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회
― 아! 나 백인만 잔뜩 나오는 영화도 찍을 수 있는데!
조나단 란스마이어 감독의 이 말.
그는 워낙에 미국의 유명인사이기에, 이 짹짹이 피드는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사 버렸다.
지훈과 나는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은 그 글의 의미를 저들끼리 추론했다.
― 조나단 다음 신작은 백인이 주인공일지도 몰라.
― 조나단이 만든 백인 영화라… 벌써부터 뭔가 섬뜩한데?
이런식의 짐작들이 짹짹이를 채웠다.
나와 이런 밀고 당기기를 하는지는 절대 모르겠지.
그는 영민한 감독이다.
의외로 컬트적 감각도 있고.
고민 끝에 난 번역기를 돌려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사이에 인사치레는 필요 없었다.
마치 벌써부터 친구라도 된 느낌으로 이렇게 물었다.
― 흑인이 안 나와도 괜찮아요?
답장은 바로 날아왔다.
― 백인만 나오는 영화에서 인종차별을 느끼게 할 수 있다면 그만큼 세련된 작품도 없겠죠.
그리고 이런 농담도 덧붙였다.
― 벗지 않고도 섹시한 사람처럼.
기발한 비유였다.
벗지 않고도 섹시한 사람.
백인만 나오지만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영화.
다 같은 맥락이었다.
나는 또 메시지를 보냈다.
― 아직 제대로 된 시나리오도 없어요. 스토리보드만 있는데요. 나중에 시나리오도 제가 썼으면 하고요.
그러자 단 한 마디만이 돌아왔다.
― Cool(좋아요).
그쯤 되니 나도 그가 꽤 마음에 들었다.
시원시원한 화법과 유머러스한 코드.
덧붙여 예술적 감수성까지.
더 망설일 것 없었다.
나는 그에게도 스토리보드를 보내기로 했다.
이틀 후.
피터 한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스토리보드의 번역이 끝났다는 것이다.
소설로 번역을 했던 작품이라 그런가.
확실히 번역 속도가 빠르다.
“감사합니다. 급하게 맡긴 일인데.”
― 금홍 학생이 번역을 다 해 왔어요. 손댈 곳이 많이 없어서 살짝 다듬기만 했습니다.
금홍이가 잘 해 준 모양이구나.
왠지 내가 다 뿌듯했다.
― 작가님이 그림도 그리셨다면서요?
비웃는 듯한 특유의 말투.
난 좀 민망해졌다.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 사실 만화는 유치해서 읽지 않는데… 만화 보듯이 스토리보드를 보게 되더군요.
스토리보드는 만화의 구성과 닮긴 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영화인이 아닌 사람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지.
“어떻던가요? 너무 어렵진 않던가요?”
― 어려운 것보다… 제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컬트적인 영화를 만든다고 들었는데요. 그런 영화는 딱 질색이라서요. 튀려고 애쓰는 느낌이 여실히 들어서.
피터 한 교수야 그렇겠지.
장르 소설도 안 보는 사람에게 뭘 바라랴.
뭐, 내가 묻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그래서, 재밌었습니까?”
내 말에 그는 대답이 없었다.
아마 ‘재미’적 측면에서는 생각해 보지 않은 걸지도.
잠시 후, 그가 대답했다.
― 취향을 떠나서, 한 번도 쉬지 않고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이 있더군요. 그 이미지들.
“그게 바로 이미지의 힘이죠.”
― 난 더 말하지 않을래요. 다음에는 순문학을 가져와 줘요.
좋다.
피터 한에게 이 정도 평가면 큰 칭찬이었다.
끝까지 봤다는 것.
그만큼 시선을 사로잡았다는 거니까.
컬트에서 시선을 끄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다.
피터 한 교수가 보내온 스토리보드의 파일.
나는 그것을 세 권 제본했다.
그리고 국제 우편으로 그것을 미국으로 보냈다.
도착지는 누들 출판사.
먼저 조나단 감독에게 한 권을 보내고.
만약 그가 거절한다면 멜라니 라쉬에게.
그녀 역시 거절한다면 리치 파블로프스키에게 보내 달라 양해를 구한 상태였다.
