼 쓰다 보면, 화 수가 확 늘어나 버리기 일쑤니.
지금까지 하융은 폭풍 같은 성장기를 보냈다.
부모도 나라도 믿지 못하는 섬 같은 삶.
인문학도인 하융은 소설을 쓴다.
작가라는 원대한 꿈이 있어서라기보단… 마음속 분노와 답답함을 풀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눈이 밝은 교수는 그를 아낀다.
그에게 ‘조선 문학의 희망’이라 했던 그 교수.
하지만 하융은 그 교수가 싫다.
자신을 무엇이라도 단정해 버리는 모두가 싫다.
하융은 한 유명 신문사를 통해 등단을 한다.
당선자로 선정이 된 날, 그는 심사위원들의 부름으로 탁주집에 간다.
탁주집에서 심사위원들은 하융을 추켜세운다.
‘조선 문학의 희망’ 따위의 말들이 또 들려온다.
지긋지긋하다 생각하며 밖으로 나오는 순간.
한 사람이 따라 나오며 묻는다.
― 화가 잔뜩 난 채로 글을 썼던데.
장난기 가득한 주름진 얼굴.
중요 심사위원 중 한 명이지만, 지금껏 하융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은 사람.
하융은 뜨끔한다.
자신이 소설에 숨겨 놓은 분노.
그것을 들킨 건 처음이기 때문이다.
몇 살쯤 되었을까, 중노인?
워낙 웃는 상이라 나이가 가늠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도 소설가라 했다.
이름을 들으니 꽤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종로 다방을 하나 알려 주며 말한다.
― 내가 생업으로 운영하는 다방이네. 무료해지면 놀러 와 커피 한 잔 정도는 공짜로 내어 주지. 수다나 떨자고.
그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된다.
물론 처음부터 그에게 호감이 생긴 건 아니지만.
동기들보다 뛰어난 하융은 정말 ‘무료’한 일이 잦았고, 어느 날 속는 셈 치고 그 다방을 찾았다.
사실 다방도 주인도 별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다.
발에 채는 게 글 좀 쓴다고 하는 소설가들이었으니.
그러니 그가 특별한 건 뭐란 말인가.
게다가 교수도 학자도 아닌 다방 주인인데.
하지만 그는 삽시간에 하융의 마음을 잡아 버린다.
하융이 뭘 쓰건, 그 안에 있는 분노며 외로움을 읽어 내기 때문이다.
하융은 그제야 알았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처럼, 글을 잘 보는 사람도 따로 있다는 걸.
어느 날 하융의 소설을 본 그가 말한다.
― 아직도 화가 잔뜩 났네? 작품은 좋다만, 이렇게 아무리 네 감정을 부려 놓은들 편해질 수 있을까?
점쟁이 같은 말.
어딘지 짜증 나는 말투.
― 그럼요. 소설은 제 유일한 소통구인데요. 저는 사실….
하융은 문득 위악을 떨고 싶어졌다.
이 여유로운 척하는 중노인을 당황시키고 싶어졌다.
― 일제를 찬양하는 글도 썼는데요. 바로 태워 버리긴 했지만.
하융은 그가 놀랄 줄 알았다.
화를 내며 쫓아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지식인의 윤리의식으로는 절대 용납 안 될 말이니.
그러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온 말.
그 말에 오히려 하융은 놀랐다.
― 오지게 심심했던 모양이구만, 불쌍하게도.
난 여기까지 글을 썼다.
이것만 해도 몇 화는 거뜬히 나올 거였다.
조인창 교수와 인연이 닿은 건, 비교적 얼마 안 된 일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지팡이>의 여운을 쉽게 떨칠 수 없었다.
하융이라는 인물.
지금 이 인물은 중요한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상처받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는 기회.
다른 말로 하면, 성장의 기회 말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 시간 앉아 있었더니 허리가 뻐근했다.
“읏―챠.”
스트레칭을 하며 주위를 살피는데.
“…!”
문득 표지 시안이 눈에 들어왔다.
“…흠.”
나는 시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뭉크의 ‘절규’를 연상케 하는 스케치.
아직 채색도 되지 않은 그림엔, ‘파랑’이니 ‘회색’이니 하는 메모만 적혀 있다.
사실 디자이너와의 약속을 더 잡지 않았다.
디자이너는 극구 만나자고 했지만, 나는 그에게 어머니 곁을 지키라 말했다.
그가 굉장히 미안해한 건 말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시안으로선 충분하다.
이걸 토대로 신라문학이 멋진 표지를 만들어 주겠지.
하지만… 난 아직 이걸 보내고 싶지 않았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하융의 이미지.
