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33화 (133/204)
  • 133회

    나는 조나단 감독에게 답장했다.

    ― 좋아요. 시켜 드릴게요. <그 집>의 감독.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었다.

    그래도 영화감독을 구하는 일인데.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지만… 그 일을 SNS 메시지로 할 줄이야.

    조나단은 한참이나 답이 없었다.

    자꾸만 뭔가를 썼다 지웠다 하는게 조바심이 났다.

    잠시 후.

    그는 단 하나의 단어를 내게 보냈다.

    놀랍게도 그 말은, 한국어였다.

    하지만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그 내용이었다.

    ― 감사합니다. 잘생긴 사람.

    “하하….”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대체 어떤 번역기를 돌린 건지.

    우리 사이에 오간 과정이 워낙 쾌활해서 그렇지,

    방금 상당히 중요한 결정을 한 셈이었다.

    영화를 만드는 건 장난이 아니다.

    감독과 작가 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필요하고, 제작사를 구하고 스텝을 꾸리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이 정도 구두 계약으로는 좀 불안한데….

    난 결심했다.

    정식 계약이 있기 전까지, 이 약속을 빼도 박도 못하게 해야겠다.

    ― 우리 약속, 공개해도 될까요?

    내 물음에 조나단이 답했다.

    ― 얼마든지. 나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 답을 듣자마자 짹짹이의 새 피드를 열었다.

    그리고 조나단과 <그 집>을 태그한 후, 이렇게 적었다.

    온 세계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 조나단 란스마이어 감독이 <그 집>을 영화로 만들어 줄 겁니다.

    조나단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그는 내 피드를 통째로 자기 피드에 복사했다.

    <그 집>의 스토리보드 표지 사진과 함께.

    ― 이것 봐. 이건 결정된 일이야. 나 말고 어떤 감독도 <그 집>을 탐할 순 없어.

    우린 아마도 동시에 똑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는 생각.

    나는 피식 웃으며 메시지를 보냈다.

    ― 조만간 회의를 한번 하죠.

    ― 최대한 빨리요.

    물론 나도 그걸 바라지만… 현실적으론 어렵지 않나.

    그때, 조나단 감독이 말했다.

    ― Zoom 프로그램 쓸 줄 알아요?

    …줌?

    당연히 몰랐다.

    이름조차도 처음 들어보는데.

    검색해보니 화상 회의 프로그램이란다.

    난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 물론이죠!

    나는 몰라도 지훈은 알겠지.

    * * *

    그리고 하루가 지난 지금.

    지훈은 줌 프로그램 설정에 열을 올리고 있다.

    회의까진 앞으로 삼십 분.

    통역을 해 줄 금홍도 곧 도착할 것이다.

    지훈은 바탕화면의 폴더를 가리켰다.

    “이게 그건가 보네요? 조나단 감독이 보낸 <그 집> 스토리보드 수정본.”

    “어, 맞아. 볼래?”

    나는 먼저 책상에 있던 스토리보드북을 펼쳤다.

    조나단 감독이 수정을 보기 전 버전 말이다.

    그리고 한 장면을 짚어 지훈에게 보여주었다.

    “봐봐. 어린 수지가 양오빠의 방에 들어간 이 장면. 난 이때 수지의 등을 보여 줬어. 긴장하고 있는 등 말이야. 방의 풍경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부옇게 처리되고. 이 방을 낯설어하고 두려워하는 수지의 감각을 드러낸 부분이야.”

    “음… 그렇네요.”

    나는 컴퓨터에서 조나단 감독이 보낸 폴더를 열었다.

    그리고 설명한 것과 같은 장면의 이미지를 띄웠다.

    “여기 조나단 감독이 수정한 걸 봐. 양오빠의 방을 전체적으로 붉게 처리했고, 어딘가 흘러내리는 듯한 효과를 줬어.”

    “그러게요. 마치….”

    지훈이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짐승의 뱃속같네요.”

    “바로 그거야. 정확하게 말하면 양오빠의 뱃속이지. 이전에 양오빠를 마치 그리스의 신처럼 표현한 부분과 완벽하게 대비되고.”

    “호오… 걱정 놔도 되겠는데요? 이 감독도 ‘컬트적 감각’이 있는 거죠?”

    “컬트적 감각은 나보다 더 뛰어난 것 같아. 어때? 네가 보기엔?”

    “전 컬트의 키읔도 모르지만… 뭔가 이미지가 멋진데요? 매력적이에요.”

    좋은 반응이다.

    이 스토리보드가 대중적 코드까지 잡았단 뜻이니.

    그나저나, 조나단 감독이 스토리보드를 스캔해서 보낼 줄은 몰랐다.

    메일로 이 파일을 받자마자 난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왜 굳이 국제택배를 선택했을까.

    물론 어떤 감독들은 이런 디지털 파일을 경계한다.

    아무래도 외부 유출에 취약하니까.

