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회
도쿄의 신주쿠 거리.
이 거리를 선택한 건 조나단 감독이었다.
비즈니스 이야기를 하기에는 좀 정신없는 곳이지만,
일단은 예약을 했다는 일식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신주쿠 거리를 걷는 금홍은 번듯한 회사원 같았다.
들고 있는 노트북 가방 때문이었을까.
“혜경 샘, 긴장되지 않아요?”
“글쎄요. 회의는 자주 해 봐서요. 금홍 샘 긴장돼요?”
그렇게 물을 것도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으니.
통역이 처음이라 그런 걸까.
“저번에 줌으로 회의할 땐 통역 잘 하시던데요.”
“그때도 사실 엄청 떨었어요. 다른 것보다….”
것보다?
“흑인 발음은 좀 특이한 데가 있거든요. 말의 멜로디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한국 교육 과정에서 배우는 교과서적인 발음이랑 많이 달라요. 억양도 그렇고요.”
아, 그렇긴 했다.
조나단의 발음도 잘 들어 보면.
“어딘가 랩 하는 것 같긴 하죠.”
랩이라는 말에 금홍이 킥킥 웃었다.
“맞아요. 말 자체에 리듬이 살아 있는 편이에요. 어쨌건 제가 잘 알아들을 수 있게 기도해주세요.”
금홍은 자신감 없게 말했지만… 난 알고 있다.
금홍이야말로 실전에 강한 타입이란 걸.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준비를 해 왔겠지만.
긴장이 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보는 조나단 란스마이어 감독.
과연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미스터 리!”
굵직한 목소리가 날 불렀다.
익숙하고도 낯선 얼굴, 조나단 감독이었다.
정장을 갖춰 입은 그는 일식집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먼저 선뜻 내게 손을 내밀었다.
“와우! 정말 반가워요. 당신을 봐서 정말, 정말 영광이에요.”
굵직하고 낮은 목소리.
커다랗고 건조한 손.
인종적 차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들이 여실히 느껴졌다.
나는 그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감독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영화제 불려 다니는 게 좀 귀찮긴 하죠. 하하! 같이 들어가죠.”
그는 피다 만 담배를 구둣발로 눌러 껐다.
우리는 같이 식당으로 들어갔다.
드라마에서나 봤던 정통 일식 식당.
기모노를 입은 점원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는 그녀들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갔다.
조나단 감독의 일행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다양한 인종의 그들은 정신없고 시끄러웠다.
나는 그들과 바쁘게 인사를 나눴다.
금홍도 긴장 가득한 얼굴로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통역을 했다.
“다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말에 조나단 감독이 손을 내저었다.
“영화제에서 바쁜 건 저뿐인데요. 이 친구들은 한가하다고요.”
그 말에 직원들이 조나단 감독을 밉지 않게 흘겼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껄껄 웃었다.
우리는 마주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계약에 관해 새롭게 논의할 건 별로 없었다.
“계약이 가능한 제작사 목록입니다. 1순위부터 차례로 연락을 해 보려 해요. 다 아는 사람들이라 긍정적으로 봐 줄 겁니다. 뭐, 결국 비즈니스긴 하지만.”
“순위를 매긴 기준은요?”
“돈이죠.”
그가 딱 잘라 말했다.
“많은 돈을 투자해 줄 수 있는 제작사예요. <그 집>, 아마 돈이 많이 들 겁니다.”
그 점은 나도 동의했다.
<그 집>에는 환상적인 요소가 많이 등장한다.
즉, CG 사용 빈도가 높다는 것.
그리고 CG의 퀄리티는 절대적으로 자금력에 달려 있다.
“작품에 손대지 않는 조건도 맞춰 주세요.”
내 말에 조나단이 씩 웃었다.
“그건 기본이죠.”
나는 제작사 목록을 금홍에게 줬다.
금홍은 그것을 파일에 끼워 잘 보관했다.
“저희 쪽에서도 한번 살펴보죠, 감독님. 아마 저대로 진행할 확률이 높긴 하겠습니다만.”
“편하게 하세요. 다만, 의견 전달을 확실하게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물론이죠. 저도 확실한 게 좋습니다.”
비즈니스적인 이야기는 이쯤 하고, 슬슬 작품 얘기에 들어가야 할 때였다.
나는 가방에서 시나리오집을 꺼냈다.
