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회
D―TV 쪽에서 메일이 왔다.
― D―TV 다큐멘터리 ‘인간과 세계’의 <철학자와 소설가> 편이 성공적으로 방영되었습니다. 반응도 대단히 좋아요. 요약본은 유튜브를 통해 볼 수 있으니, 시간이 되신다면 살펴 주세요. 특별히 한글 자막도 달아 두었습니다.
정신이 없다 보니, 다큐를 방영한 줄도 몰랐다.
지훈도 풀 영상을 다운받아 놨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자막이 있는 편이 낫겠지.
나와 지훈은 메일에 첨부된 D―TV 유튜브 채널로 갔다.
찾을 것도 없이 메인 영상 섬네일에 나와 틸 버켈이 있었다.
“바로 틀게요?”
“어. 요약본이라더니. 생각보다 기네? 이십 분이면.”
핵심적인 내용들로 꽉 짜인 영상이었다.
틸과 도미닉 팀장, 올리버 PD의 인터뷰, 전시 <등>의 작품 소개,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와 틸의 대담.
전시회장 안에서 비스듬히 서로를 바라보는 두 남자.
예술의 무용성과 그 역설에 대한 논의.
인간의 개념으로 마무리되는 그 토론은… 어려운 내용을 다루면서도 충분히 대중적이었다.
“잘 뽑혔네, 영상.”
“그러게요. 독일인들이 좋아한다던데, 그럴 만도 해요. 댓글 볼래요?”
“그러지 뭐. 그런데 거의 다 독일인들 아니겠어?”
“또 모르죠.”
지훈이 페이지를 아래로 내렸다.
역시 독일어 댓글이 잔뜩이었지만… 가끔 한국어 댓글도 모습을 보였다.
― 철학자와 소설가의 만남이라니. 게다가 독일과 한국… 짱이다. 국뽕에 소름 돋고 갑니다.
― 이상의 독일 여행기 이런 거 했음 좋겠다ㅜㅜ 두 아저씨 케미 괜찮잖아?
― ㅠㅠㅠㅠㅠ 이상 소설가인데 왜 철학 하죠? 틸 버켈 철학자람서 왜 예술 하죠?
이렇게 다큐 얘기로 잘 나가던 댓글들.
어느 순간부터 불만과 의문들로 변해 갔다.
― 그런데 <그 집>은 언제 나옴? 미국에서 뭔 상 받았다며.
― 미국 출판사 판권이 끝나야 한다는데. 최소 한 달 걸림.
― 더럽네. 빨리 좀 내 달라.
― 그러게. 어차피 미국에서 순위 높은 것도 아니라며. 이럴 거면 한국이랑 유럽에도 풀어 주지.
그리고 발견한 생각지도 못한 내용.
― 틸 버켈이 뉴스 인터뷰에서 <두 역사>라는 책 나올 거라고 떡밥 던짐. 거기서도 이상 글 씀.
“틸이 벌써 인터뷰에서 <두 역사> 얘길 했다고?”
<두 역사>는 나 역시 동의한 제목이긴 했다.
물론 언젠가 홍보를 해야겠지만… 원고를 넘긴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다.
책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텐데 벌써부터?
“관련 영상에 틸 뉴스 인터뷰 있는 것 같은데요? 보실래요?”
“그래.”
지훈은 오른편의 영상 섬네일을 눌렀다.
스튜디오에 앉아 있는 틸이 나타났다.
사회자와 함께 뭐라고 말을 하는데… 독일어다.
“엥… 일단 영어 자막이라도 켤게요.”
지훈이 영어 자막을 띄웠다.
그러나 철학자의 말을 영어로 알아들을 리가.
그렇게 이해 못 할 알파벳들이 넘어가고… 마무리에 가서야 <두 역사> 이야기가 나왔다.
― 제목이 무엇인가요, 그 책.
― <두 역사>입니다. 그 의미는, 읽어 보면 아시겠죠.
― 언제쯤 나올지 궁금한데요.
― 이번 달 안으로 나올 겁니다.
“이번 달?”
나는 조금 놀라서 중얼거렸다.
이번 달이면… 뮌도 일정을 급하게 당겼구나.
뮌 쪽에 일정을 확인을 해 보려다가 말았다.
<두 역사> 일은 독일에 잠시 맡겨 두자.
난 나의 결정이 급한 때니까.
<그 집>의 영상화.
사실 난 아직도 결정을 하지 못했다.