그리고 하융의 혼란스러운 감정.
그것을 더 표현하고 싶었다.
이렇게 내 안에 맴도는 여운을 달래고 싶었다.
…차라리 완성을 시켜 버릴까?
내가 좋아하던 캔버스에, 내가 좋아하던 유화물감을 써서 말이다.
“….”
잠시 고민하던 나는 외투를 챙겼다.
망설여봤자 답은 정해져 있다.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더는 포기하거나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차를 몰고 도착한 곳은 숭례문 근처.
정확히 말하자면, 숭례문 앞 화방 거리였다.
사실 화방 거리가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
이렇다 할 정보도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화방은 골목 양옆으로 제법 빼곡히 늘어서 있었다.
이런 낡은 가게가 아직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전생에서 미술용품은 꽤 사치품이었다.
지금도 그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으나, 미술용품 가게의 위상이 좀 달라진 것 같긴 했다.
그때의 미술용품 거리는 어딘지 부르주아적인 냄새가 났는데….
지금은 이토록 예스러운 느낌만 난다.
나는 보이는 가게 중 가장 낡은 곳을 선택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나라는 인간의 연식과 그나마 닮은 곳을 찾고 싶었을지도.
가게에 들어가기도 전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가게 앞에 다양한 크기의 캔버스가 가득했다.
그렇게 내가 캔버스 앞에서 넋을 놓고 있을 때였다.
땡그랑―
놋쇠 종소리가 울리더니, 가게 문이 열렸다.
사장으로 보이는 중년 여자가 내게 물었다.
“캔버스 사시게?”
“네.”
“사이즈는?”
그녀는 적극적으로 판매를 시작했다.
희끗희끗한 머리를 길게 기른 모습이, 예술계 사람인 티가 났다.
그나저나 크기라.
어차피 어디에다 그려도 책에 들어갈 사이즈는 정해져 있는데.
“…잘 모르겠어요.”
“뭐 그리시게?”
“음… 저요.”
“청년?”
“네. 제 얼굴이요.”
그녀는 날 빤히 바라보았다.
혹시 날 알아보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런 것 같진 않았다.
자기애 넘쳐 보이는 이 젊은 손님을 어찌 대할지, 그 궁리를 하고 있는 걸지도.
“그럼 청년이 생각하는 자기 사이즈로 사야지. 다 고르면 들고 와요.”
그녀는 그 말만 남기고 들어가 버렸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사이즈.
그게 무슨 말일까.
인간의 그릇 크기? 혹은 마음의 그릇 크기?
중요한 건, 저 말을 들은 이상 작은 캔버스를 고르긴 어렵다는 것이다.
상술일지도 모를 장사꾼의 말 한마디.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여러 번 곱씹었다.
‘나’를 닮을 하융을 담을 그림.
그 그림을 담을 책을 생각하면 그녀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결국 캔버스를 선택했다.
땡그랑―
놋쇠종이 울리자 카운터의 사장이 날 보았다.
그리고 내가 들고 온 캔버스를 보고 쾌활하게 웃었다.
“큰 것도 고르셨네.”
“이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아서요.”
내가 고른 캔버스는, 진열되어 있던 것 중에 두 번째로 컸다.
가장 큰 건 아예 풍경용이라 들고 갈 엄두도 안 났고, 들고 갈 수 있는 것 중엔 내가 고른 게 제일 컸다.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캔버스를 포장했다.
보통 신문지에 감싸는데, 크기가 워낙 크다 보니 꽤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두 번째로 골라야 할 건 물감.
“유화물감은 어딨어요?”
“거기 뒤돌아서 왼쪽이요.”
“물감 빨리 마르게 섞을 보조제도요.”
“같이 있어요. 요새 물건 좋아서 빨리빨리 말라요.”
시키는 대로 뒤를 돌아 왼쪽을 봤다.
색색까지 유화 물감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가게가 작고 낡아서 그렇지, 있어야 할 건 다 갖춰 둔 것 같았다.
나는 신중하게 물감을 골랐다.
많이도 필요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삼 원소인 노랑, 빨강, 파랑.
거기에 더해서 검정과 흰색이 전부.
선호하는 브랜드 같은 걸 따질 상황은 아니었다.
혜경은 그림에 완전히 문외한이었기에, 현대 미술용품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다.
하지만 고민할 것 없었다.
미술용품계의 영원히 변하지 않을 철칙.
바로 ‘비싼 게 곧 좋은 것’이었다.
그 외에 유화용 기름과 붓, 보조제 등을 골랐다.
다양한 사이즈 속에서 필요한 것만.
