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44화 (144/204)

144회

“연재를 바로 시작하라고?”

나는 지훈에게 되물었다.

지훈은 안 그래도 술을 한잔해서 그런지, 조금은 격양되어 있었다.

“첫 부분의 느낌이 너무 좋아서요. 이 하융이라는 아이에 대한 몰입도도 좋고요.”

“흠….”

“오늘 스터디에서 형이 소설 연재할 거란 얘기도 해 놨어요. 지금도 평론가들이 우리 홈페이지 열심히 들락거리고 있을걸요?”

지훈은 어서 이 작품을 내보이고 싶어 안달이 났다.

적어도 아직은 걸리는 부분은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픽 웃었다.

“아직 제목도 안 정한 소설을 어떻게 올리냐.”

“아, 제목! 그건 생각 못 했네.”

지훈은 술기운에 헤헤 웃었다.

이 녀석 대체 얼마나 많이 마신 거야?

“제목만 정하면 바로 올려도 상관없긴 해, 나도.”

“그럼 얼른 지어 버리죠.”

그렇게만 되면 나도 참 좋으련만….

“앞으로 몇 달이나 붙잡고 고생할지 모르는 소설이야. 대충 지을 순 없어. 일단….”

“….”

“‘팀 이상’ 회의 한번 해야겠는데?”

* * *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회의는 소집됐다.

위치는 대한외대 앞 금홍이 일하는 카페.

다음 파트타이머와 교대를 하고 온 금홍은, 두 개의 케이크를 가져왔다.

“자, 서비스예요.”

“오! 감사해요, 금홍 샘.”

지훈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자리에 앉은 금홍에게 물었다.

“안 사 주셔도 되는데… 카페 일 힘드시지 않아요?”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몸 쓰는 일이 머리 환기하기도 좋거든요.”

그 말은 이해가 됐다.

나도 종일 글을 쓰면 밤에라도 한두 시간씩 자전거를 타곤 하니까.

머릿속 가득한 상념 아닌 상념이랄까.

그런 걸 한 번씩 비워 내고 나면, 새로운 영감이 떠오르곤 한다.

“자, 그럼 원고를 한번 같이 볼까요? 전 이 소설을 전체적으로 3부로 나누기로 했어요. 지금 보는 건… 1부의 극초반에 불과하다는 걸 염두에 두고 봐 주세요.”

내 말에 두 사람이 원고를 펼쳤다.

딱히 내용을 상의할 일은 없었다.

우리의 회의는 어디까지나 ‘번역’을 위한 거니까.

하지만 난 금홍에게 물었다.

“금홍 샘은 이 소설 어땠어요?”

“네? 저요?”

금홍이 당황하며 되물었다.

‘감히 제가 어떻게…’란 말을 써놓은 것 같은 얼굴.

하지만 내게 필요한 건 금홍과 같은 일반 독자의 반응이다.

그녀는 대단히 신중하게 말했다.

“일단은 안타깝죠. 안정적인 부모를 상실한 아이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편으로는?”

“되바라졌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되바라졌다.

얄밉고, 지나치게 똑똑하다는 뜻이었다.

어렸을 적의 나를 생각하면… 틀린 말도 아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직 어린 애에 불과한데, 세상에 대한 정의를 내리잖아요. 부모 없는 어린애는 불행하다. 그러니 어서 어른이 되어야겠다. 이런 식으로요.”

“저도 그런 생각 들었어요, 형. 막말로 어린애 주제에 세상의 진리에 통달한 척하다니… 벌써부터 어른 흉내를 내고 있잖아요. 물론 환경적인 영향이 크겠지만.”

지훈이 그렇게 말하고선 케이크를 한입 먹었다.

금홍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그렇게 되바라져서… 더 슬픈 데가 있더라고요.”

“….”

“상처받은 어린애가 철이 없어야 할 시절을 박탈당하고, 어쩔 수 없이 어른이 된 거니까요. 차라리 계속 철도 없고 눈치도 없었으면 덜 슬펐을 것 같은데.”

어딘지 숙연해진 분위기.

잠시 침묵이 흘렀다.

금홍의 감상은 정확했다.

소설에서 다소 변주를 주며 표현하긴 했지만… 내 어렸을 적의 내면은 ‘애어른’과 다를 바 없었다.

좋건 싫건, 그게 소설에 반영이 된 모양이지.

그렇다면….

“그 점을 잘 살려 주세요, 번역에서.”

