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26화 (126/204)
  • 126회

    “…가님, 작가님… 작가님?!”

    …음?

    누군가 날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나는 비몽사몽 한 채로 몸을 일으켰다.

    여긴… 조인후 감독의 사무실.

    사무실 직원이 황당하단 눈으로 날 보며 말했다.

    “작가님, 설마 여기서 주무신 거예요? 경비 아저씨가 밤새 불이 켜져 있었다고 해서 와 봤는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창밖에 훤하게 뜬 해와 테이블의 스토리보드 그림들.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다.

    어제 새벽까지 스토리보드를 만들었다.

    모든 걸 그릴 순 없으니 중요한 장면들만 골라서.

    “지금 몇 시예요?”

    “아홉 시예요. 아유, 차라리 소파에서 주무시지. 허리 아프시겠어요.”

    …아홉 시라고.

    한 네 시간을 이렇게 잤나 보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봤다.

    강남 대로가 차로 꽉 막혀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조인후 감독님 출근하셨어요?”

    “네. 십 분 전쯤에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전 나가 볼게요. 댁에 가서 좀 쉬세요.”

    직원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사무실을 나갔다.

    “댁에서… 쉴 상황은 아니지.”

    나는 중얼거리며 화장실로 갔다.

    하룻밤 불편하게 잤다고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고생한 티를 내며 돌아다닐 순 없지.

    대충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한 후.

    사무실에서 스토리보드를 그러모아 나왔다.

    내가 향한 곳은… 조인후 감독의 사무실.

    사무실의 불투명 유리문.

    첫날, 이곳에 왔을 땐 그저 문이었는데.

    지금 보니 반드시 넘어야 할 산처럼 느껴진다.

    똑똑!

    “네.”

    “저 이상입니다.”

    “아, 네! 들어오세요.”

    “후우….”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미소로 날 반기는 조인후 감독.

    그는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여기서 밤을 새신 겁니까?”

    “아닙니다. 같은 옷을 입어서 그렇게 보였나 봐요.”

    그도 결국 사람이다.

    내가 밤을 샜다는 걸 안다면 안쓰러워하겠지.

    그럼 스토리보드의 평을 솔직하게 해 주기 어려울 테고.

    “시놉시스를 다시 정리해서 왔습니다. 시간이 되시면 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벌써요? 그럼요. 앉으시죠.”

    그는 여유롭게 날 안내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걸 내놓아야만 한다는, 그런 압박감 같은 건 주지 않는 표정.

    동시에… 하룻밤 만에 고친 시놉시스를 별달리 기대하지도 않는 표정.

    “한번 볼까요?”

    그가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준비한 걸 내주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글로는 표현할 재주가 부족해서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네?”

    “스토리보드를 그렸거든요.”

    “스토리보드요? 아니… 그건 감독들도 따로 스토리보드 작가를 둬서 하는 작업인데요.”

    “그 정도 수준은 되지 않을 겁니다. 다만, 제가 전달하고 싶은 것 위주로 간단히 표현했어요. 지금으로선 그편이 나을 것 같아서요.”

    “스읍… 일단 주시죠.”

    그는 못 미덥단 얼굴로 종이들을 받아 갔다.

    밤새도록 내 손을 타서 구깃구깃해진 종이들.

    첫 장을 보자마자, 조인후 감독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림을… 꽤나….”

    그리고 모든 장을 빠르게 넘겨보았다.

    “그림을 정말 잘 그리시는군요. 특히 인물을.”

    “어렸을 때 화가를 지망했었거든요. 인물의 표정이나 구도, 느낌. 이 세 가지만 표현했습니다. 많이 부족한 상태죠.”

    “아뇨, 일단… 표현력은 이 정도도 충분합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종이를 넘겼다.

    한 컷, 한 컷을 신중히 바라보다가… 가끔은 앞으로 돌아와 뭔가를 다시 확인했다.

    “이걸 하루 만에 한 겁니까? 혼자서?”

    “네.”

    그는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종이를 내려놓았다.

    뭐라 말을 하려다가 또 삼켰다.

    “…어떻게 가능한 겁니까? 물리적으로.”

    “글을 쓰는 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도… 제가 손이 좀 빠른 편이기도 하거니와….”

    “….”

    “머릿속에 있던 장면들을 옮겨 그렸을 뿐입니다. 모든 장면을 다 그린 것도 아니고요.”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시퀀스만 다뤘으니.

    미친 듯이 그린다면 못 할 양도 아니었다.

    “…놀랍군요. 이런 재능이 있으실 줄이야. 아니, 그걸 떠나서….”

    그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말을 삼켰다.

