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34화 (134/204)

134회

주어진 시간은 이 주.

그 안에 <그 집>의 시나리오를 마무리해야 한다.

아니, 따지고 보면 이 주도 아니지.

조나단 감독에게 보여 주려면… 번역도 해야 할 테니.

시나리오를 쓰기에 가장 적합한 곳.

나는 강남의 조인후 감독의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 들어 앉아 스토리보드를 들춰 봤다.

한 장 한 장 스토리보드를 보다 보면, 마치 영화가 눈 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여기에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 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어떤 대사를 넣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그래서 일단… 다 넣어 보기로 했다.

소설 <그 집>에 나온 모든 대사들을.

그렇게 기계적으로 시나리오를 채워갈 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노크했다.

― 접니다. 조인후요.

“아, 들어오세요. 감독님.”

문이 열리고, 조인후 감독이 나타났다.

지금 출근을 한 건지 외투를 입고 있었다.

“작가님이 오랜만에 오셨다고 해서요.”

“아, 네. 이제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조인후 감독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말의 함의를 읽어 낸 것이다.

놀란 걸 보니, 아직 뉴스를 못 본 모양이다.

“작가님… 그럼…?”

“네. 감독을 구했습니다.”

“허허… 정말 잘 됐습니다! 정말로요!”

그는 정말 기뻤는지, 큰 동작으로 박수까지 쳤다.

“그러지 말고, 일단 앉으시죠.”

우리는 소파에 마주앉았다.

그는 싱글벙글하며 내게 물었다.

“그래, 어떤 감독입니까? 제가 아는 감독인가요?”

“아실 겁니다. 조나단 란스마이어 감독이라고….”

“…뭐라고요?”

그의 얼굴에 경악에 가까운 놀라움이 번졌다.

“아, 아니 어떻게….”

그럴 만도 했다.

조나단 감독은 현재 미국의 루키 감독 중 하나.

게다가 컬트 감독도 아니니.

“누들 출판사에서 보낸 책을 보고 <그 집>에 관심을 보이시더군요. 하지만 처음엔 거절했어요. 컬트 영화 감독은 아니시니까.”

“허허… 조나단 감독을 거절하다니. 이거 보통 사건이 아니군요.”

그가 흥미진진하게 내 이야기를 들었다.

“음… 그런데 조나단 감독님께서 대학 시절 만든 컬트 영화를 보여 주시더라고요. 그 영화가 마음에 들어 스토리보드를 보내 드렸죠. 그랬더니 스토리보드에 덧그림을 그려서 보내 주신 거예요.”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분의 매력에 완전히 빠졌어요. 영화를 맡아 달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조인후 감독은 자기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뿌듯함이 번져갔다.

“그쪽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네?”

“작가님의 매력에 푹 빠졌을 거라고요. 그러니 말 한 번 안 나눠 본 사이에 그렇게 작업을 진행시킬 수 있었겠죠.”

그 말을 듣고야 알았다.

나는 조나단 감독에게 작품을 맡기기도 전에, 그와 작업을 해 버린 거나 마찬가지라는 걸.

“시나리오는 언제까지 주기로 했나요?”

조인후 감독이 물었다.

“이 주 후까지예요. 도쿄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시간이 많은 건 아니죠.”

“바쁘게 쓰셔야겠군요. 진행은 얼마나 되셨나요?”

“사실….”

난 좀 겸연쩍게 말했다.

“쉽진 않아요.”

“으음… 어려운 점이 있나요?”

“스토리보드까지 나온 이상 머릿속에 있는 걸 옮겨 적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쓰면 쓸수록 대사들이 불필요하게 느껴져서요.”

사실 좀 당황스러운 일이긴 했다.

스토리보드를 보고 있노라면… 기존의 대화를 넣는 게 사족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그냥 옮겨 쓰곤 있지만, 어쩌면… 대대적인 대사 수정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조인후 감독은 내 말을 가만히 듣더니 말했다.

“음… 대사에 너무 매몰되지 마세요.”

“네?”

“영화는 결국 장면의 미학이거든요. 대사보다는 미장센이 먼저예요.”

그는 거기까지만 말했다.

그리고 어서 쓰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생 많았습니다. 작가님.”

“뭘요.”

우리는 자연스레 악수를 했다.

그는 내 손을 꽉 쥐었다.

“아닙니다. 시놉시스를 한 번도 안 써 보신 분이 스토리보드를 만드는 거… 아무리 재능이 많아도 쉽지 않은 일인 거 알고 있습니다.”

