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29화 (129/204)
  • 129회

    ― 아! 나 백인만 잔뜩 나오는 영화도 찍을 수 있는데!

    조나단 란스마이어 감독의 이 말.

    그는 워낙에 미국의 유명인사이기에, 이 짹짹이 피드는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사 버렸다.

    지훈과 나는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은 그 글의 의미를 저들끼리 추론했다.

    ― 조나단 다음 신작은 백인이 주인공일지도 몰라.

    ― 조나단이 만든 백인 영화라… 벌써부터 뭔가 섬뜩한데?

    이런식의 짐작들이 짹짹이를 채웠다.

    나와 이런 밀고 당기기를 하는지는 절대 모르겠지.

    그는 영민한 감독이다.

    의외로 컬트적 감각도 있고.

    고민 끝에 난 번역기를 돌려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사이에 인사치레는 필요 없었다.

    마치 벌써부터 친구라도 된 느낌으로 이렇게 물었다.

    ― 흑인이 안 나와도 괜찮아요?

    답장은 바로 날아왔다.

    ― 백인만 나오는 영화에서 인종차별을 느끼게 할 수 있다면 그만큼 세련된 작품도 없겠죠.

    그리고 이런 농담도 덧붙였다.

    ― 벗지 않고도 섹시한 사람처럼.

    기발한 비유였다.

    벗지 않고도 섹시한 사람.

    백인만 나오지만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영화.

    다 같은 맥락이었다.

    나는 또 메시지를 보냈다.

    ― 아직 제대로 된 시나리오도 없어요. 스토리보드만 있는데요. 나중에 시나리오도 제가 썼으면 하고요.

    그러자 단 한 마디만이 돌아왔다.

    ― Cool(좋아요).

    그쯤 되니 나도 그가 꽤 마음에 들었다.

    시원시원한 화법과 유머러스한 코드.

    덧붙여 예술적 감수성까지.

    더 망설일 것 없었다.

    나는 그에게도 스토리보드를 보내기로 했다.

    이틀 후.

    피터 한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스토리보드의 번역이 끝났다는 것이다.

    소설로 번역을 했던 작품이라 그런가.

    확실히 번역 속도가 빠르다.

    “감사합니다. 급하게 맡긴 일인데.”

    ― 금홍 학생이 번역을 다 해 왔어요. 손댈 곳이 많이 없어서 살짝 다듬기만 했습니다.

    금홍이가 잘 해 준 모양이구나.

    왠지 내가 다 뿌듯했다.

    ― 작가님이 그림도 그리셨다면서요?

    비웃는 듯한 특유의 말투.

    난 좀 민망해졌다.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 사실 만화는 유치해서 읽지 않는데… 만화 보듯이 스토리보드를 보게 되더군요.

    스토리보드는 만화의 구성과 닮긴 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영화인이 아닌 사람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지.

    “어떻던가요? 너무 어렵진 않던가요?”

    ― 어려운 것보다… 제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컬트적인 영화를 만든다고 들었는데요. 그런 영화는 딱 질색이라서요. 튀려고 애쓰는 느낌이 여실히 들어서.

    피터 한 교수야 그렇겠지.

    장르 소설도 안 보는 사람에게 뭘 바라랴.

    뭐, 내가 묻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그래서, 재밌었습니까?”

    내 말에 그는 대답이 없었다.

    아마 ‘재미’적 측면에서는 생각해 보지 않은 걸지도.

    잠시 후, 그가 대답했다.

    ― 취향을 떠나서, 한 번도 쉬지 않고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이 있더군요. 그 이미지들.

    “그게 바로 이미지의 힘이죠.”

    ― 난 더 말하지 않을래요. 다음에는 순문학을 가져와 줘요.

    좋다.

    피터 한에게 이 정도 평가면 큰 칭찬이었다.

    끝까지 봤다는 것.

    그만큼 시선을 사로잡았다는 거니까.

    컬트에서 시선을 끄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다.

    피터 한 교수가 보내온 스토리보드의 파일.

    나는 그것을 세 권 제본했다.

    그리고 국제 우편으로 그것을 미국으로 보냈다.

    도착지는 누들 출판사.

    먼저 조나단 감독에게 한 권을 보내고.

    만약 그가 거절한다면 멜라니 라쉬에게.

