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회
그림이건 글이건 본질적으로는 ‘표현’의 영역이다.
머릿속에 명확한 상이 있으면, 펜을 쥐느냐 붓을 쥐느냐가 다를 뿐.
그래도 세상일이란 참 알 수 없다.
이십 대 초반에 포기한 그림을 이렇게 다시 그려 볼 줄이야.
<그 집>을 스토리보드로 옮기는 일.
하면 할수록 손에 익었다.
가끔은 글을 쓰는 것만큼 재밌기도 했고.
며칠 후.
나는 <그 집>의 스토리보드를 완성했다.
생각보다 많은 장면이 추가됐다.
적어도 이 정도면… 시놉시스를 대신할 수 있겠지.
생각보다 훨씬 빨리 끝나서 나조차도 놀랄 정도였다.
아마 조인후 감독이 붙여 준 직원의 힘이 컸다.
펜 선을 따고 컴퓨터 작업을 하는 건 모두 그가 했으니, 나는 스케치만 열심히 했다고 보면 된다.
완성 소식을 들은 조인후 감독이 날 찾아왔다.
그의 얼굴에는 스토리보드에 대한 기대가 가득했다.
“얼른 보고 싶군요.”
그는 소파에 풀썩 앉으며 말했다.
커다란 덩치 때문에 소파가 푹 들어갔다.
나는 급한 대로 떡제본을 한 스토리보드 북을 내밀었다.
“떨리네요. 완성본을 드린 건 처음이라.”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스토리보드 북을 펼쳤다.
“디지털 작업을 하니 확실히 깔끔해졌네요.”
“직원분이 고생이 많았죠.”
“흠….”
한 장 한 장 넘기는 그의 손길.
나는 그때마다 말 못 할 긴장감을 느꼈다.
조인후 감독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대신 펜을 꺼내 가끔 뭔가를 적곤 했다.
십여 분이 지나는 시간 동안.
그는 스토리보드에서 한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잠시 후.
마지막 장을 덮은 조인후 감독.
그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았다.
방금 본 한 편의 영화를 복기하듯.
미간의 찌푸림.
다소 꽉 감은 눈.
초조하게 팔꿈치를 두드리는 손끝.
그 모든 것들이 날 긴장하게 만들었다.
조인후 감독은 한참 후에야 비로소 눈을 떴다.
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말이든 해 주길 바라며.
“멋진 영화예요. 잘 완성했네요.”
그는 ‘소설’도, ‘작품’도 아닌 ‘영화’라고 했다.
<그 집>을 영화로 인정해 준다는 뜻일까.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컬트적 미학이 잘 섞여 있네요.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아주 마음에 들어요.”
그는 스토리보드를 다시 넘겼다.
그의 손끝이 가리킨 곳은 취조실 장면.
취조실에서의 양오빠의 이미지.
그의 등 뒤에서 뜬금없는 후광이 비춰지고 있다.
하지만 그다음 컷.
수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를 본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빛이 반사되지 않는다.
“양오빠의 캐릭터를 잘 보여 주는 컷이에요. 사실 책에서는 다소 모호하게 표현된 면이 없잖아 있었는데… 영화로 넘어오면서 더 확실해졌어요.”
“맞아요. 앞의 컷은 양오빠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드러내는 장면이에요. 후광은 과잉된 자아를 드러내죠.”
일반 스릴러 영화에서는 부자연스럽고 우스울 장치들.
그러나 컬트적 요소로서 배합을 하면, 이질적인 동시에 의미화된 장면으로 재탄생한다.
나는 이어서 말했다.
“그다음 컷은… 그녀의 눈엔 후광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주고 싶었어요. 수지가 양오빠에게 더는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임을 드러낸 거죠.”
그는 바쁘게 스토리보드를 넘겼다.
그리고 어느 장면을 집어냈다.
“그거, 이 부분과도 연결이 되죠?”
그가 집어낸 건, 어렸을 적 수지의 얼굴.
수지가 처음 양오빠를 만났을 때.
양오빠는 자신의 방에서 몸에 이불을 감싸고 등장한다.
마치, 그리스의 어린 신처럼.
수지는 양오빠를 다소 황홀하게 바라본다.
눈이 부신 듯 눈을 비비기도 한다.
취조실의 장면이 없다면, 진정한 의미를 모를 신.
나는 새삼 조인후 감독의 대단함을 느꼈다.
그는 물론 <그 집>을 다 읽었다.