    조나단 감독도 그래서 별말 없이 국제택배를 기다렸겠지.

    내가 ‘스캔’이란 선택지를 떠올리지도 못했다는 걸 모르고 말이다.

    아무리 잘 적응해서 산다고 해도… 가끔씩 이렇게 옛날 사람 티가 난다니까.

    “저도 준비를 좀 해야겠네요. <그 집>의 한국 발간 시기에 맞춰서 비평 하나 내게요.”

    “그래 줄래? 그러면 나야 고맙지.”

    한국 문단에서 비평의 역할을 중요하다.

    새 책이 나왔을 때 나오는 첫 비평.

    그게 독자들 독서의 방향을 결정하니까.

    지훈이 그 역할을 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긴 하다.

    그런데 문득, 잊고 있던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그 집> 말고 다른 거 먼저 써 줄 수 있어?”

    “네?”

    “내가 단편 소설을 하나 쓸 생각이거든.”

    “단편 소설이요? 어떤?”

    지훈은 대수롭지 않게 슬리퍼를 끌며 주방으로 갔다.

    그리고 포트의 커피를 잔에 따랐다.

    “<갈림길> 있잖아. 그걸 모티프로 단편을 써 보게.”

    “아, 그래요. 그 에세이 반응 좋잖아요.”

    “만약에 그 소설도 반응이 좋으면….”

    내 말에 지훈이 고갤 들어 날 봤다.

    아직도 뭐가 더 남았어? 하는 얼굴로.

    “아, 아니다. 이건 나중에 말할게.”

    “…네? 뭔데 그래요?”

    “나중에 말해 준다니까.”

    띵― 동―

    마침 현관벨이 울렸다.

    “금홍 샘이다. 내가 나가 볼게.”

    나는 얼른 현관으로 나가서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금홍이 상기된 얼굴로 나타났다.

    “혜경 샘!”

    “어서 들어와요.”

    금홍은 구두를 벗고 집으로 들어왔다.

    나는 주방에서 금홍의 커피를 내리며 말했다.

    “갑자기 부탁해서 미안해요. 통역 맡아 줄 사람이 샘뿐이라….”

    “아니에요. 제가 더 영광이죠. 조나단 감독님이랑 ‘이상 작가님’ 통역인데.”

    “금홍 샘 왔어요?”

    지훈이 작업실에서 외쳤다.

    “지훈 샘! 잘 지냈어요?”

    금홍은 웃으며 작업실로 들어갔다.

    난 금홍의 커피를 들고 그녀를 따라갔다.

    지훈은 어느새 모든 세팅을 마치고,

    모니터에 짹짹이 피드를 켜 두었다.

    “사람들이 형이랑 조나단 감독님 같이 태그하고 있어요. 특히 미국 쪽 반응이 장난 아닌데요?”

    수없이 많은 피드들이 나와 조나단 감독을 태그했다.

    하트며 별이며 다닥다닥 붙은 이모티콘들.

    반응이 나쁘지 않다.

    금홍이 피드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거의 다 기대나 응원이에요. <그 집>을 찾아 읽겠다는 말고 있고요.”

    띠링―

    컴퓨터에서 짹짹이 메시지가 떴다.

    조나단 감독이었다.

    그가 보낸 단 하나의 단어.

    ― 가능?

    “어떻게 할까요?”

    금홍이 키보드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뭐, 이제 준비도 다 끝났으니….

    “시작하죠.”

    금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나단 감독에게 답장을 썼다.

    역시 단 하나의 단어로.

    ― 가능.

    지훈이 줌 프로그램을 몇 번 만지니….

    이윽고, 화면에 조나단 감독이 나타났다.

    전형적인 아프리카계 흑인의 얼굴.

    환하게 웃는 그 미소에 나도 미소를 지었다.

    ― 안녕하세요! 작가님!

    “안녕하세요. 감독님. 이쪽은 통역을 해 주실 이금홍 선생님입니다.”

    금홍이 꾸벅 인사를 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 좋아요! 좋아! 아주 멋져요. 이렇게 빨리 회의를 할 수 있다니. 기분이 정말 좋아요.

    그는 좀 흥분한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춤을 출 듯 몸을 들썩거리기도 했다.

    “와… 흑인 바이브 못 따라가겠네요.”

    지훈이 뒤에서 중얼거렸다.

    “하하, 먼저 <그 집>을 선택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 제가 더 감사를 드려야죠. 이건 정말이지 제게 최고의, 최고의! 기회입니다. 컬트라니, 다시 대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에요! 와우, 정말 멋지다고요.

    그의 텐션이 점점 더 올라갔다.

    이대로 가다간 감탄만 하다가 끝나겠다.

    나는 얼른 일 얘기로 대화의 방향을 틀었다.

    “그래, 생각해 놓은 제작사는 있으신가요?”