    그녀 역시 거절한다면 리치 파블로프스키에게 보내 달라 양해를 구한 상태였다.

    때마다 한국에서 택배를 보내면 시간이 많이 걸릴 테니까.

    한편으론 이런 불안이 들기도 했다.

    세 명의 감독 모두 <그 집>을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어쨌건 영화는 내 주 장르가 아니니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남은 건 얌전히 기다리는 일뿐.

    * * *

    틸 버켈과 함께 쓴 에세이 <두 역사>.

    며칠 전 독일에서 발간이 됐다.

    물론 내게도 국제 우편으로 책이 도착했다.

    책을 보고, 난 좀 놀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작은 크기.

    거칠거칠한 표지의 느낌.

    무채색으로 뒤덮인 색감.

    이 책의 의도는… 명확했다.

    근현대사에 대한 고발과 애도.

    독일어라 알아볼 순 없었다.

    다만 모든 왼쪽 페이지에 들어간 사진들.

    난 그 사진들을 꽤 신중히 들여다보았다.

    1부, 틸 버켈의 <검은 성>.

    재로 뒤덮인 드레스덴 대성당.

    연합군과 독일군이 대치하는 상황.

    전쟁터의 참상과 독일의 만행들이 담긴 사진.

    2부, 이상의 <갈림길>.

    경성 한복판에서 행렬하는 일본군.

    일제강점기의 분위기가 나는 경성의 사진들.

    그 당시 지식인들의 어딘지 슬픈 얼굴들.

    책장을 넘기다가, 나는 멈칫했다.

    그리고 실소를 내뱉고 말았다.

    “이게 누구야.”

    ‘지식인’을 대표하는 문인들을 모아 둔 사진.

    그중에는 ‘구인회’도 있었다.

    나는 그 안에서 반가운 얼굴을 찾았다.

    바로 전생의 ‘이상’이었다.

    비쩍 마른 몰골.

    지식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식민지인으로서의 불안함.

    그 두 가지가 섞인 듯한 불편한 표정.

    내가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구나.

    나는 호기심에 거울 앞에 섰다.

    내 앞에는, 정확히 말하자면 혜경의 껍데기가 서 있었다.

    하지만 눈과 표정은 정신을 드러내는 창.

    이 얼굴은 분명 나의 내면을 반영하고 있다.

    나는 빤히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불안감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삶에 대한 기대와 약간의 긴장감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이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확실히… 전생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살게 됐구나, 나.

    나는 <두 역사>를 덮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한번 꽉 쥐었다.

    틸 버켈의 제안으로 시작한 이 책.

    어느덧 내게 남다른 의미가 되었다.

    내 기억과 내면을 이렇게까지 드러낸 적이 없었으니.

    또… <갈림길>을 쓰면서 나 역시 위안을 받았고.

    나는 <두 역사>를 책장에 소중하게 꽂아 놓았다.

    한 가지 욕심이 더 있다면… 일본에도 저 책이 번역되었으면 했다.

    이준환 편집위원은 어려울 거라고 말했다.

    도마크 출판사에 원고를 보낸 지 오래다.

    하지만 미쯔하루 편집장에겐 오랫동안 연락이 없다.

    내 책이라면 뭐든 발간하겠다는 말이 무색하게.

    도마크는 내게 상당히 호의적인 출판사다.

    역사의식이 문제 된 적도 없고.

    그런 출판사마저 책을 내길 꺼린다면, 과연 일본에 <갈림길>을 내보일 수 있을까.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문제가 터졌다.

    바로 독일 현지였다.

    <두 역사>가 발간된 지 며칠 후.

    독일 언론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그것도 뮌 출판사를 거치치 않은 채로 말이다.

    일단 모두 거절을 하고… 뮌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두 역사>에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두 역사>의 판매 페이지에만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이렇게나 반응이 좋았나?

    그랬다면 뮌 쪽에서 말을 했을 법한데?

    나는 인터넷 브라우저 자동번역을 이용하기로 했다.

    수많은 독일어 댓글들이 어색한 한국어로 변했다.

    그 내용은… 대충 이런 식이었다.

    ― 틸 이야기는 납득이 됨. 결국 역사의 흐름에 대한 거잖아. 그런 거시적 시선은 분명 필요하지. 하지만 이상의 말은 좀 너무했어. 식민지인의 내면? 좋다 이거야.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게 어떻다는 거지? 후손들한테 뭘 바래?