<그 집>의 드라마화.
공포물과 형사물 등 다양한 바리에이션으로 구현 가능.
소설 자체가 드라마와 비슷한 구조를 취하고 있고.
무엇보다 극본 집필 경험이 큰 힘을 줄 것이다.
한편, <그 집>의 영화화.
주제가 될 취조실의 장면을 욕심껏 살릴 수 있다.
또한, 인간성에 대한 질문을 깊게 던질 수 있고.
하지만… 시나리오 집필 자체가 큰 모험.
답이 잘 나오지 않았다.
누가 보면 행복한 고민이라 하겠지만… 내게는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
이건 영화냐 드라마냐의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상화 이후, 소설 <그 집>의 사활이 걸린 일이다.
고민 끝에 나는 결정했다.
평론가님의 말씀을 들어 보기로.
“지훈아.”
“옙.”
“안전과 모험. 너라면 뭘 선택할래?”
지훈이 뒤를 돌아 날 봤다.
갑자기 뭔 소리래?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녀석은 눈을 깜빡깜빡하더니, 담백하게 대답했다.
“위험부담은 생각하지 말고, 더 끌리는 쪽.”
“둘 다 나름의 이유로 끌리면?”
“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것 같은데요. 어떻게 안정성을 취할 건지, 어떻게 모험을 할 건지. 그 그림을 그려보면 단계에서 더 끌리는 게 생기겠죠.”
…역시 평론가님.
상당히 괜찮은 조언이 아닌가.
나는 상상해 봤다.
드라마가 된 <그 집>과 영화가 된 <그 집>을.
드라마는 술술 잘 넘어간다.
소설이 이미 잘 준비된 극본이니까.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부드럽게 흘러가서 완성됐다.
하지만 영화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스릴러 영화를 만들어야 하지?
그 방향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봤나?
그때였다.
머릿속에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영화 <그 집>의 방향.
그건 내가 쥐고 있는 게 아니었다.
바로 ‘누들’에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나는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떠올린 그 ‘방향’은, 거부하기 힘든 매혹이자 <그 집>에 입히고 싶은 새 옷이었으니까.
* * *
결정을 내렸으니, 남은 건 행동.
먼저 강인춘 PD에게 연락을 남겼다.
그간의 내 고민과 결정에 대해.
그는 좀 서운한 듯했지만, 이해한다고 했다.
다음 작품은 꼭 같이해 보길 바란다며.
그다음 연락은 당연히 조인후 감독.
그는 정말이지, 내 결정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 그럴 줄 알았습니다! 저와 멋진 영화 하나 만들어 보시죠!
“감독님 도움 없으면 힘든 거 아시죠?”
―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죠. 그런데 집필은 어디서 하실 생각이십니까?
“일단 학교 열람실에서 쓰고, 쓰는 대로 감독님께 보내 드리려 했는데요.”
조인후 감독도 바쁜 사람이다.
쓰는 건 내가 알아서 하고, 숙제처럼 보내려 했는데.
― 아… 안 됩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그런가요?”
― 영화는 실질적인 집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요. 문제는 제대로 된 장면과 대사를 생각하고, 집중력 있게 써내는 거죠.
“하지만 매번 귀찮게 할 순 없으니까요. 조인창 감독님 방을 쓸 생각도 했지만… 자료가 많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학교 도서관을 사용하려 했죠.”
― 흠… 괜찮으시면 제 사무실로 오시죠.
“사무실이요?”
조인후 감독의 사무실.
티브이에서 본 적 있다.
강남의 모 빌딩 꼭대기 층이었나.
여느 기업 부럽지 않은 시설과 직원들.
그들이 모두 영화 시나리오를 위해 일한다고 했다.
“제가 거기로 가도 될까요? 폐가 될 것 같은데.”
― 전혀요. 마침 요즘은 집필 기간도 아닙니다. 자리는 남아도니까 와 주시죠. 작가님께서 오시면 저희 직원들 분위기도 좀 살겠죠.
나는 못 이기는 척 그러겠노라 했다.
신세를 지는 걸 떠나, 구경이라도 해 보고 싶었으니까.
“아, 그리고 상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영화 <그 집>의 컨셉에 대해 생각을 좀 해 봤는데요.”
― 컨셉? 스릴러 영화를 생각하신 것 아닌가요? 아니면 공포.