때마다 한국에서 택배를 보내면 시간이 많이 걸릴 테니까.
한편으론 이런 불안이 들기도 했다.
세 명의 감독 모두 <그 집>을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어쨌건 영화는 내 주 장르가 아니니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남은 건 얌전히 기다리는 일뿐.
* * *
틸 버켈과 함께 쓴 에세이 <두 역사>.
며칠 전 독일에서 발간이 됐다.
물론 내게도 국제 우편으로 책이 도착했다.
책을 보고, 난 좀 놀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작은 크기.
거칠거칠한 표지의 느낌.
무채색으로 뒤덮인 색감.
이 책의 의도는… 명확했다.
근현대사에 대한 고발과 애도.
독일어라 알아볼 순 없었다.
다만 모든 왼쪽 페이지에 들어간 사진들.
난 그 사진들을 꽤 신중히 들여다보았다.
1부, 틸 버켈의 <검은 성>.
재로 뒤덮인 드레스덴 대성당.
연합군과 독일군이 대치하는 상황.
전쟁터의 참상과 독일의 만행들이 담긴 사진.
2부, 이상의 <갈림길>.
경성 한복판에서 행렬하는 일본군.
일제강점기의 분위기가 나는 경성의 사진들.
그 당시 지식인들의 어딘지 슬픈 얼굴들.
책장을 넘기다가, 나는 멈칫했다.
그리고 실소를 내뱉고 말았다.
“이게 누구야.”
‘지식인’을 대표하는 문인들을 모아 둔 사진.
그중에는 ‘구인회’도 있었다.
나는 그 안에서 반가운 얼굴을 찾았다.
바로 전생의 ‘이상’이었다.
비쩍 마른 몰골.
지식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식민지인으로서의 불안함.
그 두 가지가 섞인 듯한 불편한 표정.
내가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구나.
나는 호기심에 거울 앞에 섰다.
내 앞에는, 정확히 말하자면 혜경의 껍데기가 서 있었다.
하지만 눈과 표정은 정신을 드러내는 창.
이 얼굴은 분명 나의 내면을 반영하고 있다.
나는 빤히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불안감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삶에 대한 기대와 약간의 긴장감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이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확실히… 전생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살게 됐구나, 나.
나는 <두 역사>를 덮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한번 꽉 쥐었다.
틸 버켈의 제안으로 시작한 이 책.
어느덧 내게 남다른 의미가 되었다.
내 기억과 내면을 이렇게까지 드러낸 적이 없었으니.
또… <갈림길>을 쓰면서 나 역시 위안을 받았고.
나는 <두 역사>를 책장에 소중하게 꽂아 놓았다.
한 가지 욕심이 더 있다면… 일본에도 저 책이 번역되었으면 했다.
이준환 편집위원은 어려울 거라고 말했다.
도마크 출판사에 원고를 보낸 지 오래다.
하지만 미쯔하루 편집장에겐 오랫동안 연락이 없다.
내 책이라면 뭐든 발간하겠다는 말이 무색하게.
도마크는 내게 상당히 호의적인 출판사다.
역사의식이 문제 된 적도 없고.
그런 출판사마저 책을 내길 꺼린다면, 과연 일본에 <갈림길>을 내보일 수 있을까.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문제가 터졌다.
바로 독일 현지였다.
<두 역사>가 발간된 지 며칠 후.
독일 언론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그것도 뮌 출판사를 거치치 않은 채로 말이다.
일단 모두 거절을 하고… 뮌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두 역사>에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두 역사>의 판매 페이지에만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이렇게나 반응이 좋았나?
그랬다면 뮌 쪽에서 말을 했을 법한데?
나는 인터넷 브라우저 자동번역을 이용하기로 했다.
수많은 독일어 댓글들이 어색한 한국어로 변했다.
그 내용은… 대충 이런 식이었다.
― 틸 이야기는 납득이 됨. 결국 역사의 흐름에 대한 거잖아. 그런 거시적 시선은 분명 필요하지. 하지만 이상의 말은 좀 너무했어. 식민지인의 내면? 좋다 이거야.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게 어떻다는 거지? 후손들한테 뭘 바래?