    ― 난 이상이 저런 글을 쓴 것도 이해해. 한국도 일본한테 괴롭힘을 많이 당했잖아. 하지만 그런 내용을 독일에서 발표하는 저의가 뭔데? 왜 그 책임을 독일에게 물어?

    ― 이상은 문창과를 나왔다지? 확실히 평생 철학을 공부한 틸 만큼 사유의 깊이가 깊지 않구나….

    ― 동의.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좁아. 역사에 대해 말하라고. 개인의 슬픈 내면 말고. 지금 우리의 죄책감을 일부러 자극하는 건가?

    ― 식민지를 당했던 나라 국민들은 다 똑같아. 자신들의 선조가 당했던 문제를 마치 자기가 당한 것처럼 전시하잖아. 독일이나 일본의 죄책감을 자극해서 뭘 얻으려는 거겠어? 결국 경제적 이득 아냐?

    충격적인 반응들이었다.

    독일은 과거사 문제를 깨끗하게 인정한 거로 유명한 나라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

    잘못을 인정하는 게 용기라면,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다.

    내 글이 독일에서 적잖은 반감을 산 걸까.

    <두 역사>의 판매 순위는 벌써 7위.

    나온 지 일주일도 안 되었는데 말이다.

    마침 뮌 쪽에서도 연락이 왔다.

    도미닉 팀장이 다이앤 통역사를 끼고, 직접 전화로.

    ― 많이 놀라셨을 거라 생각한 끝에 더 늦기 전에 연락을 드립니다. 독일 현지에서는 작가님의 작품에 대한 다양한 비평과 감상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는 역사적 견해가….

    다이앤은 말을 골랐다.

    도미닉 팀장이 자극적인 표현을 쓴 것 같았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괜찮아요.”

    ― 어… 역사적 견해가 상식선과 많이 어긋난 이들의 의견도 적지 않습니다. 사실 아예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루는 책을 낼 때마다 이런 일들을 치르곤 하니까요.

    “하지만 이번 일은 다소 심하죠?”

    ― …네. 아무래도 외국 작가의 글이다 보니 더 반발심을 산 경향이 없잖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반증으로. 틸 버켈에게는 별다른 반감을 보이지 않던데요.”

    ― 틸이야 워낙에 그런 글들을 써왔으니까요. 이미 만성적인 안티들을 몰고 다닌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뮌은 두 작가님의 글과 견해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작가님에게 피해가 갈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거라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그러니 작가님께서도 저희를 믿고 <두 역사>에 대한 인터뷰나 SNS 언급을 당분간 자제해주시기를 요청드립니다.

    그러니까… 상황이 좀 수그러들 때까지 대중을 자극하지 말아 달라 이거군.

    “가능한 그렇게 하겠습니다. 인터뷰는 원래 잘 하지 않는 편이라서요.”

    ―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뮌은 이상 작가님을 지지합니다. 세상에 빛을 발하기 전에 고초부터 치루는 책들이 있죠. <두 역사>야말로 그런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빛을 발하기 전에 고초부터 치루는 책이라.

    그 말을 들으니, 좀 안심이 됐다.

    뮌 출판사가 태도를 확실하게 해 주는 것 같아서.

    ― 아, 오늘 뉴스에서 틸 버켈이 <두 역사>에 관한 인터뷰를 합니다. 그 부분을 녹화해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틸 버켈의 인터뷰라.

    기대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네. 그럼 부탁드리죠.”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정말로 뮌은 뉴스 영상 하나를 보내왔다.

    친절하게 한글 자막까지 달아 둔 파일이었다.

    상황을 알고 있는 지훈이 조심스레 물었다.

    “틸은 말하는 게 좀 거칠다고 하지 않았어요? 걱정되는데….”

    “거칠면 좀 어때. 틀린 말만 안 하면 되지.”

    하지만 그건 정말 안일한 생각이었다.

    틸 버켈의 인터뷰는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뉴스 스튜디오에 앉은 틸 버켈.

    그는 벌써부터 화가 잔뜩 난 것 같았다.

    기자가 틸에게 물었다.

    ― 틸, 요즘 <두 역사>의 반응이 여러모로 정말 뜨거운데요. 이런 반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틸은 별안간 카메라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했다.

    ― 독일의 무식함에 몸이 떨릴 지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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