지훈이 아침부터 들고 뛴 시나리오집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읽어 보시죠.”
나는 시나리오집을 그의 앞으로 주욱 밀었다.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잡았다.
이러고 있노라니… 은밀한 거래라도 하는 것 같다.
“지금 여기서 말입니까?”
“네. 단언컨대, 십 분도 안 걸리실 겁니다.”
그는 시나리오를 보기 시작했다.
한 장 한 장 넘기는 손길이 거침이 없었다.
사실 평범한 시나리오는 아니었다.
스토리보드 그림과 시나리오를 합한 것.
즉, 글과 그림 모두 들어있는 시나리오집이었다.
그리고 채 십 분도 되지 않았을 때.
조나단 감독은 시나리오를 덮었다.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생각에 잠겼다.
영화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복기하는 걸까.
방 안에서는 침묵이 감돌았다.
그와 막역해 보이는 직원들 마저도, 조나단 감독의 상태를 조심스레 지켜보았다.
잠시 후. 그가 한마디 했다.
“무섭네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이 떨리고 있었다.
“뭐가 무섭다는 거죠?”
“이 시나리오요. 너무 무섭잖아요.”
그가 굵고 긴 손가락으로 시나리오집을 툭 쳤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감정을 나타내는 대사는 다 삭제한 거죠?”
“다는 아니고, 거의 다 삭제했죠.”
“탁월한 선택입니다.”
“어떤 면에서요?”
나는 물었다.
내 선택이 옳았다면, 구체적인 이유를 알고 싶었다.
“눈빛과 침묵으로 주는 차별이라고 해야 하나. 말이나 행동이 아닌, 표정이나 눈빛으로 상대를 경멸하는 그런 표정들… 미국에 있다 보면 자주 마주치거든요.”
그 말에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아프리카계나 중동계 사람들이.
차별을 하는 행동은 불법이다.
하지만 차별을 하는 마음은 합법이다.
그 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눈빛과 표정.
그런 것들에 이들은 대단히 예민한 듯했다.
“대사를 이렇게까지 뺄 거라곤 생각 못 했어요. 대부분 시나리오 작가들은,”
그는 뭔가 깨달았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내게 이어 말했다.
“그래요. 제가 만나 왔던 시나리오 작가들은 자신의 재능을 뽐내고 싶어했어요. 그래서 대사를 과하게 넣으려 했죠. 작가님이 이런 결과물을 내실 수 있었던 건… 시나리오‘만’ 쓰는 시나리오 작가가 아니라 작품 자체를 다루는 소설가여서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내가 시나리오 작가면… 이 정도로 대사를 배제한 시나리오를 쓰긴 어려웠겠지.
나는 입을 열었다.
“소설은 인물이 침묵한다고 해서, 그 자리를 비우지 않아요. 그 침묵 안에 들어있는 게 뭔지 느낄 수 있게 해 주죠. 전 영화도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어요.”
“….”
“뭘 채워주실지는… 이 스토리보드와 조나단 감독님을 믿고 있어요.”
일견 텅텅 빈 것 같은 시나리오.
하지만 조나단 감독이 그 침묵의 의미를 안다면, 분명 영상 안에서 그것을 채워 줄 수 있을 것이다.
내 스토리보드에 그가 그림을 덧그린 것처럼.
조나단 감독은 좀 감동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내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짝!
그가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좋아요. 좋아. 날 완전히 믿으라고요, 이제.”
그는 <그 집>의 시나리오를 자신의 가방에 넣었다.
“아, 시나리오 제본을 많이 해 왔어요. 나눠 보시라고요.”
금홍과 나는 나머지 시나리오집을 모두 넘겨 주었다.
식사 자리는 내내 화기애애했다.
중요한 부분들이 이미 협의된 만큼, 큰 부담을 덜었다.
일식집을 나온 후.
우리는 그 앞에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눴다.
“커피라도 한잔하고 가시면 좋을 텐데요.”
내 말에 그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케줄이 바로 있어서요. 언제 한국으로 가세요? 저희는 마지막 날… 그러니까 일주일 후에 파티를 열 생각인데. 시간이 되시면 오시죠.”
“아쉽네요. 저흰 사흘 뒤에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동안에 강연이 하나 잡혀 있고요.”
“멋지군요. 강연이라. 영어로 하나요?”
“아뇨, 일본어로 합니다.”
