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32화 (132/204)
  • 132회

    미국 시애틀.

    조나단 란스마이어 감독의 사무실.

    그는 방금 <그 집>의 스토리보드를 봤다.

    멍한 눈으로 허공을 보던 조나단.

    문득 입이 바싹바싹 마를 정도로 조급해졌다.

    ‘당장 한다고 해야 해. 다른 감독에게 뺏기기 전에.’

    어물쩍거리다가 작품을 놓치는 일이 부지기수인 영화계.

    얼른 작품 제작 의사를 밝혀야 했다.

    하지만 그도 나름대로 기업의 수장.

    아랫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먼저였다.

    ‘암, 당연히 그래야지.’

    조나단은 사무실을 문을 활짝 열었다.

    벌컥!

    직원들이 멀뚱멀뚱하게 그를 보았다.

    “새로 들어갈 작품 정했어.”

    “…갑자기요?”

    조나단의 비서 격인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누들 공모전 수상작 <그 집>. 읽어 본 사람?”

    사람들은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누군가 다소 퉁명스럽게 말했다.

    “대상작은 읽었는데요. <조이스의 신문>.”

    “그거 말고. <그 집>.”

    “몰라요. 처음 들어 봐요.”

    “다들 읽어 봐. 그게 이번에 우리가 촬영할 영화의 원작이 될 테니까.”

    사람들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조나단은 다 좋은데 이런 게 문제였다.

    생뚱맞고, 앞뒤가 없는 것.

    일어나 있던 직원이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자, 감독님.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구체적으로?”

    “네. 왜 그 작품을 선택하셨는지….”

    조나단은 멈칫했다.

    해주고 싶은 말들이야 많았다.

    머릿속에서 터져 나올 정도로.

    하지만 그걸 여기서 다 떠들고 있느니….

    그는 주위를 돌아봤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일정 정리용 칠판.

    그는 다짜고짜 칠판을 북북 지워 댔다.

    “감독님! 그거 지우면 어떡해요!”

    한 직원이 놀라 외쳤다.

    하지만 조나단이 아랑곳할 리가.

    직원들은 그렇게 한 달 일정이 무참히 지워지는 것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조나단은 보드마카를 들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판서를 하기 시작했다

    1. 주제 : <그 집>에 담긴 계급의식.

    특수한 인종을 등장시키지 않고 인종, 성별, 국적, 장애 등의 계급의식을 드러냄. 인종적 차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백인종만을 등장시키는 방법으로, 백인 중심주의의 규율을 역으로 폭로할 예정.

    2. 형식 : 컬트적 상상력과 몽타주.

    소설 <그 집>이 영화 <그 집>으로 변모했을 때, 컬트적 요소가 가미됨. 그것은 1에서 주지했던 차별을 느끼는 인간의 심리적 위축감을 극대화하여 표현하는 상징으로 활용 가능함. 또한 컬트적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몽타주와 그 몽타주로 생성되는 의미들은 영화 후반부로 모두 수렴되며 형식적 미학을 구축함.

    3. 인물 : 실존적 한계를 뛰어넘는 휴머니즘.

    주인공은 부모를 ‘살해’를 통해 잃음. 그것이 그녀 인생의 심리적 한계와 트라우마로 작용함. 하지만 그 트라우마의 증폭제인 ‘살해’를 ‘연쇄’적으로 행하는 양오빠를 스스로 감옥에 넣음으로써 극복 가능성을 실현. 이는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실존적 상황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휴머니즘적 메시지로 귀결.

    못 알아먹을 악필이지만, 내용은 놀라운 것이었다.

    주제, 형식, 인물이라는 삼박자.

    이 삼박자가 이렇게 탄탄한 글이 있다고?

    “됐지?”

    조나단은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은 멍하니 칠판만 바라보았다.

    벌컥!

    다시 조나단이 문을 열고 나왔다.

    “저기, 우리 스토리보드 누가 그리지?”

    “…저요.”

    한구석에서 빼빼 마른 남자, 알렉스가 손을 들었다.

    그는 조나단 사무실의 전속 스토리보드 작가이자, 영상편집자였다.

    “너구나. 알렉스. 들어와 봐.”

    하고 또 문을 닫고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정신없는 조나단의 행동은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됐다.

    “<그 집>이 정말 저런 내용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판서 내용은 기가 막히네.”

    한 직원이 말했다.

    그러자 다른 직원이 핀잔을 줬다.

    “몰랐어? 감독님 저래 봬도 하버드 나왔잖아. 하는 짓이 저래서 그렇지 똑똑한 양반이야.”

    한편 알렉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어. 들어와 봐.”

