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30화 (130/204)

130회

― 독일의 무식함에 몸이 떨릴 지경입니다.

기자는 깜짝 놀랐다.

생방송인지라 편집도 못 할 텐데… 또 한바탕 난리가 나겠군.

“와… 일침 장난 아니네요.”

지훈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왠지 저게 끝이 아닐 것 같은데?”

난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말했다.

그리고 내 말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 틸, 너무 흥분하지 말고 말해 주세요. <두 역사>를 향한 어떤 반응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 첫째, 2차 세계대전과 식민지 문제와 오늘날의 후손들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들이 많던데… 독일이건 일본이건 식민지를 가짐으로써 많은 경제적 이득을 취득하지 않았습니까? 그 이점으로 오늘날 후손이 풍요롭게 살 터전을 마련했고요. 전 독일인들이 제발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당신들이 다른 나라 국민들보다 좀 더 부유한 나라에 사는 것 같다면, 그 안엔 선조의 침략 전쟁이 남긴 유산이 섞여 있다고요.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침략 전쟁을 당한 나라의 후손에게 빚이 있는 겁니다. 그런 역사가 없었다면 그들은 지금 더 풍요롭게 살고 있었을 테니까요.

…언변도 언변이지만, 대단히 윤리적인 생각이었다.

식민지배를 당한 나라의 입장에선 당연한 생각이라도, 독일인의 입장에서는 쉽지 않았을 텐데.

그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 둘째, 이상 작가의 글은 독일과 관련이 없는데 왜 독일에서 책을 내는 것이냐는 멍청한 소릴 들었습니다. 이보세요. 침략 전쟁이나 학살, 인종차별은 국가적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독일이 심각한 학살 문제를 겪었는데 세계의 모든 나라가 자신의 나랏일이 아니란 이유로 모른 척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습니까?

기자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 절망스럽겠죠.

― 네! 당연하죠. 전쟁과 학살은 인간성의 문제거든요. 인간으로서, 어떻게 인간을 학살할 수 있나? 어떻게 학살의 피해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나? 이 문제라는 겁니다! 만약 이게 인간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람이 있다면….

틸 버켈은 꾹 참아 왔던 한 마디를 내뱉었다.

― 그는 나찌와 다를 바 없는 사람 아닙니까?

“…헉.”

“아….”

지훈과 나는 탄성을 질렀다.

나찌. 곧 히틀러의 추종자를 이르는 말이었다.

독일에서 ‘나찌’는 일종의 터부였다.

최악의 경멸이자 인간 이하의 이르는 멸칭.

― 나… 찌라고 하셨습니까?

기자는 그 단어를 입에 담기조차 어려워했다.

틸 버켈은 그 무엇도 무섭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 네. 나찌요. 내 말이 틀렸습니까?

스튜디오에 정적이 흘렀다.

기자는 그의 ‘나찌’ 발언에 대해 첨언하지 않았다.

거기서 한마디라도 거들었다간, 그 역시 골치 아픈 싸움에 휘말릴 수 있으니.

대신 그는 화제를 돌렸다.

― 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죠. <갈림길>이 독일인의 죄책감을 자극한단 의견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푸후후….

그가 웃었다.

그리고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 인정합니다. 저도 그 에세이를 읽고 한동안 죄책감을 느꼈거든요.\

― 이상 작가에게 그런 의도가 있었을까요?

― 그건… 이상 작가에게 물으시죠. 제가 그 글을 쓴 건 아니잖습니까.

하고 장난기 어린 얼굴로 카메라를 보았다.

당신도 한마디 하지그래?

그는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기자는 얼른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시간이 다 됐는지, 이 인터뷰의 파장이 겁이 났는지는 몰라도.

― 아, 네. 그렇군요. 틸 버켈. 그럼 조만간 이상 작가의 인터뷰를 들어 봐야겠습니다. 지금까지 D―TV 뉴스, 틸 버켈과의 인터뷰였습니다.

그의 뉴스 인터뷰는 그렇게 끝이 났다.

“…형.”

지훈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인터뷰 오는 건 다 막을게요. 여기서 말 잘못 했다간 진짜 큰일 나요.”

멈춰진 영상의 틸 버켈.