“음… 한번 되짚어 봤어요. <그 집>을 쓰기 시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깨달았어요. <그 집>에 아주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있었다는 걸.”
― 터닝 포인트라. 궁금하네요.
“바로 ‘누들’을 통해 세상에 공개했을 때였어요. 전 그 순간에 <그 집>에 새로운 의미가 생겨났다고 생각해요.”
― 누들? 출판사 말입니까?
“네. 누들은 장르적 특성을 아주 잘 갖춘 출판사예요. 기성작가의 아우라를 거부하는 공모전부터가 정말 멋지죠. 그래서 저도 ‘누들의 책’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영화가 뭘까…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누들의 책’으로 만든 영화.
그 영화는 ‘누들의 이미지’와도 맞아야 한다.
독자가 그랬듯, 관객들도 그걸 바랄 테니.
그리고 작가인 나 역시도.
― 흥미롭군요. 그래서, 답은요?
“컬트 영화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 …컬트요?
컬트 영화.
사전적으로는 소수 집단만이 추구하는 특이한 영화를 뜻한다.
하지만 좀 더 범위를 넓혀 보자면… 기성 영화가 가진 문법을 깨는 실험 영화를 의미한다.
“네. 정확히 말하자면, ‘컬트적 분위기’를 풍기는 영화를 쓰고 싶어요.”
― 아….
조인후 감독은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스읍 하고 마른침을 삼키기도 했다.
조인후 감독이 창작하는 예술 영화.
그 영화에서 조금 더 실험적인 시도를 하는 것.
나는 그것을 내 나름대로 ‘컬트’라 정의했다.
그래서 조인후 감독에게 이런 이야길 하는 거고.
― 그렇다면 저도 공부를 좀 하고 만나야겠군요.
“네. 저도 열심히 준비해 보겠습니다.”
― 후우…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죠.
우리는 바로 약속을 잡았다.
일주일 후. 조인후 감독의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조인후 감독은 전화를 끊기 전, 이렇게 말했다.
― 컬트적인 영화라… 걱정이 되면서도, 역시 설렙니다.
* * *
미국. 시애틀.
영화감독 조나단 란스마이어의 사무실.
그는 소파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쿵!
갑자기 들려오는 둔탁한 소리.
조나단은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엇, 죄송해요. 택배 옮기다가.”
사무실 직원이 머쓱하게 웃었다.
그는 택배 박스를 잔뜩 들고 있었다.
“놀랐잖아. 백인 경찰이라도 온 줄 알았네.”
조나단의 농담에 직원이 낄낄거렸다.
흑인들만이 나눌 수 있는 조크.
조나단은 그 조크를 잘 활용하기로 유명했다.
소싯적 스탠딩 코미디언을 꿈꿨을 정도로 말이다.
“택배 제가 뜯을까요?”
“응. 팬들 선물은 다 모아서 주고, 출판사랑 영화 제작사에서 온 건 대충 목록만 작성해 줘.”
그리고 조나단은 다시 잠이 들었다.
어제 새벽 내내 영화를 봤던 탓이었다.
직원은 익숙한 듯 콧노래를 부르며 택배를 뜯었다.
조나단은 흑인들에게 인기가 굉장히 많았다.
들어오는 선물의 양이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직원은 팬들의 선물과 편지를 한쪽에 차곡차곡 쌓았다.
적어도 편지는 다 읽고 보관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비즈니스용 선물.
값비싼 것은 돌려보내고, 적당한 건 직원들이 가졌다.
무리한 부탁을 하는 편지 역시 반송.
직원이 작은 상자를 하나 들었다.
‘뮌 출판사에서 온 거네? 신간 홍보인가? 어차피 안 읽으실 텐데.’
직원은 칼로 대충 박스 테이프를 뜯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역시나 책.
<그 집>이라는 제목에도 직원은 대수롭지 않았다.
직원은 비즈니스용 선물함에 책을 던졌다.
조나단 감독이 웬만하면 들춰 보지 않는 그곳으로.
툭!
책장에 끼어있던 편지가 한 통 떨어졌지만, 불행하게도 직원은 눈치채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쌓여 가는 상자.
어디론가 떨어져 사라져 버린 크리스의 편지.
“휴… 겨우 다 했네.”
직원은 상자 더미를 들고 나가다가 조나단을 봤다.
조나단은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그는 문을 살며시 닫고는 그대로 사무실을 떠났다.
편지 한 통이 소파 밑으로 들어간 줄은 꿈에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