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회
그래도 명색이 ‘팀 이상’.
맥주를 좀 마시다 보니, 어색한 것도 사라졌다.
금홍은 평소와 다르게 재잘재잘 떠들었다.
술기운도 술기운이거니와, 조나단 감독과의 회의도 잘 끝났으니, 긴장이 풀렸겠지.
“샘은 내일 강연가시죠?”
“네. 도청으로 가야 해요.”
“멋지다― 도청에서 강연이라니. 도쿄 도청이면 시청이잖아요.”
“금홍 샘도 멋져요.”
금홍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회의, 금홍 샘 없었으면 힘들었을 거잖아요.”
빈말이 아니었다.
영어만 잘 한다고 통역을 하는 게 아니다.
작품에 대한 이해가 기반이 되어야, 감독과 작가의 말속 함의까지 전할 수 있으니 말이다.
금홍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낑낑대며 창문을 열었다.
“좀 덥지 않아요?”
라고 안 해도 될 말까지 덧붙이면서.
저러는 걸 보니 좀 귀엽기도 하고.
“큼… 그나저나, 소설은 쓰고 계세요? <갈림길>을 소설화한다고 하셨잖아요.”
“아직이요. 시나리오 때문에.”
“아….”
“하지만 이제 써야죠. 쓸 이야기는 준비해 놨어요.”
“여전히 경성의 지식인에 대한 이야기예요?”
“네. 그가 일본인이 될 뻔한 사건이죠. 그리고….”
이건 아직 그 누구에게도 말 못 한 계획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쉽지 않은 모험이기에.
하지만 금홍이라면, 날 응원해 줄 것 같았다.
“만약 그 단편 소설이 잘 되면요.”
“네.”
“같은 이야기로 긴 소설로 연재를 해 보고 싶어요.”
“장편으로요?”
“아니요. 더 긴 연재소설요.”
“연재소설? 정말요?”
금홍은 적잖이 놀랐다.
그럴 법도 하지.
지금 에세이를 단편으로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걸 또다시 연재소설로 만든다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하소설이죠.”
대하소설.
어쩐지 예스러운 느낌이 나는 단어이긴 하지만… 개념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이 순문학이건 판타지건 장르 소설이건, 한 인간의 생애를 몇 권에 걸쳐 다루는 작품.
그런 작품을 ‘대하소설’이라고 하니까.
“꽤 오래 생각하고 결정한 일이에요. 제가 쓰고 싶은 그 내용이… 단편으로 담을 만한 규모가 아니거든요.”
난 맥주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제가 생각한 내용의 ‘일부분’을 단편 소설로 구현하고… 그 반응이 좋으면, ‘전체’를 대하소설을 써 볼 생각이에요.”
“대체 뭘… 쓰고 싶으신 건데요?”
뭘 쓰고 싶냐고?
전생의 내 인생.
난 그걸 쏟아붓고 싶었다.
남들은 모르는 내 자전소설이라 할 수 있겠지.
“금홍 샘한테 처음으로 말하는 거예요. 지훈이한테도 비밀이에요.”
“지훈 샘한테는… 왜요?”
“반대할 게 뻔하거든요.”
금홍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피식 웃고는 솔직하게 말했다.
“막말로, 요즘 누가 순문학을 연재소설을 읽겠어요. 위험부담이 큰 작업이에요.”
“하긴. 저도 그런 식으로는 소설을 읽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연재소설이 잘 쓴 대하소설이 된다면….”
“….”
“한 작가의 대표작으로 남죠. 단편보다는 장편이, 장편보다는 대하소설이 작가의 저력을 드러내 주니까.”
그러니까 이 결정은 내 나름의 중요한 모험이자, 도약의 시도였다.
1930년대에 ‘이상’의 대표작이 <날개>였다면.
2020년대의 ‘이상’의 대표작은… 지금부터 만들어 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걸 만들기 위해서는, 지훈과 금홍 등 내 주위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만약 일이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금홍 샘도 바빠질 거예요.”
“번역 때문에요?”
“맞아요. 비교적 긴 시간을 연재에 매달려야 할 테니까요. 그럼 그 시간에 금홍 선생님도 계속 번역을 해 주셔야 할 테고요.”
“그런 건 걱정 마세요.”
금홍이 야무지게 말했다.