그의 상기된 얼굴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틸 버켈’이라도 ‘나찌’ 발언은… 선을 넘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두 역사>를 비판하는 이들의 논리가 선을 넘었으니.

같이 선을 넘지 않고는 제대로 된 비판이 불가능하다.

그는 철학자로서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욕을 먹으면서도 존경받는 이유겠지.

그리고 나는… ‘죄책감을 주는 글’을 쓴 작가로서, 할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훈아, 인터뷰 좀 잡아 줘. 신문 쪽으로.”

“…네? 진심이에요? 아, 안 돼요! 진짜 큰일 나요! 틸 버켈 저 사람은 그나마 독일인이잖아요. 형은 괜히 그런 일에 휩싸여서….”

“괜찮아. 그리고 하는 게 맞아.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물러날 수도 없고.”

지금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들에게 난 겁에 질린 동양인에 불과하게 된다.

틸 버켈도 그걸 모르지 않겠지.

그래서 내가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것이고.

…심술 맞기는.

내가 심약한 사람이었다면 틸 버켈이 미웠을 거다.

“뭐, 뭐라고 말하게요…?”

“그들의 죄책감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하다잖아. 그럼 말해 줘야지.”

* * *

인터뷰는 D―TV 계열의 신문사 D―Z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뮌과 충분한 협의를 거친 후 결정한 사항이었다.

인터뷰는 전화 방식을 선택했다.

원래는 영상으로 하려 했지만, 지훈이 그것만은 극구 말려서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동이 터 오는 새벽.

나는 내 방에 가만히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곧 신문사 인터뷰 전화가 걸려 올 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본 여론도 이 사건을 눈여겨보고 있지 않을까?

나는 일찍이 도마크 출판사에 <갈림길> 원고를 보냈다.

그리고 여전히… 도마크 쪽에선 아무런 연락이 없다.

도마크는 특별한 역사적 스탠스가 없는 곳이다.

굳이 말하자면, ‘중도’겠지.

그런 출판사마저 <갈림길>을 내길 꺼리는 걸 보면,

그쪽의 여론 분위기도 짐작이 가능하다.

미움받는 건 두렵지 않다.

실망시키는 것도 두렵지 않고.

내가 바라는 건 한 가지다.

그들이 내 글을 읽는 것.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혹은 거부할 수도 있지.

하지만 그건 그들의 몫이다.

글을 써서 전달하는 게 작가인 나의 몫인 것처럼.

처음에 인터뷰를 결심했을 땐 할 말이 많았다.

독일 국민들의 ‘상식 밖’의 비난 때문이었을까.

내가 쓴 에세이의 모든 글자를 설명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도 답답한 마음이 해소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을 정리할수록, 마음이 가라앉았다.

모든 건 다 글에 다 썼다.

첨언은 사족이나 다름없다.

다만, 단 한 마디를 덧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웅― 우웅―

…전화가 걸려왔다.

국제 전화 번호.

독일의 신문사였다.

“여보세요.”

― 네. 여기는 독일의 D―Z입니다. 이상 작가님 되십니까?

“네. 맞습니다.”

안정적인 말 속도와 또렷한 발음.

그는 자신이 전문 통역사라고 말했다.

인터뷰는 동시통역으로 진행되었다.

― 틸 버켈의 인터뷰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철학자로서 해야 할 말을 적확하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 그의 과격한 표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독일인들에게 터부시되는 표현을 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 단어에 집중한다기보다는 그 단어가 나올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이유에 집중하는 게 더 생산적인 논의로 발전할 지름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갈림길>의 작의에 대해 물어도 될까요?

“한 사진에 숨어 있는 감정을 읽어 낸 겁니다. 틸이 드레스덴 대성당에서 자본주의의 시작을 읽어 냈듯, 저는 경성 거리의 풍경에서 오늘날 한국인의 내면을 읽어 낸 거죠.”

― <갈림길>에 대한 독일의 일부 시민들의 비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슬펐습니다.”

그쪽에선 잠시 말이 없었다.

내 대답을 어떻게 되물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 무엇이 슬프셨습니까.

“제가 쓴 글은 분명 이 세상에 존재했던 이의 내면이었습니다. 그 내면이 외면받았다는 생각에 슬펐습니다.”

― 실제로 존재했던 이의 내면이라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사실과 상상력이 더해진 결과라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잠시 말이 없었다.