하지만 이 스토리보드는 <그 집>에서 나오지 않는 이미지가 가득하다.
그리스의 어린 신이나 후광 같은 것들 말이다.
조인후 감독은… 단번에 그 이미지들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네. 양오빠에게 느꼈던 아우라에서 벗어난 거죠.”
“한 가지 첨언을 하자면, 취조실에서 양오빠를 바라보는 눈동자를 클로즈업하세요. 과하다 싶을 만큼. 관객들이 수지의 눈동자에 빨려들어 갈 만큼. 그래야 ‘눈’이 주는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나는 상상해 보았다.
양오빠를 바라보는 수지의 눈 속, 사라진 후광.
…확실히, 더 괜찮았다.
“그렇게 고쳐 보죠.”
“그런 종류의 조언들을 적어 놨어요. 살펴보고, 반영하고 싶으면 하세요.”
조인후 감독은 스토리보드 북을 다시 내밀었다.
아까부터 뭘 그렇게 적나 했는데, 수정 사항이었구나.
“좋아요. 너무 어렵지도 않은 선에서 인식적 충격을 주는 이미지를 활용하는 이 시도. 충분히 ‘컬트적’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바로 긴장했다.
그는 턱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런 영화는 감독을 구하기 어려울 거예요. 스릴러와 컬트의 균형을 잘 잡아 줄 감독이 필요합니다. 또, 미국에서 개봉을 해야 할 테니 웬만하면 미국 감독으로 하는 게 좋겠고요.”
“혹시 괜찮은 영화 감독님을 알고 계신다면….”
조인후 감독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는 한은 없습니다. 컬트 감독들은 자기들만의 리그가 따로 있거든요. 우리 쪽과는 여간해선 잘 섞이지 않습니다.”
영화에서 감독의 역할을 절대적이다.
아무리 좋은 시나리오가 있어도 감독을 잘못 만나면 영화가 무너지는 건 당연한 일.
“사실 얼마 전에 누들 쪽과 연락을 했습니다.”
“출판사와요?”
“네. 누들은 마이너리티를 추구합니다. 그러면서도 미국 문화계의 유행을 선도하죠. 어쩌면 미국 컬트 영화계에 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감독을 알아봐 달라고 했나요?”
“네. 제가 알아보는 것보단 그게 빠를 것 같아서요.”
“잘하셨어요. 필요하면 기업도 이용해야죠.”
“이용이라기보단, 부탁이었죠.”
어쨌건 누들은 날 뽑은 출판사다.
내 책의 판매율이 떨어지는 걸 두고 볼 리가.
“그래서, 연락은 왔나요?”
그는 기대를 담아 물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에요.”
“쉽지 않은 인간들이라니까요. 컬트 영화 감독들은.”
조인후 감독이 날 위로하듯 말했다.
그리고 빙그레 웃으며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그래도 이렇게 훌륭한 스토리보드를 만들었잖아요. 잘 될 겁니다.”
* * *
사무실을 떠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조수석에는 스토리보드 북이 있었다.
지훈에게도 한번 읽혀서 감상을 들어 봐야지.
그래도 스토리보드, 아니, 시나리오를 완성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스토리보드 북에는 대사도 함께 첨부해 뒀다.
이건 피터 한에게 번역을 맡긴 후, 미국의 제작사나 감독들에게 보내 볼 생각이었다.
구체적인 시나리오는 그 뒤에 써도 늦지 않는다.
우웅― 우웅― 우웅―
지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차를 갓길에 잠시 세우고 전화를 받았다.
“어, 지훈아.”
― 형, 이제 들어가요?
“응. 왜?”
― 금홍 샘이랑 일 얘기 하다가, 오늘 마침 시간 된다고 해서 저녁 먹기로 했는데 형도 같이 가자고요.
금홍이랑?
마다할 이유가 없지.
<그 집> 스토리보드 번역도 그렇고.
나는 약속 장소로 차를 돌렸다.
우리가 만난 곳은 대한외대 앞 로데오거리.
대학생들의 활기가 가득 찬 호프.
두 사람은 이미 식사 겸 술을 한잔하고 있었다.
“혜경 샘!”
금홍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어째 대한외대에 간 후 얼굴이 더 핀 것 같다.
번역 일이 정말 잘 맞는 모양이지.
“금홍 샘. 오랜만이에요. 안 그래도 조만간 연락 한번 하려고 했는데.”
“맨날 말만! 하하… 앉으세요. 저녁 안 드셨죠?”
