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25화 (125/204)

125회

요즘 나는 매일같이 강남으로 온다.

조인후 감독의 사무실은 아주 쾌적하다.

강남 대로가 내려다보이는 전경, 사무실 특유의 공기.

여기에 있다 보면 조금 다른 삶을 상상하게 된다.

평범하게 출근을 하고,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는 삶.

어떤 삶이 더 나은지는 비교할 바가 아니지만.

물론 나는 화가를 꿈꾸기도 했고, 한때 건축기사로 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삶을 상상해도… 결국 작가 ‘이상’을 떠올리게 된다.

이런 걸 천직이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나저나 조인후 감독이 내준 첫 숙제.

영화 <그 집> 시나리오의 구성을 짜라는 것.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혜경도 문창과를 나왔기에 시나리오가 낯설진 않다.

다만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다는 게 문제.

나도 <내외인>을 영화로 만드는 데에 참여했지만, 시나리오를 쓴 건 조인후 감독이었다.

내가 아는 한의 영화의 ‘구성’이란 시놉시스.

시놉시스의 구성은 대략 이렇다.

영화의 제목.

인물 소개.

영화의 주제.

영화의 목표.

전체적인 줄거리.

영화의 플롯.

한 번 집필했던 작품이라 써 내려가기 어렵진 않았다.

…줄거리까지는.

문제는 플롯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플롯의 목적은 영화의 흐름을 보여 주는 것.

그리고 영화의 중요한 장면을 설명하는 것이다.

나는 <그 집>을 영화적 시선으로 분석한 후,

효과적인 장면을 추려 ‘의도’에 맞도록 배치했다.

그 ‘의도’가 ‘컬트성’인 건 말할 것도 없고.

여기서 필요한 건… 선택과 집중.

소설 속 수지의 실험은 다양하다.

나는 먼저 강렬한 이미지를 주는 작품을 선정했다.

무심코 양오빠의 방을 들어갔다가 냉대를 받는 장면.

친구들과 놀다가 늦게 들어온 날, 혼나는 대신 평소와 다름없는 환대를 받는 장면.

버려진 고양이를 데려왔다가 꾸중을 듣는 장면.

이유 모르게 죽어 버린 고양이를 묻어 준 후.

고양이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가족들을 보는 장면.

나는 그런 장면들을 추리고, 교묘하게 배치했다.

후반부 취조실의 장면과 엮일 수 있도록.

똑똑.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조인후 감독이 들어섰다.

그는 갓 출근을 한 듯 외투를 입고 있었다.

“벌써 와 계셨습니까?”

난 대답 대신 그냥 웃었다.

사실 난 좀 조급했고, 아직 확신이 없었다.

“어느 정도 진행이 됐나요?”

“중반부까지는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럼 제 사무실로 가져와 보시죠.”

“네? 하지만 아직 완성이 안 됐는데요.”

그는 괜찮다는 듯 찡긋 웃었다.

그리고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전체적인 구성을 마무리하고 보여 줄 생각이었는데.

나는 좀 불안한 마음으로 내 시놉시스를 살폈다.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일찍이 소설로 원 없이 풀어냈던 이야기.

새롭다거나 낯선 느낌은… 잘 모르겠다.

뭐, 일단 가져가 봐야지.

나는 시놉시스를 출력한 후 사무실을 나갔다.

조인후 감독의 사무실은 완전히 반대편.

숙제 검사를 맡는 학생처럼 괜히 긴장됐다.

똑똑.

― 들어오세요!

경쾌한 대답에 나는 슬쩍 문을 열었다.

그의 커다란 사무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책상에 쌓인 컬트영화 관련 책들.

그 옆에 쌓인 출력물도 아마 컬트영화에 관한 거겠지.

“앉으세요.”

그가 소파로 나를 안내했다.

“바로 좀 볼까요?”

“아, 네.”

나는 그에게 시놉시스를 내밀었다.

지금까지 정리한 시놉시스는 총 열 장.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첫 장을 읽었다.

“주제나 인물들이 소설의 내용과 크게 달라진 게 없네요?”

“변형을 한 건 형식이지 메시지나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원작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진행했습니다.”

“흠….”

그는 예민한 눈으로 첫 장을 내려놓았다.

…좋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더 긴장됐다.