내 말에 금홍이 펜을 들었다.

그리고 더 말해 보라는 듯 눈을 빛냈다.

“하융의 되바라진 느낌과 그 이면에 배어 있는 슬픔이요.”

“흠… 어려운 작업이겠네요.”

“그런가요?”

“네. 영어는 확실한 언어거든요. 간단명료하고. 되바라짐과 슬픔이 사실 공존하기 어려운 감각인데, 그걸 동시에 드러내야 하니….”

금홍은 빨간 펜으로 메모한 내용을 동그라미 쳤다.

“피터 한 교수님과 심도 있는 논의를 해 봐야겠어요.”

그녀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피터 한은 꽤 큰 신임을 얻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 이 두 사람이 없었다면 이 소설의 번역 작업은 큰 난항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회의를 이어 갔다.

긴 회의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문장 자체가 어렵거나 복잡하진 않았으니.

그렇게 본문 회의를 끝냈을 때였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지훈이 입을 열었다.

“형, 이 소설… 분위기가 좀 중요한 것 같지 않아요?”

“중요하지. 현재가 아니라 1910년대잖아. 무조건 이 풍경 속으로 독자들을 빠져들게 만들어야 해. 지훈이 네가 보기엔 어떤데?”

“이 원고 자체로는 훌륭해요. 그 시대를 완벽하게 구현해 놓은 느낌이에요. 그런데 이게 번역 과정에서 잘 살아날 수 있을까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한국인인 금홍이 모든 번역을 한다면 모를까.

혼혈인인 피터 한이 그 분위기를 영어로 완벽히 구현하기 어려울지도.

“금홍 샘.”

“네, 혜경 샘.”

“얼마가 됐건 비용은 다 지원해 드릴 테니, 1910년대 분위기를 알 수 있는 모든 시청각자료를 피터 한 교수님께 드려야 할 것 같아요.”

물론 피터 한은 싫어하겠지.

하지만 그를 설득하는 것도 해야 할 일이었다.

금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 부분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저도 보긴 해야 하니까.”

“네. 중요한 부분이니 꼭 부탁드려요. 그 분위기를 살리는 것에 번역의 승패가 달렸다고 전달해 주시고요.”

“물론이죠. 피터 한 교수님도 모르지 않으실 거예요.”

그렇게 금홍이 또 한 가지를 체크.

나는 지훈에게 물었다.

“지훈아, 이 분량이면 몇 화 정도 나올 것 같아?”

“음… 요즘 사람들은 긴 글 호흡을 따라가기 어려워해요. 좀 짧게 친다고 생각하면, 못해도 4화는 나오지 않을까요?”

4화.

퇴고하다 보면 5화가 될 수도 있겠고.

이 정도면 시작해 봐도 좋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제목을 정해야겠네.”

내 말에 두 사람은 살짝 긴장했다.

정말 중요한 순간을 목전에 뒀다는 걸, 느끼는 듯.

지훈이 조심스레 물었다.

“생각해 둔 것 있어요?”

“느낌만. <실족>과 의미적으로 연결이 되되, 간단명료했으면 좋겠어. 해외로 나갈 걸 염두에 두면 구절의 형태보다는 단어의 형태가 나을 것 같고.”

“음… ‘실족’이란 건 뭔가에 걸려 넘어진다는 뜻이죠?”

금홍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단편 <실족>과 이 소설의 차이가 뭐예요?”

그 질문에, 나는 살짝 멈칫했다.

<실족>을 기반으로 내 이야기를 풀어내기만 했지,

그것의 본질적인 차이를 정의해보진 않았던 것이다.

<실족>이 내 전생의 일부라면.

이번 소설은 전생과 이번 생이 뒤섞인, 새로운 ‘나’이자 내 삶의 희망 사항이기도 하다.

굳이 말하자면 <실족>보다 좀 더 나아간 이야기.

“역사를 모른 척했던 인간이 역사에 걸려 넘어지는 이야기가 <실족>이었다면….”

“….”

“지금 쓰려는 소설은… 실족을 하고도 절뚝이며 걸어가는 내용이 될 거예요.”

역사를 거스를 순 없다.

결국 역사에 걸려 넘어지는 건 식민지인의 운명이다.

문제는 넘어진 후,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거다.

전생의 나처럼 쓰러져 죽어 버릴 수도, 지금의 나처럼 다시 일어나 걸을 수도 있지.

역사도 운명도 아닌 스스로를 의지한 채.

