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52화 (152/204)
  • 152회

    “표지로요?”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물론 표지는 종이책의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표지가 독자 반응을 바꿀 수 있나?

    ― 하융의 내면을 보다 확실하게 보여 주는 표지를 내거는 거요. 그러니까… 한국 독자들이 지금 하융의 비윤리적 행위에 집중하고 있다면,

    “….”

    ― 표지는 그의 그런 행위가 얼마나 복잡다단한 심리적 갈등 끝에 나왔는지를, 한 번 더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거지.

    “…아.”

    나는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꽤나 그럴듯한 아이디어란 생각이 들었다.

    하융의 복잡하고 극단적인 내면.

    소설로 풀어내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독자들의 윤리적 기대가 그 내면에 대한 집중을 방해할 뿐.

    이런 때에 이미지를 통해 시각적인 자극을 준다라….

    해 볼 만할 일이다.

    지금 하융에게 이입하고 있는 이들도, 표지를 소설의 연장선상으로 바라볼 테고.

    ― 어떤가요? 괜찮다면 내가 이준환 편집위원에게 말해 볼 생각인데.

    “굉장히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가능한 한 빠르게 진행해 보죠.”

    ― 좋아요. 일단 최고의 일러스트레이터를 구해 봐야겠구만.

    그때였다.

    불현듯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스쳐 갔다.

    “저기, 편집장님!”

    ― 음? 뭐요?

    “가능하면 제가… 시안을 그려도 될까요?”

    ― 뭘 말이오?

    “제가 생각한 하융의 이미지가 있으니까요. 그걸 시안으로 드려 보고 싶어요.”

    ― 아하.

    잠시 침묵이 흘렀다.

    ― 지금은 상당히 중요한 시기라…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썩 내켜 하지 않는군.

    자연스러운 반응이기도 하다.

    그는 내가 그림을 그릴 줄 안다는 사실을 모를 테니.

    또, 알고 있다 해도 책 표지를 만드는 일은 차원이 다른 작업이다.

    하지만 나는 해보고 싶었다.

    한국 독자들의 성향을 채 파악하지 못하고 벌인 전개.

    그에 대한 책임이라면 책임이랄까.

    ― 사실 작가가 표지를 그리고 싶어 하는 경우가 왕왕 있긴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결과물이 썩 좋지 않아서요. 그럼 피차 곤란해지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고….

    “시안을 보시고 적절하지 않다 생각되시면 안 쓰셔도 됩니다. 부담 갖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이 작가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그럼 일단 빠른 시일 안에 한번 시안을 보내 주시오. 나도 디자인 팀에게 말을 해 놓긴 할 테니.

    * * *

    표지로 하융의 내면을 한 번 더 설명해 보자는 계획.

    사실 그 계획이 통하는지의 여부를 떠나, 책 표지가 필요하다는 건 변함 없는 사실이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원고는 어느 정도 비축분이 있으니.

    당장은 표지 시안에 매달려 볼 생각이었다.

    무작정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건 멍청한 짓이다.

    먼저, 전문가를 찾아가야지.

    그것도 ‘인증된’ 전문가를.

    나는 바로 조인후 감독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 집>의 스토리보드는 어쨌건 내 이름을 나갔지만, 그 작업을 오로지 혼자 했던 건 아니다.

    조인후 감독이 사람을 붙여 줬기 때문이다.

    그는 프리랜서 디자이너이자 스토리보드 작가인데, 스토리보드 외에 상업디자인 프리랜서로도 활동한다.

    감각도 실력도 꽤 좋아서 많은 도움을 받았지.

    가능하면, 그 디자이너의 도움을 다시 받아 보고 싶다.

    한참 내 이야기를 듣던 조인후 감독은, 허허 하며 그 특유의 낮은 웃음을 지었다.

    “여론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곤 있었는데, 그런 일이 있었군요.”

    “네. 표지에 대한 생각은 어떤 것 같습니까?”

    “나쁘지 않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걸 위해 지금은 저와 계약한 디자이너가 필요하다, 이 말씀이죠? 아무리 프리랜서라도 말입니다.”

    민망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림이야 나도 그릴 수 있다.

    아니, 이 표지는 어쩌면 나만이 그릴 수 있는지도.

    하지만 상업 그림의 포인트에는 미숙한 게 사실이다.

    회화로 모든 걸 표현할 수 있다 해도, 표지는 반드시 어떤 부분에서 상업성이 드러나야 한다.

    물론 신라문학의 디자이너와 함께 합을 맞출 수 있다.

    그래도 그건 제2안.

    제1안은 어디까지나 검증된 이와 해 보고 싶었다.

