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회
칠판도 달았겠다, 새 소설의 전체적인 구색을 꾸려 볼 때가 됐다.
지훈은 날 배려한답시고 작업실을 비워 줬다.
제 컴퓨터와 책상을 침실로 가져간 것이다.
구상을 할 때는 혼자 있는 게 좋지 않냐면서.
꼭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녀석의 말이 맞았다.
나는 지금 전에 없던 난항을 겪고 있었다.
소설을 세 부로 나눈 것까진 괜찮았다.
1부는 주인공의 탄생과 성장.
2부는 문학가로의 주인공의 삶.
3부는 주인공의 죽음.
문제는 ‘캐릭터’였다.
정확히 말하면 주인공의 ‘성격’과 ‘기질’.
처음에는 비교적 간단하게 생각했다.
그저 내 인생을 자서전처럼 풀어내면 된다고.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아니었다.
난 자서전이 아니라 ‘소설’을 쓰고 싶었다.
‘나’를 닮은 ‘허구의 인물’을 둘러싼 이야기 말이다.
응당 소설에 담겨야 할 ‘캐릭터’.
<실족>은 단편이니 캐릭터보단 사건이 중요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한 인간의 생애를 다룰 긴 소설.
캐릭터에 대한 고찰 없이는 불가능했다.
난 과거의 내 모습을 그대로 담고 싶을 뿐인가?
아니다.
그보다는 좀 더…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었다.
그렇다면 환생 이후의 내 삶을 그리고 싶은 건가?
아니다.
캐릭터의 근간은 어디까지나 내 전생에 있다.
이도 저도 아닌 것만 같은 마음.
생각하면 할수록 첩첩산중이었다.
“후우….”
나는 벌러덩 뒤로 누웠다.
그리고 희멀건 천장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계속 이렇게 있어 봤자….”
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사실 대충 답은 나왔다.
전생의 나와 현생의 나를 적절하게 뒤섞은 인물.
그러면서도 서스팬스와 미스터리를 담은 인물.
내게는 그런 ‘캐릭터’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렇게 누워만 있은 지 두 시간.
칠판에 적을 건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큰일이다.
“…문제가 뭘까.”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일단 머릿속을 비우자.
비우고, 다시, 근본부터 생각하자.
잠시 후.
가득 차다 못해 터질 것처럼 복잡한 머릿속이… 서서히 비워져 갔다.
인생, 고통, 전생, 현생, 삶, 의미, 가치….
이런 단어들이 모두 쓸려 나간 곳에 남은 건.
‘나’라는 한 글자였다.
그 순간, 나는 벌떡 일어났다.
뭔가 희미한 실마리가 잡혔다.
‘나’라는 인간을 가지고 소설을 쓸 거라면.
‘나’를 인간이라는 생명체로 봐선 안 된다.
소설 속에 넣을 ‘캐릭터’로 봐야지.
어떤 외모인지.
어떤 성격인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내가 인식하는 ‘나’에 기대면 안 돼.
‘나’를 관찰 대상으로 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작업은….
“절대 혼자 할 순 없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하얀 칠판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 칠판을 손끝으로 툭 쳤다.
“아직은 널 쓸 때가 아닌가 보다.”
작업실 밖으로 나왔을 때, 마침 지훈이 거실에 있었다.
녀석도 마침 쉬는 시간인 듯, 과자를 까먹으며 핸드폰으로 뭘 보는 중이었다.
나는 지훈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지금으로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지훈일 거다.
하지만.
“너도 아직 때가 아니야.”
지훈에겐 나중에 더 중요하게 물을 게 있다.
난데없는 내 말에 지훈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요?”
“아니야. 나 나갔다 올게.”
“어디 가는데요?”
“친구 만나러.”
“어… 형.”
지훈이 말했다.
“형, 저 말고 친구 없잖아요.”
나는 지훈을 찌릿 노려보았다.
저 진심인 듯한 표정이 열받는다.
뭐,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있거든?”
아주 없다고도 볼 수 없다 이 말이야.
나는 그렇게 집을 나섰다.
* * *
“아이고, 이 작가님~ 이 비루한 PD는 어인 일로 찾아 주셨습니까?”
강인춘 PD가 한껏 빈정거렸다.
여기는 강인춘 PD의 집 앞 선술집.
아니나 다를까, 작품에 들어가지 않은 강 PD는, 동네 백수 아저씨와 다를 바 없는 몰골이다.