― 난 이상이 저런 글을 쓴 것도 이해해. 한국도 일본한테 괴롭힘을 많이 당했잖아. 하지만 그런 내용을 독일에서 발표하는 저의가 뭔데? 왜 그 책임을 독일에게 물어?
― 이상은 문창과를 나왔다지? 확실히 평생 철학을 공부한 틸 만큼 사유의 깊이가 깊지 않구나….
― 동의.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좁아. 역사에 대해 말하라고. 개인의 슬픈 내면 말고. 지금 우리의 죄책감을 일부러 자극하는 건가?
― 식민지를 당했던 나라 국민들은 다 똑같아. 자신들의 선조가 당했던 문제를 마치 자기가 당한 것처럼 전시하잖아. 독일이나 일본의 죄책감을 자극해서 뭘 얻으려는 거겠어? 결국 경제적 이득 아냐?
충격적인 반응들이었다.
독일은 과거사 문제를 깨끗하게 인정한 거로 유명한 나라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
잘못을 인정하는 게 용기라면,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다.
내 글이 독일에서 적잖은 반감을 산 걸까.
<두 역사>의 판매 순위는 벌써 7위.
나온 지 일주일도 안 되었는데 말이다.
마침 뮌 쪽에서도 연락이 왔다.
도미닉 팀장이 다이앤 통역사를 끼고, 직접 전화로.
― 많이 놀라셨을 거라 생각한 끝에 더 늦기 전에 연락을 드립니다. 독일 현지에서는 작가님의 작품에 대한 다양한 비평과 감상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는 역사적 견해가….
다이앤은 말을 골랐다.
도미닉 팀장이 자극적인 표현을 쓴 것 같았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괜찮아요.”
― 어… 역사적 견해가 상식선과 많이 어긋난 이들의 의견도 적지 않습니다. 사실 아예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루는 책을 낼 때마다 이런 일들을 치르곤 하니까요.
“하지만 이번 일은 다소 심하죠?”
― …네. 아무래도 외국 작가의 글이다 보니 더 반발심을 산 경향이 없잖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반증으로. 틸 버켈에게는 별다른 반감을 보이지 않던데요.”
― 틸이야 워낙에 그런 글들을 써왔으니까요. 이미 만성적인 안티들을 몰고 다닌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뮌은 두 작가님의 글과 견해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작가님에게 피해가 갈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거라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그러니 작가님께서도 저희를 믿고 <두 역사>에 대한 인터뷰나 SNS 언급을 당분간 자제해주시기를 요청드립니다.
그러니까… 상황이 좀 수그러들 때까지 대중을 자극하지 말아 달라 이거군.
“가능한 그렇게 하겠습니다. 인터뷰는 원래 잘 하지 않는 편이라서요.”
―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뮌은 이상 작가님을 지지합니다. 세상에 빛을 발하기 전에 고초부터 치루는 책들이 있죠. <두 역사>야말로 그런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빛을 발하기 전에 고초부터 치루는 책이라.
그 말을 들으니, 좀 안심이 됐다.
뮌 출판사가 태도를 확실하게 해 주는 것 같아서.
― 아, 오늘 뉴스에서 틸 버켈이 <두 역사>에 관한 인터뷰를 합니다. 그 부분을 녹화해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틸 버켈의 인터뷰라.
기대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네. 그럼 부탁드리죠.”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정말로 뮌은 뉴스 영상 하나를 보내왔다.
친절하게 한글 자막까지 달아 둔 파일이었다.
상황을 알고 있는 지훈이 조심스레 물었다.
“틸은 말하는 게 좀 거칠다고 하지 않았어요? 걱정되는데….”
“거칠면 좀 어때. 틀린 말만 안 하면 되지.”
하지만 그건 정말 안일한 생각이었다.
틸 버켈의 인터뷰는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뉴스 스튜디오에 앉은 틸 버켈.
그는 벌써부터 화가 잔뜩 난 것 같았다.
기자가 틸에게 물었다.
― 틸, 요즘 <두 역사>의 반응이 여러모로 정말 뜨거운데요. 이런 반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틸은 별안간 카메라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했다.
― 독일의 무식함에 몸이 떨릴 지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