“….”

“그날, 밤새셨죠?”

스토리보드를 처음 그렸던 날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때는 밤을 새지 않은 척했는데,

그는 역시 눈치를 채고 있던 모양이었다.

“잘 될 거예요. 작가님 영화.”

“…감사합니다. 감독님.”

그는 내게 응원의 미소를 남기고 사무실을 나섰다.

“후… 그럼 다시 해 볼까?”

나는 다시 스토리보드를 살펴봤다.

그 안에 들어있는 수많은 개의 그림들.

덧붙여 대사로 가득한 시나리오들.

한참 동안….

나는 그 그림과 글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 * *

한 가지 기쁜 일이 생겼다.

조나단 감독의 짹짹이 덕분이었을까.

<그 집>의 판매 순위가 다시 5위로 올라갔다.

지훈과 나는 저녁을 먹으며 그 이야기를 나눴다.

“휴우… 아, 진짜 다행이에요, 형.”

지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순위를 확인해 왔던 건 녀석이었으니,

지금까지 적잖이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이런 게 스타마케팅이라는 걸까.”

내 말에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죠. 왜 기업들이 비싼 돈 들여서 연예인 쓰겠어요.”

아무튼 놀라운 일이었다.

조나단 감독이 워낙 유명한 인물이긴 해도, 신간이 난무하는 미국 출판 시장에서 순위를 탈환하다니.

우웅― 우웅―

지훈의 휴대폰이 울렸다.

녀석은 밥을 먹다 말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뭐야?”

“몰라요. 메일인데, 일본어네요. 형이 보실래요?”

지훈은 내게 휴대폰을 넘겨 주었다.

메일 내용은 이랬다.

“도쿄 도청에서 열리는 강연을 맡아줄 수 있냐는데? 조나단 감독의 짹짹이를 보고 내 일본 스케줄을 알았다고. 가능하다면 와서 강연을 해 달래.”

이런 연락이 올 법도 하지.

조나단 감독이 SNS로 <그 집> 진행 일정을 거의 라이브로 중계하는 중이니.

“일본에서 강연? 하실 거예요?”

지훈이 조심스레 물었다.

<갈림길>을 일본에서 내지 못한 일.

그게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 거겠지.

뭐, 나도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하지만.

“응. 할 거야.”

“…정말요?”

“어. 도쿄 도청이면 큰 곳이야. 서울 시청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하고 싶은 얘기도 있고 말이야. 이거 답장은 내가 보낼게?”

“아, 네. 그러세요.”

우리는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밥을 먹던 지훈이 문득 내게 물었다.

“형.”

“어?”

“근데 전 일본 못 갈 것 같은데요.”

뜻밖의 말.

“왜?”

“보니까 그날이 아버지 생신이더라고요. 심지어 환갑.”

“아, 그럼 괜찮아. 사실 굳이 너까지 올 필요도 없고. 그 자리에서 계약서가 오가진 않을 거야. 나중에 메일로 오겠지.”

“죄송해요.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그래.”

내가 별생각 없이 대답을 할 때였다.

지훈이 뭔가가 떠올랐는지, 이렇게 말했다.

“그럼 금홍 샘이랑 둘이 가겠네요?”

“….”

침묵이 흘렀다.

이건… 생각지 못한 전갠데.

나는 일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어.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됐네.”

아무리 일이라지만 금홍이랑 단둘이?

물론 명분이야 충분하다.

<그 집>의 초벌 번역가가 통역까지 해 주는 그림이니.

하지만… 왠지 기분이 이상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 *

금홍이는 흔쾌하게 동행을 하겠다고 했다.

학기 중이라 어려울 줄 알았는데, 이런 목적이라면 수업 출석까지 인정해 준다나.

일이 이리되니… 일본행이 더 기대가 된다.

남은 건 어서 <그 집> 시나리오의 감을 잡는 일.

나는 작업실에서 내내 스토리보드를 바라보았다.

이 안에 어떤 대사를 넣어야 하나.

혹은 어떤 대사를 고쳐야 하나.

그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후우….”

역시, 쉽지 않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혼자서 끙끙거릴 때였다.

문득, 조인후 감독의 말이 떠올랐다.

― 영화는 결국 장면의 미학이거든요. 대사보다는 미장센이 먼저예요.

“흠.”

미장센.

한 화면의 전체적인 구성이 보여주는 미학을 의미한다.

나는 스토리보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한 컷 한 컷이 미장센이 될 텐데….