한 발 한 발.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내뱉었다.

“지팡이.”

“…!”

“…!”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날 바라보았다.

“그거… 지금 생각한 제목이에요?”

지훈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때? 실족의 상처가 있는 절름발이에게 필요한 거 아니겠어?”

“…느낌 정말 좋아요. 영어로도 The Cane. 명료하네요.”

금홍이 Cane이란 단어를 여러 번 중얼거렸다.

나는 ‘지팡이’라는 말이 대단히 마음에 들었다.

절름발이나 다름없던 내 전생.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그때 가장 필요했던 건, 내 팔자를 바꿔 줄 행운이나 기적이 아니었다.

그저 내 느린 걸음을 지탱해 줄 하나의 지팡이.

내겐 그런 지팡이가 필요했구나.

나는 이제야 그런 생각을 해 보는 것이었다.

* * *

피터 한 교수의 연구실.

언제나 어딘가 불쾌한 듯한 피터 한이지만… 근래 들어 이런 짜증은 처음이었다.

어제 금홍이 두고 간 이상의 원고 <지팡이>.

그리고 그 몇 배는 될 자료들.

금홍은 이것들을 가져다주며 이렇게 말했다.

― 작가님이 교수님께서 1910년대를 이해하고 번역에 들어가시길 바라셔서요. 필요한 자료를 추려서 가져왔습니다. 초벌 번역도 끝났으니, 잘 살펴봐 주세요.

만약 금홍이 그가 아끼는 제자가 아니었다면, 그는 자료고 나발이고 번역을 취소했을 거다.

‘감히 이 피터 한에게 자료 공부를 하고 번역에 들어가라고? 내가 대학원생으로 보이나? 필요한 공부는 내가 알아서 한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가 그렇듯… 그도 결국 호기심에 분노가 완패를 했다.

욕을 하면서도 초벌 원고를 검토했을 땐.

‘그저 근현대 조선일 뿐이잖아. 조금 예스러운 어휘를 자연스럽게 사용한… 소설은… 뭐, 좋네.’

금홍이 갖다 놓은 시청각 자료를 읽고, 봤을 땐.

‘흠… 생각보다 생소한 분위기네. 내가 반쪽짜리 한국인이라 그런가? 묘한 이질감이 느껴지는군.’

그리고 그 자료를 익힌 후 다시 원고를 봤을 땐.

‘…왜 자료를 같이 줬는지 알 것 같군.’

이상의 계획에 완전히 수긍해 버린 피터 한이었다.

피터 한은 비로소 이상이 무엇을 썼는지 알 것 같았다.

그저 한국의 근현대사를 표현한 풍경이 아닌, 그것을 생동감 넘치게 ‘살려 낸’ 글이었다.

<지팡이>를 읽고 있노라면, 자료에서 봤던 1910년도의 전경이 지나가는 듯했다.

그 풍경 외에도 소리와 냄새, 바람의 느낌까지.

이런 감각을 모르고 번역을 했다면, <지팡이> 특유의 분위기를 절대 살리지 못했을 것이다.

뼈대만 남은 재미없는 글이 됐겠지.

피터 한은 <지팡이> 번역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한 단어도 놓치지 않고 이 느낌을 살려 내고 싶었다.

물론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영어라는 언어와 한국어는 그 태생이 다르다.

태생이 다른 언어는 전체적인 느낌 역시 다르고.

한국어가 액체처럼 유동적이고 다중적인 느낌이라면, 영어는 고체처럼 딱 떨어지고 단일한 느낌이다.

그리고 그 차이를 줄이는 게 번역자의 역할.

피터 한은 마치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처음 번역자가 되기로 다짐했을 때의 열정.

<지팡이>는 그 열정에 다시 불을 당기에 하는 힘이 있었다.

결코 쉽지 않은 번역 작업이었지만,

그는 최선을 다했다.

필요한 경우에는 선배 번역가에게 연락을 하기도 했다.

그조차도….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하지?’

라는 궁금증이 생길 정도로.

그리고 머지않아 피터 한은 깨달았다.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뭔가 예견을 하고 있다는 걸.

그것을 깨달은 순간.

그는 멍한 얼굴로 원고를 내려다보았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연구실에 울렸다.

“이 작품은….”

그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계를 뒤흔들지도 몰라.”

유럽과 미국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일본 역시도, 그 여파를 피할 수 없겠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국인 한국이 이상을 재평가할 거였다.

그게 어떤 방향이 될진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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