애매한 내 대답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겠지.

이윽고, 또다시 질문이 왔다.

― 독일의 일부 독자들은 <갈림길>이 독일인이나 일본인 등 전범국 후손들의 죄책감을 자극하기 위해 쓰여졌다고 주장하는데요, 그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멈칫했다.

침묵이 흘렀다.

기자는 날 재촉하지 않았다.

바로 이 질문이, 이 인터뷰의 목적이자 본질이기에.

“저는 종교가 없습니다. 신을 믿지도 않아요.”

― 예?

뜬금없이 무슨 말이냐는 반응.

“하지만 성경이나 불경에 대해 관심이 없지 않죠. 독일은 기독교와 가톨릭의 비율이 반 이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편하게 말할 수 있겠네요.”

― ….

“유명한 이야깁니다.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기기 전날, 예수가 말하지 않습니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거라고. 그에 유다는 이렇게 말하고요. 선생님, 저는 아니겠죠? 그에 예수가 뭐라고 말하던가요.”

― ‘그것은 너의 말이다.’ 아닙니까?

그것은 너의 말이다.

예수의 유명한 대답이다.

유다는 자신이 그렇게 말함으로써, 배반을 예언한다.

즉, 배반이라는 건 다른 곳이 아니라 유다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

― 그 말은….

“저는 1930년대를 살아간 한 남자의 이야기를 소설적 에세이로 풀어냈을 뿐입니다. 누군가 그것에 죄책감을 느꼈다면… 이미 그 사람의 마음에 죄책감이 있던 거겠죠. 제가 드릴 말은 이게 다입니다.”

인터뷰는 그렇게 끝이 났다.

나는 전화를 끊고도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 인터뷰의 결과는 복불복이다.

나를 더 미워하거나, 혹은 비로소 이해하거나.

* * *

일본, 도쿄.

도마크 출판사 본사 편집장실.

미쯔하루 편집장은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얼마 전 이상 작가의 신작 <갈림길>을 받았을 때.

그것을 읽어 보고 상당히 난감했다.

글이야 제대로였다.

언제 이상 작가가 글로 실망을 시킨 적이 있나.

문제는 배경이었다.

하필이면 1930년대라니.

그 시절에 망가진 조선인의 내면을 담은 에세이.

그것을 도마크의 이름을 달고 발간한다면….

생각만 해도 곤란했다.

이상의 글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특정 정치 세력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동안 지켜만 봤다.

독일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고.

아니나 다를까.

<갈림길>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다.

그것도 안 좋은 의미로.

‘독일이 저럴 진데, 일본은 더하겠지.’

미쯔하루 편집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화제작이니 뭐니 하면서 홍보를 할 순 있었다.

책이야 잘 팔리겠지.

하지만 그 후에는?

누가 도마크와 이상을 보호해 준단 말인가.

그리고 지금… 미쯔하루 편집장은 또 한 번 놀랐다.

이상이 독일에서 한 인터뷰.

그 인터뷰 때문에 독일 언론이 떠들썩했다.

‘그것은 너의 말이다.’

이 말에 담긴 함의.

그것은 독일인들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갈림길>에 전범국을 비판하는 내용은 없다.

죄책감을 느끼는 건 독일의 독자들이지.

이상은 이 점을 확실하게 집어냈다.

그리고… 여론의 불을 확 댕겼다.

독일 국민을 ‘유다’에 비유한 것에 화를 내는 이들.

그 적확한 비유에 감화되어 이상을 인정하는 이들.

그들은 넷상에서 득달같이 싸우고 있었다.

‘아직 그 인터뷰를 한 지 반나절이 지났을 뿐이다. 며칠 후면 언론과 방송, 신문을 뒤덮을 거야.’

미쯔하루 편집장은 감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논란은 반드시 일본에도 번진다.’

그 전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갈림길>에 대한 도마크의 태도를.

미쯔하루 편집장은 엄숙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보았다.

모니터에는 이상의 원고 <갈림길>이 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비서가 들어왔다.

“편집장님. 이사회 회의 가실 시간입니다.”

“…그래, 가지.”

미쯔하루 편집장은 결연하게 일어났다.

이 회의에서 <갈림길>의 발간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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