“혜경 샘 작품 번역은 저한테 1순위 일이에요. 꼭 해 드릴테니… 좋은 작품 쓰셨으면 좋겠어요.”
1순위.
기분 좋은 말이었다.
“고마워요, 금홍 샘.”
금홍이에게 먼저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내게 응원과 힘이 되어 주는 사람이니까.
금홍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술을 좀 마셔서 그런가, 나도 금홍이도 얼굴에 열이 올랐다.
* * *
도쿄 도청에서 강연이 있는 날이다.
나는 강연 시간보다 조금 더 이르게 도청을 향했다.
금홍은 데려오지 않았다.
말 안 통할 일도 없을뿐더러… 아는 얼굴 앞에서 강연을 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니.
도청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친절하게 나를 맞았다.
그들은 나를 강연회장 옆 대기실로 안내했다.
그들은 주로 히루키 작가와의 친분에 대해 말했다.
일본 작가와도 잘 어울리지 않는 히루키가 호감을 보인 한국 작가.
그것만으로도 그들의 호감을 사기엔 충분했다.
“아무리 무료 강연이라 하지만, 티켓 오픈을 하자마자 좌석이 꽉 찼습니다. 이상 작가님에 대한 일본 독자들의 관심이 이렇게 큽니다.”
행사 관계자가 껄껄 웃었다.
덮어놓고 칭찬을 던지는 모습이 썩 편하진 않아서, 나는 어색한 미소로 일관하고 있었다.
“아, 작가님. 강연 주제는 뭐로 하실 예정이십니까?”
올 것이 왔군.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역사와 소설에 대해 말해 볼 생각입니다.”
“아… 아하… 그렇군요.”
그의 얼굴에 두 가지 감정이 스치는 듯했다.
첫째, 일본인들이 썩 좋아하지 않는 주젠데.
둘째, 한국 작가란 역시 어쩔 수 없나.
마침 한 관계자가 시계를 봤다.
“이크, 시간이 됐습니다. 이제 슬슬 강연장으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요?”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나를 강연장까지 안내했다.
강연장 뒷문 앞에서 그들은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아까 미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던 관계자.
그는 의미심장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럼, 기대하겠습니다. 강연.”
“네. 기대해 주시죠.”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후.
의심과 우려가 섞인 얼굴로 돌아섰다.
나는 문을 열고 강연장으로 들어섰다.
단상 쪽에 난 문이라서, 객석을 바로 살펴볼 수 있었다.
커다란 도청 강연회장이 가득 차 있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여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이국 작가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이 가득했다.
나는 단상에 올라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상입니다.”
얌전한 박수가 흘러나왔다.
내가 일본어를 잘한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
그들은 이제 그 점에 그리 놀라지도 않았다.
나는 몇 마디 농담 섞인 이야기로 분위기를 풀었다.
그리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갔다.
“얼마 전. 제가 에세이 한 편을 썼습니다. 독일에서 발간된 글이었죠. 이차 세계대전 피해국 지식인들의 심리를 다룬 글이었습니다.”
강연회장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 정도야… 예상했다.
하지만 이 침묵 역시 언젠간 맞이해야 할 독자들의 반응이었다.
지금 눈앞에 앉아있는 이들도 결국 내 독자들이니까.
“많은 이들이 그 에세이를 일본에서 발간하는 걸 말렸습니다. 일본 독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는 거죠. 그래서 전 받아들였고, 에세이를 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도마크 출판사와의 일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이 결정,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물었다.
여기저기서 대답이 튀어나왔다.
“잘 하셨어요.”
“저라도 그랬을 것 같아요.”
사람들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실렸다.
불편한 걸 보지 않아도 된다는 안심.
결정을 내려 준 나에 대한 고마움.
그런 감정들이 언뜻언뜻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미소들을 보자, 강연 요청을 받아들이기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그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저는 방법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에세이가 아닌 소설을 통해 제 이야기를 전달하는 거죠.”
객석이 웅성거렸다.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나는 다시금 정리해서 말했다.
“저는, 이차 세계대전의 피해국 지식인의 심리를… 소설로 표현하여 발표하고자 합니다. 그 소설이 일본에 발간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사람들은 이제 노골적으로 웅성거렸다.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지, 그리고 대체 왜 그 이야기를 지금 여기서 하는 건지.