따로 약속도 잡지 않고 갑자기 연락을 했건만.
그는 술 한잔하자는 말을 단번에 수락했다.
뭐, 그가 빈정대는 것은.
<그 집>을 드라마가 아닌 영화로 만들었기 때문이겠지.
그때는 괜찮다고 해놓고선.
아직도 가끔 이렇게 은근히 그때 일을 들먹인다.
“PD님 뵈려면 당연히 제가 와야죠. 드시고 싶은 거 다 시키세요. 제가 살게요.”
이렇게 비위를 살살 맞춰 주니.
“넌 나한테 술 세 번은 더 사야 해, 인마. 아줌마! 여기 주꾸미도 하나 추가해 주세요!”
또 신나게 안주 수를 늘린다.
“작품 들어가신 줄 알았는데.”
“이제 들어가. 이번 주가 내 마지막 휴가다.”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드라마는 시작하면 몇 달은 강행군이다.
그러니 일을 안 할 때는 이렇게 긴장이 풀려 있겠지.
“그래, <그 집>은 잘 만들었어?”
“아, 네. 시나리오 다 넘겼어요. 제 손 떠났죠, 이젠.”
“조나단 감독이랑 한다며?”
“그렇게 됐어요.”
“그래. 날 깠으면 그 정도 감독이랑은 해야지.”
“…PD님을 깐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드라마를 만들었어도 미국에서 제작했을 거예요.”
“그래, 잘났다.”
그는 내 술잔에 소주를 채웠다.
그리고 건배를 하자마자 홀랑 잔을 비웠다.
술이 들어가니 얼굴에 혈색이 돈다.
“좀 걱정되네요. 알코올 중독 조심하세요.”
“얼쑤. 그런 걱정도 할 줄 알았어?”
“…절 뭘로 보시는 거예요?”
“정이 넘치는 놈은 아니지.”
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얘기가 이렇게 흘러간 김에, 나는 내 신작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실족> 보셨어요?”
“…그게 뭐야?”
“…너무하시네요. 뉴스에도 많이 나왔는데. <갈림길>은요?”
“아, 그건 알아. 네 에세이잖아. <실족>은 뭐… 소설인가?”
“단편소설이요.”
“삐지지 마라. 나 원래 쉴 때는 인터넷 뉴스도 안 봐. 나중에 몰아 볼게.”
“뭐, 그게 당장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그럼 중요한 게 뭔데? 뭣이 중헌디?”
농담과 선문답을 넘나드는 이 대화.
나는 얘길 더 돌릴 것 없이 그에게 물었다.
“PD님.”
“왜?”
“제가 어떤 사람 같으세요?”
그의 얼굴에 딱 이 세 글자가 떠올랐다.
뜬금포.
신작을 쓰기 위한 첫 길.
바로 현생의 나를 캐릭터화하는 거다.
그다음엔 전생의 나를 캐릭터화할 거고.
환생 후 알아 온 사람들 중, 그나마 인간적인 이야기를 많이 나눈 사람.
그건 강인춘 PD였다.
그는 덥수룩한 수염을 슥슥 만졌다.
“장난으로? 진지하게?”
“진지하게죠.”
“대답해 주면, 그 대답 어디다 써먹으려고.”
그가 꽤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질문의 의도에 맞춘 답을 해 주려는 걸 거다.
하지만… 난 좀 더 날것의 대답을 원했다.
“말씀해 주신 다음에 설명드리면 안 될까요?”
“이 녀석, 또 무슨 일을 벌이는 거야?”
“별건 아니에요.”
나는 멋쩍게 웃었다.
강인춘 PD는 잠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술도 한잔하고, 그사이 나온 주꾸미도 집어 먹고, 동태탕도 한 숟갈 떠먹고.
그렇게 술상 곳곳에 손을 댄 후에야 한마디 했다.
“반골.”
“네?”
“반골 말이야. 몰라?”
반골의 뜻을 모를 리가.
권위나 관습에 비판하고 반항하는 기질이 아닌가.
이를테면 사회의 문제아 같은.
…그런가? 싶었다.
내가 순종적인 타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거칠게 뭔가를 타파하는 성격은 아닌데.
이목을 끄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제가 왜요?”
“넌 처음부터 그랬어, 인마.”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너, 처음에 드라마 쓴 것도 말이야. 반골이라면 반골이지. 순문학 판에서 드라마 한다니까 반응이 어땠어?”