카운터에 우르르 올려 두니 양이 꽤 됐다.
돈 좀 나가겠구나.
그래도 난 이 쇼핑이 상당히 즐거웠다.
전생에서는 돈이 없어 고급 물감을 동경했다.
어쩌다가 물감이 생기면 벌벌 떨며 아껴 썼지.
지금에라도 이렇게 ‘지름’을 해 버리니… 속이 좀 시원하기도 하고.
사장이 봉투에 물감들을 담으며 물었다.
“혹시 작가예요?”
“네?”
뒤늦게나마 날 알아보나 싶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녀가 다시 물었다.
“아니, 화가시냐구요. 재료 고르는 게 예사롭지 않아서. 지망생 같진 않고.”
아, ‘그’ 작가를 말하는 거구나.
글 쓰는 작가가 아니라.
나는 가만히 웃으며 대답했다.
“한때는 그랬으면 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전생에서 이런 기회가 있었다면… 난 화가로 성공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을 거다.
하지만 말 그대로, ‘지금은 아니다’.
나는 지금 소설을 위해 그림을 그리려 하니까.
차에 미술용품을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것들을 바리바리 들고 집에 돌아갔을 때.
당연히 지훈은 눈이 동그래졌다.
“…그게 뭐예요?”
“뭐일 것 같아?”
“…요새 직장인들 스트레스받으면 컬러링북 같은 거 한다던데, 그거에 좀 더 진심인 버전…?”
지훈이 좀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뭐 그런 고상한 취미 생활도 나쁘지 않겠지만.
“<지팡이> 표지, 내가 그려 보기로 했어.”
“…<지팡이> 종이책으로 내려고요?”
아, 그러고 보니 지훈에게 말을 안 했구나.
지훈은 내가 완결 이후에 책을 내는 줄 알았을 거다.
“응. 한국 한정이지만.”
“음… 한국 한정이라.”
“일종의 특전 선물이지.”
“그거 캔버스예요? 제가 뜯어 봐도 돼요?”
“그래, 그럼.”
지훈 역시 그림에는 완전히 문외한이다.
캔버스 자체를 처음 만져 본다는 지훈은, 신나게 신문지를 모두 뜯어 버렸다.
“와… 크다.”
“크지. 여기에 가득 차게 그리려면… 나중에 물감이 모자랄 수도.”
“뭘 그릴지는 생각했어요?”
“응. 하융의 얼굴. 전체적으로 파란색과 회색을 주된 컬러로 잡아서… 피폐한 느낌과 신비한 느낌, 어딘가 희망적인 느낌까지 모두 드러내 보게.”
“형 이런 재주 있는 거 보면 진짜 신기해요. 언제부터 그릴 생각이에요?”
“일단 오늘은 소설을 마저 좀 쓰고, 내일부터 해 보려고. 당분간은 집필이랑 병행해야지.”
나는 바닥에 미술용품을 벼려 놓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거 집에 와서 보니 양이 꽤 된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디서 그리지?
결국 작업실인가.
지훈도 물끄러미 미술용품들을 보았다.
그리고 넌지시 내게 말했다.
“형, 요즘 날씨도 좋던데.”
“응?”
“이 빌라 옥상이랑 창고 비었잖아요.”
“그런데?”
“거기다 간이 화실이라도 좀 만들어 볼까요? 아무래도 집필 공간이랑은 분리가 되어야 할 것 같아서요.”
“…오! 그래 줄래?”
“뭐, 원한다면요?”
그 뒤로 난 몇 번이나 지훈을 치켜세웠다.
세상에 둘도 없는 매니저라는 둥, 송지훈 없이는 작가 생활도 못 한다는 둥.
지훈은 콧방귀도 안 뀌는 척했지만, 으쓱거리며 옥상으로 물건을 가지고 올라갔다.
옥상은 과연 아무도 쓴 흔적이 없었다.
이 건물엔 얌전한 입주민들이 많아서 그런지, 이 정도면 가벼운 청소 후에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창고에 좀 가 볼까요? 화실로 쓸 수 있나 봐요.”
“그래. 빛도 좀 들어와야 하고, 습기 문제도 있으니까.”
지훈과 나는 창고로 들어갔다.
그 안은… 생각보다 너무 괜찮았다.
커다란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직사광선.
물감이 마르기 적절한 온도와 습도.
약간 텁텁한 냄새가 좀 나긴 했지만, 유화 냄새에 비하면 댈 것도 아니었다.
“마음에 들어요?”
“아주. 딱 좋아.”
그렇게 나는 오랜만에 붓을 잡을 준비를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