그들은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나아가 그들은 심기가 불편해진 듯, 얼굴을 찌푸렸다.
조금 전까지 내게 보여 준 미소 같은 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딱 내가 예상한 그 반응이었다.
나는 칠판에 이렇게 적었다.
‘불편함’
“역사란, 본래 불편한 기록입니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들은 가만히 칠판의 글자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듯했다.
“특히 전쟁이나 침략이 있던 경우, 역사는 그 후손까지도 불편하게 만들죠. 가해국이나 피해국 모두에게. 그 이유가 뭘까요?”
사람들은 대답이 없다.
“역사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해석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피해국에겐 돌이켜보고 되짚어야 할 숙제 같은 것이 바로 역사고, 가해국에겐 외면하고 무마해야 할 것이 바로 역사거든요. 그 어느 쪽에게도 편하지 않습니다. 걸리적거리고, 귀찮죠.”
역사는 결코 편하지 않다.
그것이 역사의 본질적인 성격이다.
“하지만 이 불편함의 성질이야말로 소설과 맞닿아 있죠.”
사람들의 시선이 적대감에서 호기심으로 뒤바뀐다.
그들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역사와 소설이 닮았다고? 어떤 점에서?
역사는 ‘진짜’ 있던 일이고, 소설은 ‘가짜’로 만들어진 일이잖아.
여기서, 그들이 간과한 게 있다.
“이런 말이 있죠.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는 말. 맞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일어난 많은 일들 중, 기록하여 역사로 남길 요소를 고르는 건 주로 권력층이나 싸움의 승자거든요. 승자가 편집한 사실로 이루어진 역사… 완벽한 ‘진짜’라고 할 수 없죠. 이번엔 소설을 볼까요? 소설은 가짜지만, 우리의 진짜 삶을 떠올리게 합니다. 한 마디로 ‘진짜를 추구한다’고 할 수 있죠. 이렇듯, 역사와 소설은 모두 진짜와 가짜가 혼재된 개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소설과 역사의 공통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불편함….”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아마 감각적으로 알았으리라.
“네. 맞습니다. 바로 불편함이죠. 역사부터 살펴볼까요? 한일의 근현대사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버릴 기억,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그런 것들을 기록하여 후손들을 불편하게 하는 게 역사의 본질적인 역할이죠.”
“그럼 소설은요?”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 남자가 물었다.
대학생인 듯한 그는, 나를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소설의 본질은, 가려진 것을 보여 주는 겁니다. 우리가 모르고 지나갈 것들, 시간이 지나면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 그런 것들을 은유와 상징, 이야기를 통하여 남겨 두죠. 편한 이야기는 소설로 남기지 않아요. 그런 건 적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이 알아서 기억하거든요. 소설이 캐치하는 건 대부분 불편한 이야깁니다. 적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이야기, 거기에 소설의 본질이 있어요.”
강연회장에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결국 역사와 소설의 교집합이 있다면… 그건 불편함을 ‘기억’하게 하는 힘이라고요.”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이야기를 왜 기억해야 하는데요? 사람들 마음만 불편하잖아요.”
객석에서 누군가 물었다.
저런 질문, 그러잖아도 기다리고 있었다.
“네, 불편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불편함을 직시하지 않으면 더 불편한 일들이 반복되기 마련이라는 점이죠. 전쟁의 역사를 직시하지 않으면 또 다른 전쟁이 쉽게 일어나는 것처럼요. 소설도 마찬가집니다. 인정하기 싫은 불편한 인간의 모습. 그 모습을 직시하지 않으면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 그 행동을 반복하게 됩니다. 아니, 사실은 알아도 반복하죠. 그게 인간이니까요. 하지만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건 다른 문제죠.”
사람들은 오묘한 표정을 날 보았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이도, 여전히 날 노려보는 이도 있었다.
“문학은 독자가 일상에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인식을 확장시켜야 합니다. 그걸 인식적 충격이라고도 하죠. 그게 아름다움이건, 슬픔이건, 기쁨이건… 죄책감이건.”
그 ‘죄책감’에 대해선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이들도 모르지 않을 테니.
다만 불편해서 외면하고 싶을 뿐.
강연 시간이 거의 다 끝나 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럼 강연은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다음엔 보다 불편한 작품으로 찾아뵙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