“음… 비판적이기도 했죠. 등단까지 했는데 대중문학으로 길을 틀었다고.”
“맞아. 그런데 너 어떻게 반응했어?”
“…전혀 신경 안 썼는데요.”
“그게 반골이지. 남들이 가지 말라는 길 골라 가면서도, 남들 하는 말에 신경 하나도 안 쓰는 거. 네 ‘쪼’ 대로 해 버리는 거.”
들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또 있어.”
“또요?”
“너 처음에 등단했을 때, 수상소감에서 뭐라고 했냐?”
그것도 꽤 된 일이라, 가물가물한데.
강인춘 PD가 기억할 만한 일이면….
아, 혹시 이건가.
“한국 출판사에서 청탁 안 받겠다고 했죠.”
“그래. 어떤 미친 작가가 청탁을 대놓고 거절해? 그리고 네 홈페이지에 글 올렸잖아. 그것도 다 반골 기질이지. 체제나 사회가 너한테 제공해 준 시스템의 편의를 버리고 네가 원하는 바대로 이끌고 가는 거.”
“그런 게 다 반골 기질이라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반골이 맞네요.”
강인춘 PD를 만나길 잘했다.
현생의 나에 대한 귀한 캐릭터를 얻은 것 같았다.
반골.
마음에 든다.
아니, 마음이 간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래, 그래서 이런 질문은 왜 하는 건데?”
“이번에 소설을 새로 연재해 볼까 해요.”
“연재? 발간도 아니고?”
“네. 긴 연재소설이요.”
“길면 얼마나 긴데?”
“대하소설이요. 책으로 발간한다 하면… 몇 권이 될진 몰라요.”
내 말을 들은 강인춘 PD는 뭔가를 말하려다 삼켰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거리곤 내게 물었다.
“음… 뭐, 그래. 그런데?”
“주인공에 제 모습을 좀 투영하고 싶어서요.”
“오호.”
“그래서, 저를 좀 캐릭터화하는 방법을 찾는 중이에요.”
“좋은 태도네. 작품 속 인물은 캐릭터가 중요하니까.”
“도움이 됐어요. 한 잔 하시죠.”
나는 그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건배를 권하자, 그가 시원하게 잔을 부딪쳤다.
쨍, 하는 맑은소리가 났다.
슬슬 소설의 실마리가 보여서 그런지, 술도 달게 넘어갔다.
“역시 내 말이 맞는 것 같아.”
“네?”
“네가 하겠다는 연재소설 말이야.”
“네.”
“막말로 요새 누가 순문학으로 연재를 하니? 사람들 티브이 광고 보기도 지루해서 유튜브로 방송 보는 시대야. 그런데 하루에 한 편씩 올라오는 소설? 게다가 웹소설도 아니고 순문학? 망하기 딱 좋은 거 아냐?”
“하하… 그렇죠. 저도 그런 얘기 많이 들었어요.”
“그래도 할 거잖아.”
그가 결연한 말투로 말했다.
“…네, 할 건데요.”
“역시. 내가 괜히 너한테 반골이라 하는 게 아니야. 어떤 반골들은 권력을 잡거나 안정적인 자리에 올라가면 그 기질이 사라져버려. 정치도 그렇잖아. 젊은 신예 정치가들 하나같이 반골인 양 폼나게 굴지만… 권력을 잡으면 대부분 보수적으로 변하잖냐.”
그런 예를 들자면 수도 없이 많을 거다.
비단 정치뿐이겠는가.
학계, 문단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가도 그렇다.
등단작은 대단히 그로테스크하고 새로워도, 자리를 잡으면 급속히 뻔한 이야기를 생산하는 작가들.
그렇게 자기 색을 잃어 가는 경우를 많이 봐 왔다.
“하지만 넌 지금 한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작가잖아. 그런데도 네가 연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 연재로 밀고 나가는 거 아냐. 장편 소설조차도 점점 짧아지는 문학계의 흐름을 거스르고.”
흐름을 거스른다… 기보다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거죠. 사실 대하소설을 쓰고 싶은데, 책으로 내면 아무도 안 볼 테니까. 그래서 연재라는 방법을 선택한 거고요.”
‘대하소설’이란 말에 강인춘 PD는 살짝 놀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나를 말리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대신 내 어깨를 한 대 살짝 쳐 주었다.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서 말이야. 맞지?”
“…그거야, 그렇죠.”
“그래. 바로 그 정신이야. 아무튼 잘해 봐라. 응원한다, 반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