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28화 (128/204)

128회

조나단 란스마이어.

보수적인 할리우드의 몇 안 되는 흑인 영화 감독.

한국에서도 그의 이름은 꽤 유명하다.

특히 그의 대표작, <엔조이 블랙 라이프>.

그 영화는 혜경도 대단히 인상적으로 봤다.

한 백인 마을의 유일한 흑인인 남자 주인공.

그는 어느 날 살해 위협을 받는다.

당연히 범인을 알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공고한 백인 집단은 은근히 범인을 숨긴다.

백인 사회에 살아가는 흑인의 공포를 잘 그린 동시에, 그것을 블랙코미디로 풀어낸 수작.

조나단 감독은 인종차별이나 인권에 관심이 많다.

<그 집>에서도 미국 사회의 차별을 읽어 냈겠지.

“조나단 감독이라면… 형, 맡겨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맞아요. 메시지적으로도 통하고요.”

지훈과 금홍이 흥분해서 말했다.

하지만… 메시지만을 생각할 문제는 아니었다.

“…아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메시지는 통하겠지. 하지만 형식이 달라. 조나단 감독의 영화는 컬트와는 거리가 멀어.”

내 말에 두 사람은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아쉽고, 아깝겠지.

하지만 그 마음이 나보다 더 크랴.

나 역시 힘들게 내린 판단이었다.

“메시지는 소설로도 충분해. 영화화를 할 거면 제대로 하고 싶어. 기획했던 방향대로.”

지훈은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꾹 참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고 있었다.

지금 <그 집>은 누들의 판매 순위권 밖.

작년 당선작에 5위를 내준 것도 꽤 된 일이니… 현재는 얼마나 밀려났는지 알 수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조나단 감독의 힘을 얻는다면, 당연히 상황은 나아질 것이다.

하지만 난 이미 <그 집>을 컬트로 풀기로 결심했다.

감독 역시, 그에 맞춰 구하는 게 순리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금홍에게 말했다.

“금홍 샘, 댁으로 가시면 답장을 좀 써 주세요. 조나단 감독님의 제안은 감사하지만 저는 컬트적 분위기가 나는 영화를 준비하고 있기에 컬트 영화를 만들어 본 감독을 찾는다고요. 그리고 나머지 두 감독님의 작품을 충실하게 분석한 후, 연락을 드리겠다고요.”

“아… 네, 알겠어요. 혜경 샘.”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들도 내 선택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하는 듯했다.

어쨌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힘들게 <그 집>의 스토리보드를 만들었기 때문일까.

내게도 영화적인 욕심이 적잖이 생긴 것이다.

* * *

조나단 감독은 믿을 수 없었다.

그의 컴퓨터에 떠 있는 메일 창.

― …하여 이상 작가는 다음 기회에 감독님과 함께하길 바라신다며 사과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안 한다고?”

대체 왜?

그래도, 그래도 조나단 란스마이어인데?!

그는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사무실 소파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하얀 천장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말도 안 돼….”

거절당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상대는 동양의 신인 작가.

자신은 스릴러로 성공한 영화 감독.

즉답은 못 받아도 고민을 해 줄 줄 알았는데?

단칼에 거절?

이게 무슨 일이지?

“…왤까.”

‘설마… 내가 흑인이라?’

라는 어쩔 수 없는 생각이 드는 조나단이었다.

이런 식의 피해의식.

나이, 사회적 지위와 성별에 관계없이 미국 사회의 ‘흑인’이라면 당연히 가질 수밖에.

“…정신 차리자, 조나단.”

피해의식을 휩싸이는 것도 좋지 못한 태도다.

분명 작가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터.

조나단은 메일을 다시 확인했다.

그러자 아까는 충격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한 단어.

그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그 집>을… 컬트 영화로 만든다고?”

그것참, 생각지도 못한 발상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겁나 쿨하네, 이 작가.”

멋졌다.

<그 집> 같은 심각한 작품을 컬트로 만들려 하다니.

웬만한 감각이 아니면 내리기 어려운 결정일 텐데.

사실 조나단 감독도 컬트 영화를 좋아했다.

아니, 동경했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대학 시절엔 영화를 만들었다 하면 컬트 영화였다.

본인이 생각하기엔 꽤 잘 만들기도 했고.