    “스케줄이 차 있다면 조르지 않겠습니다. 당연히 제 개인적으로 보수도 드릴 생각이고요.”

    “허허… 농담입니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제 쪽에서 진행되고 있는 영화 작업도 없으니까요. 일단 그 디자이너에게 말은 해 보죠. 일이 있을 때만 출근하는 친구라, 제가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겠습니다.”

    “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날 밤.

    디자이너에게서 직접 연락이 왔다.

    그는 흔쾌히 날 도와주겠다고 말하며,

    장비 문제가 있으니 자신의 작업실로 와 달라 했다.

    장소를 가릴 계제가 아니었으므로, 나는 다음 날 바로 그의 신림동 작업실로 향했다.

    낡은 주택 한 칸에 마련한 작업실.

    디자이너가 워낙 젊은 청년이라 그런가.

    이 낡고 좁은 공간도 나쁘지 않았다.

    여기저기 걸어 놓은 그림과 예술품들과 어우러져 나름의 운치가 있었고.

    우리는 바로 작업에 돌입했다.

    나는 내가 어젯밤 스케치한 그림을 보여 줬다.

    하융의 얼굴이자, 내 과거의 얼굴.

    바싹 마른 얼굴에.

    공허한 눈동자.

    그리고 뭔가를 말하려는 듯한 입.

    사진 같은 얼굴이라기보단….

    우울감이나 저항감 같은 ‘감정’ 자체가 표현될 수 있는 방향의 스케치.

    그는 그 스케치를 받아 들었다.

    “음… 느낌 있네요. 그림 배우셨어요?”

    “젊었을 때 조금요.”

    “지금도 젊으신 것 같은데. 이 정도 스케치면 거의 전공자신데요?”

    그가 신기하다는 듯 웃었다.

    설명할 길이 없는 물음이라, 나도 그냥 웃어넘겼다.

    “색감은 표현 안 하셨네요?”

    “일단은 스케치만요. 색감은 디자이너님과 같이 생각해 보려고 했죠.”

    “음… 그럼 일단 컴퓨터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손을 좀 볼게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처음엔 잘 몰랐다.

    그런데 그가 태블릿 펜을 잡자, 비로소 이해가 됐다.

    그는 대단히 빠른 속도로 내 스케치를 피시에 옮겨 그렸다.

    내가 살리고 싶은 부분을 귀신같이 포착해서.

    연필 스케치와 디지털 펜화의 느낌은 확연히 달랐다.

    연필의 느낌이 사라진 그림은 조금 허전하달까.

    “이 그림 자체는 좋아요. 표현도 적절하고. 하지만 상업 그림은 좀 더 자극적인 게 필요하거든요. 첫째는 색감이 있겠고, 둘째는 표현법이에요.”

    “상업 그림의 포인트군요. 제가 모르는.”

    “네. 아마 모르실 거예요. 이를테면….”

    그는 하융의 얼굴을 보다 각지게 표현했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모두 없앴다.

    마치 뭉크의 ‘절규’가 생각하는 얼굴.

    “독자들이 익숙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기시감을 주면서도, 표현을 끝까지 해 주는 거죠.”

    “표현을 끝까지 해 준다는 건, 보다 확실하게 이미지를 드러내라는 거겠죠?”

    “맞아요. 그 이유는…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미술 평론가가 아니라 대중이기 때문이에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글을 쓸 때와 비슷한 논리구나.

    전문가들은 그림의 숨겨진 의미를 금방 찾아낸다.

    ‘잘 숨기는 것’이 작가의 역량이라 생각하고.

    하지만 대중은 다르다.

    그들은 숨겨 놓은 것을 찾아내는 재미보다는, 한눈에 ‘알아채는 것’을 즐긴다.

    나아가 알아채야만 책을 집고 계산을 한다.

    즉, 감각적이고 직설적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뜻.

    ‘책’이라는 ‘물건’을 팔아야 하는 이미지인 ‘표지’.

    이 표지 예술은 반드시 대중의 기호에 맞춰야 한다.

    “어때요? 납득이 가세요?”

    “충분히요. 좋네요. 더 고칠 데가 있을까요?”

    “어?”

    “…?”

    디자이너가 의외라는 듯 날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이 또 의외라서 그를 마주 봤다.

    “왜 그러세요?”

    “…신기해서요.”

    뭐가?

    “사실 상업 디자인 하다 보면 오늘처럼 책 표지 디자인 일도 들어오거든요. 그런데 전 사실… 음… 이 일을 썩 내켜 하진 않아요.”

    “…그래요?”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이 얘길 왜 하는 거지?

    표지 디자인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건가?