“아하. 한국인들은 역시 일본어를 잘 하는군요.”
그는 이런 식으로 생각한 것 같았다.
프랑스인이 이탈리아어를 어느 정도 알아듣고, 이탈리아인이 독일어를 어느 정도 알아듣는, 유럽인들의 언어적 유사성 말이다.
한국과 일본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나는 그냥 웃어넘겼다.
설명을 하자고 달려들면 한도 끝도 없을 테니.
우리는 다시 악수를 했다.
그는 날 끌어당기더니, 내 등을 가볍게 한 번 쳤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 정말 멋진 사람 같아.”
“감독님도요.”
“기대해요. 전 세계를 뒤집어놓을 만한 영화를 만들어 볼 테니.”
* * *
그렇게 조나단 감독에게 시나리오까지 넘긴 후.
금홍과 나는 호텔로 돌아갔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신주쿠로 갔던 것이기에, 따지고 보면 비행 이후 한순간도 쉬지 못했다.
우리는 각자의 방에 있다가 저녁을 먹기로 했다.
나는 당연히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누워 버렸다.
“어휴… 힘들어.”
벌렁 누워 버린 나는 숨을 색색 몰아쉬었다.
심하다 싶을 만큼 작은 일본의 호텔 방도 몇 번 와 보니 이젠 익숙해졌다.
이제 내 손엔 단 한 권의 시나리오도 없다.
모두 조나단 감독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영화 <그 집>도… 내 손을 떠난 거나 마찬가지.
비교적 고생스럽게 쓴 작품이라 그런가.
다른 때보다 더 마음이 후련했다.
이제는… 마음 놓고 다음 작품으로 넘어갈 수 있겠지.
<갈림길>을 소설화하는 작업 말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잠깐 졸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떴을 때 나는 기겁했다.
“…망했다.”
밖은 깜깜했다.
휴대폰 시계를 보니 벌써 아홉 시.
금홍에게 카톡도 여러 개 와 있었다.
― 샘, 이제 슬슬 나가 봐야죠?
― 혜경 샘?
― …자요?
나는 헐레벌떡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아무리 일 때문에 왔다고 해도, 금홍과의 약속을 말도 없이 펑크내다니.
전화를 걸까 하다가 그만 뒀다.
바로 옆방에 있단 생각에 마음이 다급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복도로 나가, 금홍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조용하다.
똑똑!
…역시 조용하다.
…화가 난 걸까.
그러고 보니 금홍이 화를 낸 적이 있었던가.
아니 그런 적이 없다 한들, 이건 화를 안 내면 더 이상한 상황 아닌가.
난감함과 당혹스러움에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였다.
“혜경 샘? 뭐 하세요?”
금홍이 등 뒤에서 날 불렀다.
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편안한 차림의 금홍이 뭔갈 잔뜩 들고 있었다.
“아, 나갔다 오셨어요?”
“네. 아무래도 주무시는 것 같아서요. 외식은 그른 것 같고 그냥 간식거리 좀 사 왔어요.”
금홍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러니 나야 더 미안할 수밖에.
“죄송해요. 제가 깜빡 잠이 들어서. 많이 기다리셨죠?”
“아,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저도 좀 잤어요.”
그리고는 방 도어록에 카드키를 갖다 댔다.
삑 하고 잠금이 열렸다.
내가 멀뚱하게 서 있자, 금홍이 멈칫했다.
그리고 내게 거기서 뭐 하냐는 듯 말했다.
“샘 것도 사 오긴 했는데.”
“네?”
“괜찮으시면 들어와서 같이 드세요.”
…그래도 되는 걸까.
아무리 일 때문에 왔다지만 호텔 방인데.
하지만 정작 금홍은 별생각 없는지 문을 열어 둔 채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된 거, 안 들어가면 더 이상할 거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금홍의 방으로 들어갔다.
우린 창가의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커튼을 쳐 놓고 보니, 야경도 꽤 볼만했다.
금홍은 비닐봉지에서 자꾸만 뭔갈 꺼냈다.
샌드위치며 삼각김밥이며 오코노미야키며 하는 것들을.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요.”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종류별로 다 사 왔어요.”
그리고 금홍이 꺼낸 마지막 음식.
탁 하는 소리와 함께 탁자에 내려놓은 것은… 은색 맥주캔이었다.
금홍이 씩 웃더니 말했다.
“이런 날에는 술 한잔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