    그리고 한참을 날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시놉시스는 전문가들도 힘들어하는 글입니다. 시나리오보다 훨씬 더 기술적으로 써야 하죠. 저는 작가님께서 상당히 고전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

    “바로 스토리보드를 만드실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발상의 전환입니다.”

    “글만이 제가 가진 유일한 표현법은 아니니까요.”

    “대부분의 작가들은 다른 방법으로 표현해 볼 생각 자체를 못 합니다. 글이야말로 작가의 자존심이라 생각하니까요. 정말… 생각이 유연하십니다. 본받고 싶을 정도로요.”

    그의 진지한 칭찬에 슬슬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나는 얼른 화제를 스토리보드로 돌렸다.

    “그림이야 그렇다 치고, 내용이 괜찮은지 궁금한데요.”

    “훨씬 낫습니다. 아니….”

    그가 종이를 넘기며 말했다.

    “이대로 가시죠.”

    이대로 가시죠.

    그 말 한마디에 속이 뚫리는 것 같았다.

    어젯밤 내내 안고 있던 부담감.

    그 부담감이 비로소 저 멀리 날아갔다.

    “하아… 감사합니다. 감독님.”

    “훌륭해요. 정말. 장면 장면마다 컬트적 성격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어요.”

    “한 군데 집어 주시면 감을 더 빨리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는 스토리보드를 몇 장 넘기곤 한 그림을 가리켰다.

    바로 수지의 실험 중 하나.

    가족의 금기를 알고 싶어 일부러 귀가를 늦게 한 날.

    “여기서 수지의 불안한 얼굴이 드러나죠. 혼이 날까, 안 날까. 그리고 문이 열립니다.”

    그는 바로 다음 장면을 가리켰다.

    “이 장면. 수지는 이 미스터리한 집을 어둡고 불길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 순간만큼은 비정상적으로 밝아져요.”

    정확히 내 의도대로였다.

    수지가 현관문 밖에서 바라본 ‘그 집’.

    아주 화려하고, 밝고, 부모는 웃고 있다.

    마치 긴 기다림 끝에 얻은 축제처럼.

    한밤이지만 환한 태양이 비추는 것 같은 집.

    추후 양오빠의 취조에서 나타날 사실이지만,

    이날의 기쁨은 수지의 부재 때문이 아니었다.

    이날, 양오빠 역시 친구의 집에서 외박을 했던 것이다.

    “이 이미지의 이질감. 수지와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는 이미지의 연쇄. 그리고 이 혼란은….”

    “영화의 마지막에서 가서야 의미가 성립되죠.”

    이 광기 어린 즐거움은 곧 두려움의 다른 말이었다고.

    조인후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만 쭉 써 주세요. 아니, 그려 주세요. 스토리보드 용지도 드리고 직원도 붙여 드리죠. 아예 책자로 제작을 해서 제작사에 돌리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도 된다면 바쁘게 해 보겠습니다.”

    희망이 보여서였을까.

    몸에 쌓여 있던 피로함이 모두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나는 바쁘게 내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소파에 벌렁 누워 버렸다.

    “하… 살았네.”

    아직도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이런 긴장감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우웅― 우웅―

    주머니 속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송지훈이란 이름을 보고서야 아차 싶었다.

    말 한마디 안 하고 안 들어갔으니, 아무리 사지 멀쩡한 남자여도 걱정을 했을 텐데.

    “여보세요.”

    ― 형, 어딨어요?

    “사무실에서 밤샜다.”

    ― 형이 밤도 새요? 웬일이래.

    “시나리오 쓰는 게 쉽지 않아서.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가려고. 별일 없지?”

    ― 별일은 없어요. 그냥 살아있나 궁금해서… 아, AL이 또 메일 보낸 거, 답장 어떻게 할까요?

    “아, 그거.”

    AL은 어제 또 제안을 했지.

    자신들이 <그 집>을 영화로 만들겠다고.

    “정중하게 사과하면서 말해 줘. 결정을 번복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리고 지훈아.”

    ― 네.

    “누들 쪽에 메일 하나 보내 줄래? 시간 될 때 나한테 전화 한 통 달라고.”

    <그 집> 극본의 감이 잡혀 온다.

    슬슬… 제작자를 구해 봐야지.

    정확히는 감독을.

    * * *

    독일 베를린.

    뮌 출판사의 팀장 도미닉은 직접 출판공장을 찾았다.

    팀장이 직접 출판공장으로 오는 건 드문 일.

    인쇄 책임자가 직접 그를 맞이했다.

    “웬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감시하러 왔죠. 우리 책 뽑아내시나 해서요.”

    인쇄 책임자는 하하하 하고 웃었다.

    독일의 출판 인쇄는 굉장히 섬세하다.

    시장에 파본이 나가는 게 이슈가 될 정도로.

    그 정도로 정확성에 자부심을 가진 이들이기에, 도미닉 팀장의 말을 농담으로 받을 수 있었다.