    조나단은 급하다는 듯 마주 보는 소파를 가리켰다.

    알렉스는 주춤주춤 다가와 소파에 걸터앉았다.

    “지금부터 잘 들어. 넌 나와 오늘 밤을 샐 거야.”

    “네?”

    ‘…제가 왜요?’

    알렉스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림만 잘 그리면 된다고 해서 입사를 한 건데 갑자기 왜 이런 시련이 자신에게?

    조나단은 테이블의 스토리보드를 슥 밀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지폐를 내밀었다.

    점점 더 영문을 모를 일에 알렉스의 눈이 커졌다.

    “지금 당장 나가서 <그 집>을 사서 읽어. 그리고 이 스토리보드를 이해해 와. 그러니까….”

    조나단이 시계를 봤다.

    “네 시간이면 충분하지?”

    “조….”

    “그리고 그다음엔.”

    조금 부족한데요.

    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조나단이 빨랐다.

    아니, 애초에 들을 마음이 없었을지도.

    “나랑 같이 스토리보드를 만들 거야.”

    “아… <그 집>으로요?”

    “응.”

    알렉스는 생각했다.

    그럼 지금 나한테 쥐어진 이 스토리보드는?

    “스토리보드를 다시 그리시게요?”

    “아니.”

    조나단은 테이블의 스토리보드를 툭 쳤다.

    “여기에 덧그릴 거야.”

    * * *

    <두 역사>에 대해서 온 유럽이 왈가왈부한다.

    그들의 역사의식을 내, 외부적으로 건드린 두 편의 글.

    동의도, 지지도, 비판도, 거부도 날이 갈수록 늘어간다.

    그 모습을 본 한국 언론도 가만히 있을 리 없었고.

    ― 괴짜 작가 이상, 다시 유럽을 흔들다

    ― 유럽의 뜨거운 감자. <갈림길>의 운명은?

    ― 식민지 지식인의 삶을 묘사한 에세이, <갈림길>. 대체 어떤 글이기에?

    국내에서는 <갈림길>에 대해 적잖이 궁금해했다.

    내 홈페이지의 <갈림길> 결제 수는 폭등.

    그와 별개로 ‘책’을 기다리는 이들도 정말 많았다.

    한편 나는 미쯔하루 편집장과 대화를 나눈 후.

    머리가 차갑게 식은 기분이었다.

    독자나 시장 반응에는 잠시 신경을 끄자.

    중요한 건 앞으로 내가 뭘 하느냐는 거다.

    새로운 소설을 쓰겠다고 다짐은 지금은 더욱, 내게 집중하자.

    나는 뮌 출판사에 메일을 썼다.

    용건은 총 두 가지였다.

    첫째, <갈림길>의 오프라인 독점 판매 계약이 끝났으니 이제 한국을 비롯한 모든 나라에 판매를 시작하겠다.

    둘째, <갈림길>과 배경이 비슷한 소설을 한 편 더 써보려 한다. 유럽 국가 중에서는 독일에서 가장 먼저 선보이고 싶은데, 뮌을 통해서 가능하겠는가.

    답장은 하루 만에 왔다.

    내용은 깔끔했다.

    독일을 제외한 곳에서 <갈림길>을 자유롭게 내도 좋다.

    새 소설에 대해선 꼭 발간처를 마련해 보겠다.

    독일인이 ‘꼭’이라 말했다면, 그건 ‘약속’이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난 오랜만에 ‘팀 이상’을 불러냈다.

    갑작스러운 부름에도 그들은 기꺼이 시간을 내줬다.

    종로의 술집에서 맥주를 한잔하면서 내 계획을 말했다.

    “그러니까… <갈림길>을 기반으로 새로운 소설을 쓴다고요?”

    “그럼 소설 배경도 경성이겠네요.”

    금홍과 지훈이 차례로 물었다.

    “그런 셈이죠. 소설이 완성되면 같이 좀 봐주세요. 지훈이도.”

    금홍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훈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형,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어울리지 않게 조심하는 말투.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물어봐.”

    “이미 완성된 에세이를 또 소설로 만드는 거… 혹시 일본에서 책 발간이 어려워서 그런 거예요?”

    “그런 것도 없지 않아 있지.”

    “형, 솔직하게 말해서 저는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형 지금도 잘 나가고 있고, 엄청난 것들을 쓸 수 있는데… 굳이 독일이나 일본이 불편해하는 것들을 다시 들춘다는 게….”

    녀석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지금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을 했다.

    “전 이해가 안 됩니다. 걱정되고요.”

    나 역시 지훈이 이해가 됐다.

    지금 이 두 사람 앞의 나는 ‘김혜경’이다.