이것으로만 충분하다면?

과연 대사는 필요할까?

“…!”

나는 시나리오를 스토리보드에 붙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둘을 한 번에 내려다보았다.

스토리보드의 미장센.

시나리오의 대사들.

이를테면 이런 장면이 있다.

스토리보드의 한 컷.

양어머니가 수지를 차갑게 바라보는 장면.

그 영문을 몰라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의 수지.

그에 붙는 시나리오의 대사.

― 전 아무 짓도 안 했는데요.

― 난 아무 말도 안 했다.

대사만 보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강렬한 컬트적 이미지를 덧씌우니….

…사족이 된다.

나는 대사를 가려 봤다.

마치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침묵하는 것처럼.

양어머니의 차가운 눈.

억울해하면서도 항변하는 듯한 수지의 눈.

그리고 양어머니는 경고하듯 눈썹을 한번 들어 올리곤 떠난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래. 대사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이야기가 ‘제대로’ 감정을 전하는 거지.

그리고 그 ‘제대로’의 영역엔…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라는 말도 들어 있지 않은가.

그래.

대화가 사족같이 느껴진다면, 대화를 배제하자.

조나단 감독이 찍어 줄 영상을 믿자.

잊지 말자.

이건 소설이 아니라 영화다.

내가 살려야 할 건 활자가 아니라 ‘이미지’고.

이미지를 살리는 대사, 혹은 침묵.

난 그 점에 집중하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아니, 시나리오를 지우기 시작했다.

반드시 들어가야 할 정보를 담은 부분만 제외하고.

시나리오 자체만으로는… 볼품이 없어 보일 정도로.

감정이나 생각이 잘 전해지지 않고, 어떤 부분은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괜찮다.

조나단 감독과 내겐 스토리보드가 있다.

그 안의 이미지가 영화의 뼈대라면, 대사는 살이다.

최소한의 살만 붙여서 아름다운 뼈대를 드러내자.

‘지우기’ 작업은 그렇게 계속 진행되었다.

물론 지우기만 해서 되는 작업은 아니었다.

대사가 많이 없는 영화가 되었으므로, 간간이 나오는 대사는 대단히 결정적이어야 했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작품을 다시 쓰는 기분이었다.

열흘 후.

나는 시나리오 작업을 마무리했다.

번역은 바로 피터 한에게 맡겼다.

초벌 번역을 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피터 한은 툴툴거리긴 했지만… 내 사정을 듣고는 최대한 빠르게 번역본을 주었다.

그리고 그 ‘최대한 빠른’ 시간은, 일본으로 가는 날 새벽이었지만.

그때부터는 전속력 달리기나 마찬가지였다.

지훈은 아침부터 제본소로 달려가고, 나와 금홍은 공항으로 향했다.

우리는 발권을 마친 후.

전전긍긍한 채로 지훈을 기다렸다.

정확히는 지훈이 가져올 시나리오집을.

“어휴… 왜 이렇게 안 오시지.”

금홍이 불안한 듯 말했다.

전화도 없는 걸 보니 운전 중인 모양이다.

답답하지만, 기다릴 수밖에.

“몇 시에 만나기로 했죠?”

“오늘 오후 여섯 시요.”

“그럼 비행기 시간 늦추기도 어렵네요. 이런….”

“괜찮아요. 올 거예요. 못 올 것 같았으면 연락을 했을 거예요.”

난 금홍을 달래듯 말했다.

금홍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때.

“형!”

저 멀리서 지훈이 나타났다.

녀석은 박스 하나를 안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닌 척했지만 나도 꽤 불안했기 때문이다.

“허억… 허억… 죄송해요! 후우… 차가 너무 많이 막혀서!”

“지훈 샘. 비행기 못 타는 줄 알았어요. 어서 주세요.”

“빈손으로 가는 줄 알았다.”

지훈은 숨을 헉헉대며 우리 앞에 박스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쉴 시간 같은 건 없었다.

우리는 부랴부랴 박스 안의 제본을 나눠 들었다.

총 열 권. 충분한 양이었다.

“후우… 가요, 얼른. 빨리 가.”

지훈이 어서 가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잘 갔다 올게.”

“다녀올게요. 좀 쉬세요.”

“아, 알았어요. 빨리, 후우… 가요. 비행이 놓치겠, 네.”

우리는 얼른 게이트로 달려갔다.

우여곡절 끝에 시나리오를 가지고 일본으로 가게 된 것이다.

물론… 굉장히 아슬아슬했지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