    “작가분들은 저랑 똑같이 뭔갈 표현하는 분들이시잖아요. 그래서 그분들께서 원하시는 표지도 비교적 확실하거든요. 혹은 표현하고 싶은 느낌이 있거나. 그런데 대부분 그 ‘니즈’가 상업 그림이랑 안 맞는 경우가 많아요.”

    “아무래도 그렇죠. 그림을 배웠다고 해도 상업 디자인을 배우진 않았을 테니.”

    한 마디로, 비전문가란 소리다.

    물론 나 역시도.

    그러니 이 디자이너를 찾아온 것이고.

    디자이너는 손가락을 탁 하고 경쾌하게 튕겼다.

    “바로 그거예요.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난감해지는 건… 바로 저고요.”

    “하하… 작가들이 말을 잘 안 듣죠?”

    “네. 자신의 그림이 왜 표지에 적합하지 않은지, 왜 수정을 해야 하는지 대부분 이해를 못 하시거든요. 제가 수정을 하겠다고 하면 기분 나빠하시는 분들도 굉장히 많아요. 또, 책이 적게 팔리면 표지 탓을 하는 분도 종종 있고요.”

    그건 어쩌면 작가의 기질일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표현의 욕구가 강한 직종이니까.

    하지만 본질적으로 표지는 상업적이어야 한다.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결국 손해 보는 건 자신일 텐데.

    “아무튼… 이렇게 시원스럽게 일이 진행된 게 정말 오랜만이라서요.”

    “디자이너님을 찾아온 것 자체가 믿고 맡긴다는 뜻이니, 잘 수정해 주세요.”

    “넵. 그렇게 하죠.”

    그는 아주 진지한 태도로 그림을 손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정을 할 때마다, 왜 그런 수정이 들어가야 하는지 성실하게 설명했다.

    그렇게 수월하게 시안 스케치가 완성될 때였다.

    “자, 그럼 이번에는 채색에 들어가 볼게요. 사실 이 그림의 색감은 원색에 가깝게 갈수록 좋을 것 같아요. 음… 너무 설득력 없는 색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작가님이 원하시는 대로 갈 수 있겠고요.”

    “그럼 바탕은 파란색 어떨까요? 샤갈처럼.”

    “좋죠. 인물화에서 푸른색 배경은 많이 쓰여요. 인간의 복합적인 정신세계를 드러낼 때 특히요.”

    그는 그렇게 배경에 파란색을 깔았다.

    ‘샤갈’이라는 지시어가 있었기 때문일까.

    맑은 듯하면서도 어딘가 어두운, 오묘한 색감.

    그런 색감을 잡아내는 디자이너를 보니… 엉뚱하게도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손이 근질근질하다고 해야 하나.

    색을 조합하고 덧입혀 가는 과정.

    그 과정의 즐거움을 나 역시 잘 알고 있으니까.

    그때였다.

    어디선가 나지막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디자이너의 벨소리였다.

    그는 태블릿 펜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집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전화라서요.”

    “네, 괜찮아요. 받으세요.”

    그는 전화를 받았다.

    “어, 엄마. 나 일하는 중… 어? 엥? 왜?! 어?… 아, 알았어! 지금 갈게.”

    전화를 끊은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무슨 일 있어요?”

    “아… 어머니가 계단에서 미끄러져서 응급실에 가셨다고 해서요. 너무 죄송해서 어쩌죠? 지금 제가 병원에 좀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이 그림은….”

    나는 얼른 그가 일어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줬다.

    “얼른 가 보세요. 색은 제가 생각해 볼 테니.”

    “하, 하지만… 내, 내일 같이 해요. 아니면 오늘 밤에라도….”

    “그런 얘긴 나중에 하고 얼른 가 보세요.”

    나는 그가 불편하지 않도록 얼른 나갈 채비를 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더니, 지금까지 작업한 시안을 출력해서 내게 줬다.

    “죄송해요. 그럼 작가님께서 색감을 먼저 잡아 보시고, 제게 연락 주세요.”

    “네. 그렇게 할게요.”

    우리는 그렇게 급하게 헤어졌다.

    그가 택시를 타고 가 버린 후.

    나는 시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 * *

    집으로 돌아온 후.

    나는 시안을 작업실 책상에 고이 모셔 두었다.

    색을 정하는 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내가 표지를 아예 ‘그려 버리고’ 싶다는 거지.

    …그래도 일단, 본업에 집중해야겠지.

    괜한 충동일 수도 있으니.

    나는 칠판 앞에 가서 섰다.

    복잡한 인물 구도와 스토리 전개.

    그 사이에 동그라미 친 단어가 있었다.

    바로, 지금 진행해야 할 이야기의 키워드.

    ‘하융의 스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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