하지만 진짜 영화판에 들어오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흑인들에 대한 할리우드의 차별.

그 앞에서 속 편하게 예술을 논할 수가 없었다.

흑인 인권 문제를 담은 영화를 만들겠단 다짐 앞에서, 컬트의 꿈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뭐, 영화학도의 흔한 성장 과정이지.’

조나단은 문득 책장을 봤다.

자신이 만들었던 수많은 영화의 DVD.

그중 태반이 스릴러였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백인의 규율에 맞춰 살아가는 삶.

그거야말로 스릴러니까.

하지만 단 한 번도, 그 스릴러를 컬트적 요소로 풀어 본 적이 없었다.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지? ‘컬트’야 말로 마이너리티의 상징인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거절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그 집>도 ‘컬트’도 너무나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조나단 감독은 원래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이런 사무실도 능력 있는 직원을 유치하기 위함일 뿐.

하고 싶은 건 앞뒤 안 보고 들이받는 성격이었다.

그는 휴대폰을 꺼냈다.

‘어차피 다시 들이댔다간 또 까일 거야. 차라리….’

대놓고 구질구질하게 굴자!

‘그 작가가 나 조나단 란스마이어에게 연락을 안 하곤 못 배길 정도로.’

조나단은 짹짹이 계정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상의 계정을 찾기 시작했다.

‘들리는 대로 스펠링을 적으면… 이 사람인가?’

몇 개의 계정을 지나 찾은 한 남자의 계정.

꽤나 호감형의 얼굴.

그가 낸 책 표지들과 간간이 나타나는 영문 글귀들.

‘맞네. <그 집>의 소개도 있고, 이건 한국어 같은데… 이건 뭐야. 한자? 중국언가? 뭐, 어쨌건.’

조나단은 이상과 다른 작가들을 잔뜩 태그했다.

이상만을 태그하면 다른 이들이 이상하게 볼 테니.

그리고 한 마디를 남겼다.

― 아! 컬트 영화 만들고 싶다!

* * *

― 아! 컬트 영화 만들고 싶다!

…이게 대체 뭐지?

난 휴대폰의 짹짹이 피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분명 조나단 감독의 공식 계정인데.

날 태그해서 이런 글을 남기다니.

어떤 의도를 읽어 내길 바라는 거지?

워낙 장난기 많고 유머러스한 걸로 유명한 감독이다.

단순히 내 거절에 대한 투정일지도 모르지.

일단은 무시.

그리고 내 할 일을 한다.

시놉시스를 보내 달라고 요청한 두 감독.

리치 파블로브스키와 멜라니 라쉬.

스토리보드는 번역을 맡긴 상황.

번역이 끝날 때까지 두 감독의 성향을 알아봐야 한다.

그리고 더 나은 쪽에 스토리보드를 보내야지.

사실 둘 다 유명하다면 유명한 감독이다.

<그 집>의 시놉시스를 준비하며 그들의 영화를 보기도 했고.

그 기억과 지훈이 정리한 자료를 파악하면….

러시아계 미국인 감독 리치 파블로브스키.

신의 의미를 뒤트는 컬트 영화 <빛>으로 유명.

상당히 난해한 서사와 이미지를 활용하는 감독으로, 항간에는 그의 영화를 백 퍼센트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한다.

컬트 영화계의 흔치 않은 여성 감독 멜라니 라쉬.

유태계 감독으로 충격적인 이미지를 곧잘 다룬다.

대표작은 김미소 작가가 보다가 포기한 <세인트 롤랑>.

죽음, 생명, 육체, 피….

이와 같은 인간의 생물성이 그녀의 영화의 주재료.

“흐음….”

리치 파블로브스키는 너무 난해하고, 멜라니 라쉬는 너무 세다.

나는 컬트 영화를 만들자는 게 아니다.

‘컬트적 요소’가 들어간 영화를 만들자는 거지.

문득 조인후 감독의 말이 생각났다.

적당한 감독을 찾기가 어려울 거란 말.

막상 찾으려 해 보니, 이해가 됐다.

같이 작업실에 있던 지훈이 말했다.

“형, 조나단 이 감독 또 짹짹이에 글 올렸는데요?”

“또? 뭐래?”