    “이번 책을 팀장님께서 신경 쓰신다더니… 정말이시군요?”

    “신경 안 쓰이는 책이 있나요. 읽어 보셨나요?”

    “뭐, 틸의 글은 읽었어요. 저도 그의 팬이거든요.”

    “나머지 한 편은요?”

    “아, 그 이상이란 한국인이요? 아직이에요.”

    인쇄 책임자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도미닉은 생각했다.

    방금 들은 이 말, 꽤 상징적이라고.

    ‘이상이 독일에서 나름대로 유명해졌다 해도… 아직은 신인 작가 수준이다. 외국인으로서의 핸디캡도 있을 테고.’

    “이쪽으로 오시죠. 샘플을 보여 드릴게요.”

    인쇄 책임자는 커다란 인쇄 기계로 갔다.

    그 옆의 나무 테이블.

    그리고 그 위에 놓인 얇은 회색 책.

    회색 표지에 작게 인쇄된, 검은 글씨.

    <두 역사>

    도미닉 팀장은 당연히 이 책의 원고를 봤다.

    틸 버켈의 글도, 이상의 글도 훌륭했다.

    각각 다른 방식으로.

    틸 버켈의 글이 역사를 거시적 관점에서 살펴봤다면,

    이상은 인간 내면으로 역사의 오점을 증명했다.

    그는 이상의 글을 본 순간, 알 수 없는 죄책감에 몸서리를 쳤다.

    독일인이 저지르지도 않은 과거인데 왜?

    그러나 이내 이유를 알았다.

    소설의 형식을 띤 <갈림길>이란 에세이.

    그 안에 묘사한 식민지국 지식인의 내면.

    그 내면의 고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는 건, 독일과 같은 가해국들의 책임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도미닉 팀장은 그 책을 집어 들었다.

    거칠거칠하고 두꺼운 표지.

    에세이 두 편이 전부라, 장수도 얼마 되지 않았다.

    책이라기보단 얇은 잡지 같기도 했다.

    책의 구성은 단순했다.

    1장은 틸 버켈의 글 <검은 성>

    2장은 이상의 글 <갈림길>

    도미닉 팀장은 책장을 넘겼다.

    왼쪽 페이지에는 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사진들이,

    오른쪽 페이지에는 에세이가 있었다.

    엄숙함과 진지함, 애도의 감성이 느껴지는 책.

    “잘 나왔군요.”

    “요새 잘 안 쓰는 인쇄법을 요청하셔서 애 좀 먹었습니다. 작은 크기에, 종이 질도 빳빳한 데다가, 잉크도 검은색 하나만 쓰라 하셔서… 요새 이런 책 잘 안 만들거든요.”

    “애도의 느낌이 나야 해서요. 너무 커서도 안 되고, 부드럽고 편안해서도 안 되며, 화려해서도 안 되죠.”

    인쇄 책임자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희야 책을 인쇄하면 그만이지만… 뮌과 오래 일한 사람으로서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점이 말입니까?”

    “독일도 많이 변했거든요.”

    도미닉 팀장은 그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하지만 모른 척, 고개를 갸웃했다.

    일반 독일 시민들의 반응을 알고 싶어서였다.

    “우리가 가해국이란 걸 부정하는 사람은 없지만 시간이 많이 지났잖아요. 과거사는 이제 그만 들춰내도 좋지 않으냐는 여론이 점점 늘어나고 있고요.”

    “부끄러운 일이군요.”

    그게 시간이 지난다고 사라질 일인가.

    시간은 아무것도 용서해 주지 않는다.

    하지만 대중의 마음이란… 편안함을 찾기 마련.

    “물론 대놓고 불편함을 드러내진 못할 겁니다. 또, 틸의 말에 반박을 할 용기도 없는 이들일 거고요. 하지만 만만한 동양인 작가에겐… 또 모르죠.”

    도미닉 팀장의 얼굴에 묘한 빛이 감돌았다.

    그는 피식 웃었다.

    “싫어하겠죠. 일본의 잘못에 대해서 쓴 글이지만… 궁극적으론 독일도 비판하게 될 테니까.”

    배테랑 편집자로서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비판 때문에 발간을 안 하는 것?

    그건 도미닉 크로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샘플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1쇄 인쇄가 마무리되면 연락 주십시오.”

    “네, 팀장님. 연락드리겠습니다.”

    도미닉 팀장은 <두 역사>를 들고 나왔다.

    그는 인쇄공장을 나오며 책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맞아. 이건 한 마디로, ‘불편한 책’이다.’

    하지만 불편해야만 가치가 있는 책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책들은… 사람들이 모르는 진실을 닮기 마련.

    ‘기대되는군. 이 책이 독일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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