    일제강점기와는 거리가 먼 청년 작가.

    게다가 일본에서 적잖은 인기를 얻고, 그 힘으로 유럽 진출까지 했으니 쓸데없는 소모전으로 비춰질 수도.

    하지만….

    “불편한 걸 들추려는 목적으로 소설을 쓰겠다는 게 아니야. 일본인이나 독일인들을 비난할 마음도 없고.”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을 비난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인터뷰에서도 말했잖아. ‘그건 너의 말’이라고.”

    난 그들의 죄를 지적한 적이 없다.

    그들 스스로 죄책감을 느낀 거지.

    그래도 지훈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즈음에서 날 이해할 거다.

    내게 호감을 느낀다면 응원을 할 테고.

    하지만 지훈은… 그래, 나도 안다.

    이해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마음을.

    “네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난 그 소설을 써야겠어. 그 소설은 이미 내 안에 있고, 끄집어내지 않고선 사라지게 할 방법이 없어.”

    “….”

    “그게 다야. 그리고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

    “세상 모든 사람이 ‘이상’하면 그 소설을 떠올렸으면 해.”

    내 불행한 전생.

    그 삶을 담은 글이 내 ‘대표작’이 된다면, 전생 역시 무의미한 삶은 아닐 테니.

    가만히 듣고 있던 금홍이 입을 열었다.

    “저도 걱정은 좀 돼요. 기사에서 하도 난리를 치니까.”

    “하아….”

    지훈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금홍은 괜찮다는 듯 지훈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하지만 응원해요, 혜경 샘.”

    그녀는 따뜻한 미소로 내게 말했다.

    “문창과 다니면서 여러 작가에 대해 배웠잖아요, 우리. 이 세상에 살다 갔던 수많은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행복한 작가란 인정을 많이 받거나 오래 살았던 사람이 아니더라고요.”

    “….”

    “쓰고 싶은 걸 써 낸 작가들이 행복한 작가죠.”

    그 말은, 정말이지 가슴에 와닿았다.

    잔뜩 구겨져 있던 지훈의 미간도 사르르 풀렸다.

    난 그런 말을 해준 금홍이 너무 고마워서, 차마 고맙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지훈만이 얼굴을 감싸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으… 금홍 샘이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돼!”

    “그래, 인마. 반만 닮아 봐라.”

    나는 괜히 머쓱해져서 지훈을 타박했다.

    힘이 나면서도 어딘지 쑥스러운 이 기분.

    “저, 잠깐 화장실 좀.”

    나는 슬쩍 자리를 떴다.

    뭔가 벅차오르는 기분에,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내친김에 볼일을 보고 잠깐 가게 밖에서 바람을 쐴 때였다.

    우웅―

    SNS 메시지가 왔다.

    뭔가 해서 봤더니, 조나단이었다.

    그는 다른 말 하나 없이 사진을 보냈다.

    “뭐지?”

    중얼거리며 사진을 확대했다.

    “어?”

    내 눈에 들어온 그것은… 스토리보드의 한 컷이었다.

    그런데… 뭔가가 더 첨부되어 있었다.

    수지의 첫 등장 장면.

    어린 수지의 강단 있는 얼굴을 그린 컷.

    조나단이 덧그린 부분은 수지의 눈동자였다.

    그녀의 어두운 푸른 눈동자.

    그 동공에는 분명 하얀 빛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바로 이해했다.

    수지는 지금 자신이 입양될 ‘그 집’을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 과장된 하얀 빛은… 후광이다.

    바로 나중에 양오빠에게서 보게 될 후광.

    그것을 ‘그 집’에 복선처럼 깔아 줌으로써, 이 작품의 비판 지점을 ‘양오빠’에서 ‘그 집’으로 확대한다.

    ‘그 집’이 ‘미국 사회’를 상징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 어때요? 이런 걸 잔뜩 그렸는데.

    그는 마치 물건을 파는 사람처럼 말했다.

    짓궂고 장난스럽지만, 보물을 품고 있는 장사꾼.

    나는 번역기를 돌려가면서 그에게 답장을 했다.

    ― 제 스토리보드를 완성해 주실 건가요?

    ― 시켜만 주신다면.

    순식간에 수많은 사진들이 한꺼번에 날아왔다.

    모두 그가 덧그린 스토리보드였다.

    나는 한 컷 한 컷 그 사진들을 살펴봤다.

    하나같이 훌륭했다.

    내 의도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이미지의 매력을 살려 주는 수정들.

    프로란 이런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전 이제 밑천 다 털었는데요.

    그가 말했다.

    나는 바로 대답했다.

    ― 좋아요. 시켜 드릴게요. <그 집>의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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