“대학교 시절 나는 컬트에 미쳐있었다. 할리우드 감독이 되리란 욕망이 없었다면, 나는 몇 없는 흑인 컬트 영화 감독이 됐을 것이다. 그 시절 내가 만든 영화는 모두 유튜브에 공개되어 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링크를 단다. 이건 내 절절한 이력서다.”

“….”

“…라는데요?”

지훈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이 사람 되게 특이하네요. 소문보다 더 이상해요.”

“…링크 좀 보내 주라.”

“네. 저도 같이 봐도 돼요?”

“그래.”

지훈은 내 톡으로 링크를 몇 개 보냈다.

그리고 의자를 죽 밀어 내 옆으로 왔다.

세 개의 링크.

즉, 세 편의 영화.

모두 십 분가량의 단편영화였다.

나는 첫 번째 영화, <침묵의 달>을 틀었다.

<침묵의 달>은 흑인 소년의 이야기였다.

할렘가에 사는 소년은 굶주림 끝에 마트를 털려 한다.

그렇게 마트에 들어간 소년.

마트에는 백인들이 가득하고, 소년은 겁을 먹는다.

우여곡절 끝에 소년은 마트를 터는 데에 성공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온갖 이미지로 변하는 백인을 마주해야 했지만.

소년이 마주친 그 백인들의 이미지는 괴기스럽고, 공포스러운 것들이다.

이미지로만 따지만 <세인트 롤랑> 못지않게 대범하다.

소년이 끝내 훔친 것은 초코바 하나.

소년은 그것을 들고 바닷가로 간다.

하늘에 떠 있는 환한 달.

그 아래서 초코바를 까먹는 소년.

별안간 소년이 울기 시작한다.

그 눈물의 의미는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게 할 뿐이다.

거친 상징이며 흑백논리며… 대학생이 만든 티가 난다.

하지만 진정성이나 감각의 면에서 남다르긴 하다.

마트 안의 백인 이미지는 흑인인 소년이 마주할 현실이겠지.

배고픔을 이겨 내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고.

그 십 분짜리 영화를 본 후.

지훈과 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다음 편도 볼까요?”

“응. 봐야 할 것 같아.”

다른 두 편의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보면 촌스럽지만… 납득이 가는 상징들.

이미지에 잡아먹히지 않는 서사.

오늘날 조나단 감독을 있게 한 사회적 메시지.

“…좋네요. 하나같이.”

지훈이 말했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단편영화는 결국 단편이었다.

동시에 예술영화고.

조나단 감독이 과연 장편 대중영화를 이만큼 잘 만들어 낼까.

“조나단 감독은 내가 말을 걸기를 기다리는 거겠지?”

“완전 그렇겠죠. 어쩔까요?”

지훈의 얼굴에 쓰여 있는 듯했다.

당장 이 감독을 잡으라고.

“우리도 짹짹이에 글을 하나 올리자.”

“뭐라고 올릴까요?”

“…‘인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라고.”

“그게 뭔 말… 아하. <그 집>이 인종적인 문제로만 해석되는 걸 해결할 수 있을까, 이 말이죠?”

“어. 그런데 그렇게 쓰면 다 알아볼 테니까, 돌려 말하는 거지. 암호처럼.”

AL은 <그 집>을 아시아인 인종차별로 풀길 바랐다.

조나단 감독이 진정으로 감각 있는 감독이라면… 모르지 않을 거다.

작가가 동양인이란 이유만으로, 작품의 주제를 ‘인종차별’이라고 해석해 버리는 시선들을.

지훈은 내 말을 금홍에게 옮겼다.

금홍은 정확히 십 분 후, 번역본을 보냈고.

나는 지훈이 짹짹이에 글을 남기는 걸 보았다.

과연 조나단 감독이 어떻게 나올까….

나름 기대를 하며.

그리고 몇 시간 후.

내가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으하하하하!!!”

지훈이 작업실 안에서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왜 저래?’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뭔 일 있어?”

“아, 형 이것 좀 봐요. 조나단 이 사람 진짜 골 때려요.”

지훈이 컴퓨터 모니터를 가리켰다.

짹짹이 화면에 떠 있는 조나단 감독의 글.

자동번역으로 바뀐 그 내용은 이랬다.

― 아! 나 백인만 잔뜩 나오는 영화도 찍을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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