일할 때의 조인후 감독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럼 그 형식의 변형이라는 건 플롯에서 드러나겠네요.”

그가 말하는 플롯.

내가 장면을 선택하고 배치한 부분을 의미했다.

며칠간 많은 고민을 하며 추리고, 영화적으로 수정한 부분.

“네. 일단은.”

“한번 보죠.”

그는 플롯을 읽기 시작했다.

열 장의 시놉시스 중 플롯이 여덟 장.

다 읽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였다.

…는 내 생각이었다.

그는 한 장을 읽고.

넘겨서 다음 장을 반쯤 봤을 때 종이를 덮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부드럽지만, 확실한 거절.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내 글에 이런 식의 부정적 평가를 받아 본 건… 처음이었다.

나는 침착하게 물었다.

“어떤 점이 부족한가요? 고치겠습니다.”

“내용은 안정적이에요. 영화화를 할 부분도 잘 골랐고요.”

“그렇다면 왜…?”

“전혀 컬트적으로 느껴지지 않아요. 소설에 비해 새로운 부분을 느낄 수가 없으니까요.”

“지금은 아무래도 시놉시스 단계니까요. 시나리오로 들어가서 씬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이미지 즉 몽타주를 드러낼 수 있는 단계는 ‘씬’이다.

그에 비해 플롯은 이미지가 아닌 이야기의 덩어리.

플롯만으로 씬의 컬트성을 표현하긴 어려웠다.

조인후 감독은 자기도 모르지 않다는 듯 말했다.

“물론 그렇죠. 하지만 제작을 하는 입장에서는….”

“….”

“플롯만 봐도 씬이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죠. 시놉시스가 이해되지 않는데 시나리오까지 봐주는 감독과 제작자는 없습니다.”

그게 대체 어떻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나는 그렇게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그것이야말로 바보스러운 질문임을 알기에.

답은 하나가 아닌가.

‘많이’ 보고, ‘잘’ 쓰는 것.

새삼 느껴졌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괜히 있는 게 아니며,

시나리오까지 잘 쓰는 감독은 괴물과 다름없다는 걸.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이렇게 묻는 듯했다.

조인후 감독의 말을 미루어 보아, 이 정도 시놉시스로 작품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

단, 컬트성을 버린다면.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다시 써 오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고쳐서, 또 가져오시죠.”

“여러 번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독님.”

나는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조용히 그의 사무실을 나왔다.

하지만 나도 사람이었다.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글을 쓰다가 이렇게 난감한 순간이 있던가.

이렇게 내 글이 송두리째 부정당한 경험이 있던가.

하지만 시련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우웅―

지훈에게서 카톡이 왔다.

― 형. 음… 말씀 안 드리려고 했는데,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누들 쪽에서 판매량이랑 판매 순위를 보내 줬는데… 판매 순위에 <그 집>이 없어요.

― 그게 무슨 말이야?

― …5위 밖으로 밀린 것 같아요. 지금 작년 당선 1위 작이 5위로 올라왔고요.

난 한참을 그 톡을 바라봤다.

순위 자체에 얽매일 건 없지만… 작년 작품에 밀렸단 건 의미가 달랐다.

그만큼, <그 집>의 인기가 하향세란 뜻.

― 알았어.

― 그리고, 형. AL 쪽에서도 누들 지표를 눈여겨보고 있나 봐요. 자기네들 제안을 다시 생각해 보지 않겠냐고, 연락이 또 왔어요.

AL과의 협업.

<그 집>을 성공시킬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적어도 아시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테고.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내가 <그 집>의 시나리오를 쓰지 않아도 된다.

― …어쩔까요, 형?

난 대답하지 않았다.

이대로 타협할 마음은 없었다.

다만 자신감이 적잖이 깎여 나간 게 문제.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후우… 힘내자.”

나의 사무실로 돌아온 후.

다시금 내 시놉시스를 천천히 읽었다.

조인후 감독의 말이 맞았다.

기존 이야기를 그대로 옮긴 내용들.

이 시놉시스로는 내 머릿속 씬들을 상상할 수 없었다.

시놉시스 글쓰기는 소설과 다르다.

아니, 사실 완벽하게 문학이라 보기도 어렵다.

시놉시스는 시나리오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

응당 예술성과 실용성을 모두 갖춰야 한다.