    ― 가능한 제작사의 목록을 보내 드릴 생각이에요. 혹시 따로 생각해 놓으신 곳이라도…?

    조나단 감독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그의 입지는 한국의 조인후 감독에 뒤지지 않는다.

    영화를 만들겠다고 하기만 하면, 온갖 제작사들이 돈다발을 꺼내겠지.

    “실질적인 제작 부분은 맡기도록 하죠. 그럼 제작 시기는 언제쯤이 가능할까요?”

    ― 당장. 전 지금 백수고, 차기작을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잘 됐다.

    나도 <그 집>을 완벽하게 마무리한 후, 새 소설로 들어가고 싶기 때문이었다.

    “사실… 시나리오가 아직 안 나온 상태라서요. 몇 주 시간을 주시면 시나리오를 완성해서 보내 드리죠.”

    이 말이 이 회의의 본질이었다.

    즉, 시나리오는 ‘이상’이 쓴다는 것.

    조나단 감독이 시나리오에 욕심을 부린다면, 같이 좀 더 얘길 나눠 봐야 하겠지.

    ― 좋아요. 맡기죠. 다만 나중에 사소한 수정이 있게 되면 바로 말씀을 드릴게요.

    이렇게 순순하게?

    그래도 명색이 감독인데?

    “욕심이 나는 부분이 있다면, 미리 얘길 하셔도 좋아요. 시나리오에서 가능한 반영해 보죠.”

    그가 흰 이를 드러내며 피식 웃었다.

    ― 글은 그쪽이 쓰세요.

    그리고 카메라로 뭔갈 찍는 시늉을 했다.

    ― 난 이미지를 만들 테니.

    그것은… 대단히 멋진 말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이 뭔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이미지를 만드는 일.

    그것이야말로 영화 감독의 본질이었다.

    그의 말이 내게 적잖은 자극을 준 게 분명했다.

    난 당장에라도 시나리오 작업에 착수하고 싶었다.

    “그럼, 빠른 시일 내에 시나리오를 보내 드리죠.”

    ― 좋아요, 정말 좋아요.

    우리는 그 외에도 많은 얘길 나눴다.

    제작비며 계약금이며 하는 얘기들.

    물론 제작사와 나눌 이야기들이었지만, 우린 이미 한배를 탄 동료였다.

    회의가 수다로 바뀌어 갈 무렵.

    조나단 감독이 대뜸 내게 말했다.

    ― 아! 그러고 보니!

    그리고 어디론가 막 달려갔다.

    지훈과 금홍, 나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갑자기 왜 저래요?”

    지훈이 황당한 듯 말했다.

    난들 아나.

    화면 저 너머로 소리들이 들려왔다.

    ― 우리 일정 적은 거 다 어딨어?

    ― 감독님이 지웠잖아요!

    ― 젠장! 백업해 놓은 거 없어?

    ― 칠판에 적은 걸 어떻게 백업합니까?

    ― 몰라. 네 다이어리라도 보여 줘.

    ― 하, 진짜….

    통역을 하던 금홍이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언제 조나단 감독이 나타날지 모를 상황.

    나는 웃음을 꾹 참았다.

    이윽고 조나단 감독이 후다닥 나타났다.

    우린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색을 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 아, 기가 막힌 일정이 있어서요.

    “기가 막힌 일정이요?”

    ― 우리, 직접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네? 갑자기 무슨…?”

    내가 미국에 갈 일은 없다.

    그렇다면 조나단 감독이 한국에 온다는 건가?

    ― 조만간 일본 일정이 있거든요.

    “아! 일본이라면….”

    ― 도쿄! 거기 영화제에 초청을 받았거든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한국에서 일본 가는 거야 어렵지 않으니.

    시간만 맞는다면 일본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럼 그에 맞춰서 제가 일본으로 가죠.”

    ― 다행입니다. 한국을 들르면 좋은데… 그럴 시간은 안 되는 것 같아서요. 와 주시면 같이 식사도 하고 파티도 하죠!

    파, 파티라….

    나는 대답 대신 그냥 웃고 말았다.

    아무튼 어차피 일본에서 조나단 감독을 만난다면….

    “일본에는 언제쯤 오실 생각입니까?”

    ― 지금 직원이 일정표를 잃어버려서 제가 겨우 찾았는데요, 그거에 따르면….

    조나단 감독은 여직원이 쓸법한 다이어리를 슬쩍 봤다.

    언제 봐도 참 뻔뻔하다.

    ― 이 주 후네요.

    게다가 뭔 일을 해도 너무 다급하고 정신없고.

    말이 이 주지 코앞이 아닌가.

    하지만 그의 일정에 맞추는 게 좋겠지.

    내 쪽에서 좀 무리를 한다고 해도….

    “그럼 이렇게 하죠, 감독님.”

    나는 그에게 말했다.

    “이 주 후에 도쿄에서 만났을 때, 제가 시나리오 완성본을 가져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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