나는 좀 멋쩍게 자리에 앉았다.
지훈이 나를 변호해주듯 킬킬대며 말했다.
“혜경이 형 요새 바빴어요. 영화 시나리오 쓰거든요.”
“영화요?!”
송지훈 이 자식.
이런 식으로 내 소식을 솔솔 뿌리고 다녔군.
안 봐도 훤하다.
하지만 이왕 이야기가 나온 거.
나는 영화 <그 집>의 진척에 대해 말했다.
스토리보드를 만들었다는 건 지훈도 몰랐던 일.
두 사람은 눈이 동그래져선 날 보았다.
“…형, 그림을 그렸다고요?”
“응.”
“샘, 시놉시스 충분히 쓰실 수 있지 않아요?”
“아뇨.”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시놉시스를 쓸 문장력이 안 돼서, 더 나은 그림을 선택한 거죠.”
두 사람이 멀뚱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날 보며 한마디씩 하는 거다.
“형, 지금 문장력이 안 된다고 했어요?”
“거짓말….”
“정말이에요. 시놉시스용 문장은 아예 달라요. 훈련이 필요한데 그럴 시간은 없으니 바로 스토리보드로 넘어갔어요. 시각적으로 보여 주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금홍이 물었다.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해야만 하니까요. 감독들이 스토리보드를 오케이하면 그때 시나리오를 쓰게요.”
“나도 형처럼 재주 많았음 좋겠다. 만약에 저라면 시놉 까이고 난 후에 완전히 멘붕 와서 암것도 못 했을걸요?”
“위기에 몰리니 사람이 그렇게 되더라. 아, 금홍 샘. 스토리보드에 중요한 대사들 몇 마디 들어가는데… 그거 <그 집>이랑 많이 다르지 않아요. 피터 한 교수님이랑 같이 번역 가능할까요?”
“네. 가능해요.”
…너무 단번에 말하는 거 아닐까.
금홍이야 ‘팀 이상’에 대학원생이니 그렇다 해도,
피터 한 교수는 꽤 바쁠 텐데.
금홍은 내 시선의 의미를 눈치챈 듯했다.
그녀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피터 한 교수님, 저한테 가끔 물으시거든요. 이상 작가 신작 낸단 소식 있냐고.”
“엑? 그 새침데기 교수님이요?”
지훈이 못 믿겠다는 듯 내질렀다.
금홍도 우스운지 어깨를 으쓱했다.
“네. 다른 학생들 있을 때는 절대 그런 말 안 하시고, 꼭 둘이 마주쳤을 때 물어보세요. 좀 귀엽지 않아요?”
“…징그러운데요.”
지훈이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말은 안 했지만… 나도 지훈 쪽에 한 표.
그사이 안주와 맥주가 나왔다.
우리는 수다를 떨며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띵―
지훈의 휴대폰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음? 메일이네. 형, 누들인 것 같은데요. 지금 확인할까요?”
“누들? 어. 지금 확인하자.”
잘 됐다.
마침 금홍도 있으니.
지훈은 메일을 열어 내용을 한번 훑어보았다.
“음― 역시 못 알아듣겠고. 금홍 샘, 여기요.”
“주세요.”
금홍이 냅킨으로 손을 한번 닦았다.
그리고 메일 내용을 살펴보며 번역을 바로 시작했다.
“이상 작가님께. 누들의 편찬위원이자 심사위원인 파멜라 조이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작가님의 요청에 대한 답을 드릴 수 있게 되어서 메일을 보내 드리는 바입니다.”
내 요청이라면, 역시 감독을 알아봐 달란 거겠지.
“누들은 작가님의 요청에 따라 여러 컬트 영화 감독과 제작사에 책을 보냈습니다. 그 결과 두 명의 감독이 진행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리치 파블로브스키와 멜라니 라쉬입니다. 그들의 필모에 관해선 한국에서도 충분히 검색이 가능하니, 천천히 살펴보시면 될듯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금홍이 멈칫했다.
그녀는 뒷부분을 먼저 읽고는 깜짝 놀랐다.
“…어?”
“왜, 왜 그래요?”
지훈이 물었다.
금홍은 넋 나간 얼굴로 메일을 계속 읽었다.
“저희가 컬트 영화 감독을 알아보던 중… 조나단 란스마이어 감독도 누들 쪽에 연락을 주었습니… 다?”
조나단 란스마이어.
난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는… 미국 최고의 영화 감독 중 한 명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