또한, 씬과 이미지가 그려질 만한 플롯을 쓰는 것.

그것은 결국 정보 전달의 차원이다.

애초에 내가 거의 써 본 적 없는 글이고.

당연히 전문 시나리오 작가들보다 부족할 수밖에.

게다가 컬트영화의 시놉시스면 말 다 했지.

창밖을 내다보았다.

빌딩들 사이로 뉘엿뉘엿 노을이 지고 있었다.

퇴근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

나는 책상 앞 대신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사무실에 비치된 시나리오집을 펼쳤다.

조인후 감독이 부러 이 사무실에 놓아둔 것.

현대 영화사에 빼놓을 수 없는 명작들이 가득했다.

시나리오는 일찍이 살펴봤지만, 시놉시스는 그리 눈여겨보지 않았다.

결국 영화가 되는 건 시나리오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천천히 그 안의 시놉시스를 읽었다.

한 줄 한 줄의 의도를 생각해 가면서.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무엇을 어필하기 위해 써졌는지 분석해 가면서.

밤이 깊어 갈 무렵.

나는 깨달았다.

이 경지는… 지금의 나로선 따라갈 수 없다.

대단히 정교하고 영리한 문장들.

작가의 의도와 필요한 정보를 명확하고 감각적으로 전하는 단어들.

단기간에 만들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훈련을 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집>의 판매 수가 제대로 하락세인 지금.

시놉시스용 문장을 훈련할 시간은 없다.

나는 손바닥으로 머리를 받치고 천장을 봤다.

형광등 불빛이 눈부셨다.

“…어쩐다.”

위기라면 위기인 상황이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환기라도 할 겸 사무실을 나갔다.

복도는 어두컴컴했다.

아마 모두들 퇴근을 한 것 같았다.

탕비실로 가서 찬물을 한 잔 따랐다.

벌컥벌컥 물을 마시니 좀 살 것 같았다.

이윽고 탕비실을 나오려던 때였다.

벽에 걸린 액자에 눈이 갔다.

그 액자에 담긴 건, <양들의 침묵>의 스토리보드 한 칸이었다.

스토리보드.

시나리오의 장면을 알아보기 쉽게 표현한… 일종의 만화를 의미했다.

감옥 안에 서 있는 한니발 렉터 박사.

철장 밖에 앉은 여기자 클라리스 스털링.

스토리보드에 적힌 지문은 단 한 줄.

‘철창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본다’

그러나 그림의 아우라는 남달랐다.

두 인물의 적절한 거리.

한니발 렉터 박사를 그린 섬세한 선.

클라리스 스털링을 그린, 어딘가 흔들리는 선.

한니발의 예민하고 변태적인 성향과 클라리스의 두려운 내면을 잘 보여 준 그림이었다.

“…!”

순간 답을 찾은 것 같았다.

나는 바쁜 걸음으로 사무실로 돌아갔다.

책상에 앉아, 키보드와 마우스를 치웠다.

그리고 프린터기에서 A4용지를 잔뜩 꺼내 왔다.

백지의 가장 위에, 나는 이렇게 썼다.

<그 집> _ 스토리보드

시놉시스는 시나리오를 상상하게 하는 징검다리.

그렇다면 반드시 언어로 표현할 필요도 없다.

내 언어가 시놉시스를 쓰기에 아직 부족하다면, 그림으로 표현하면 된다.

한때 화가를 꿈꿨을 만큼 그림에 익숙한 내겐… 이편이 더 빠를지도 모른다.

나는 거침없이 칸을 그리기 시작했다.

설계도를 그리듯 반듯한 선으로.

첫 장면.

집을 그린다.

수지가 입양될 바로 그 집.

음산한 2층 나무집과 검은 새들.

비로소 그 이미지를 갖춰 간다.

그리고 다음 장면.

어린 수지의 겁먹은 얼굴.

귀엽지만 강단 있어 보이는 백인 여자아이.

상처와 욕망이 뒤섞인 푸른 눈.

표정과 생김새로 수지의 캐릭터를 충분히 표현해 본다.

오랜만에 그리는 그림이라 손이 좀 굳긴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속도와 감각을 찾아갔다.

나는 그날, 밤이 새도록 스토리보드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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