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미국 시애틀. 누들 출판사.
누들의 터줏대감 세 사람, 파멜라, 숀, 크리스.
그들은 오늘도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올해 공모전 신간 다섯 권은 성공적으로 발매했다.
모든 대형서점 문학 코너에 마련된 ‘누들 신간’ 매대.
그곳에 올라온 다섯 편의 당선작.
그 책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불티나게 팔려 나가고 있다.
이렇게 올해 공모전도 잘 치렀으니… 지금은 별달리 할 일이 없는 상황이다.
그래도 그들은 매일같이 사무실에 나왔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곳이 그들의 아지트니까.
물론… 아직도 숀과 크리스는 좀 냉랭했다.
“와우.”
회사 메일을 확인한 숀이 한 마디 외쳤다.
소파에 누워 책을 보던 파멜라가 물었다.
“왜 오버야.”
“크리스! 네 ‘님’이 한 건 했는데?”
숀이 빈정댔다.
모니터 앞에 앉아 있던 크리스가 헤드셋을 벗었다.
“내 ‘님’?”
“그 한국인 말이야.”
“이상이야. 작가 이름 정도는 외워라.”
“알 바. 이것 좀 봐.”
숀은 흥미롭다는 듯 킥킥댔다.
“방금 AL의 메일을 받았어. 이상이 <그 집> 영화화 제안을 거절했대.”
“뭐?! 왜? 우리가 그렇게 기회라고 강조했는데.”
파멜라가 놀라서 외쳤다.
이번에는 크리스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집>의 판매량이 기대보다 저조한 지금, 작가라면 뭐라도 하고 싶을 텐데?
아시아인이면 중국 자본에 거부감도 없을 테고.
크리스는 침착하게 물었다.
“AL에서 뭐래?”
“작품의 방향성이 맞지 않아서 이상 쪽에서 거절했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봐.”
“몰라. 어려운 얘길 잔뜩 써 놨는데. 네가 봐, 크리스.”
숀은 자리를 비켜 주었다.
크리스는 얼른 그 자리로 가서 메일을 읽었다.
AL의 메일 내용을 정리하면 이랬다.
작가에게 아시아인 중심의 영화 제작을 요구했지만,
작가는 <그 집>이 그렇게 해석되길 바라지 않는다고.
하지만 자신들은 끊임없이 제안할 것이며,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고.
“아시아적으로 해석되길 바라지 않는다….”
크리스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 집>을 처음 봤을 때, 소름이 끼쳤다.
흑인으로서 차별받는 심리를 적확하게 꿰뚫었으니.
하지만 비단 흑인이 아니더라도… 동양인이건, 히스패닉이건 같은 감정을 느꼈으리라.
‘그래. 인물을 동양인으로 바꾸는 건 <그 집>의 가치를 깎는 일이다.’
숀은 파멜라에게 미주알고주알 수다를 떨고 있었다.
주제는 역시 이 웃기는 동양인 작가에 대한 것.
그 기반은 비웃음이었지만, 점점 흥미를 느끼는 게 분명했다.
“어이, 숀.”
“왜?”
“너야말로 이상 작가한테 정이 든 것 같은데?”
“뭐라고?”
숀이 발끈했다.
크리스는 얼른 일어나 사무실을 나갔다.
그리고 휴게실로 들어가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영화화… 아쉽긴 하단 말이지.’
크리스는 영화는 잘 몰랐다.
하지만 AL은 잘 알았다.
문화산업계에서 중국 자본의 위력은 엄청나니까.
AL은 정치적인 회사다.
하지만 수준급의 예술성을 추구하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그곳의 장 대표.
‘될 만한’ 작품을 귀신같이 알아본다던데.
“후우….”
크리스는 한숨처럼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쉬운 일이 아닌가.
‘아유… 장 대표는 왜 동양인 인물을 못 끼워 넣어서 기회를 놓치지? AL한테도 이상 작가한테도 아까운 일인데.’
“조나단이었으면 안 그랬을 거야.”
크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입밖으로 나온 이름에 살짝 놀랐다.
조나단 란스마이어.
미국 사회의 흑인 정체성과 인권을 다양한 방법으로 다뤄 온 흑인 인권 영화의 거장.
그의 영화는 섬뜩한 스릴러를 기반으로 한다.
다양한 인종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방식.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야기 저변에 깔린 인종차별적 현실에 다시 한번 몸을 떨게 된다.
한 마디로.
미국계 흑인들 사이에서는 천재로 통하는 감독.
“….”
크리스는 조용히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껐다.
그리고 뭔가를 결심한 듯 창고로 갔다.
창고에는 신간들이 쌓여 있었다.
그는 <그 집>을 집어 들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숀은 그사이에 어디론가 가 버렸고, 파멜라만이 여전히 누워서 책을 보고 있었다.
크리스는 종이를 한 장 꺼냈다.
‘될지 안 될지는 몰라도, 해 봐야겠지.’
그는 휘갈기는 듯한 필체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 안녕하세요. 조나단 감독님. 저는 누들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는 크리스라고 합니다. 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 * *
<그 집>의 영상화에 대한 고민.
사실 나 혼자 끙끙거려 봤자 별 소용 없다.
그 계열의 전문가를 만나는 게 먼저.
영화의 조인후 감독, 그리고 드라마의 강인춘 PD.
누구를 먼저 만날까 하다가… 후자를 택했다.
강인춘 PD는 ‘형님’ 같은 데가 있지 않은가.
난 좀 편한 마음으로 그에게 연락을 했다.
간만의 연락에 강인춘 PD는 굉장히 좋아했다.
당연히 종로의 홍합집에 가자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집으로 초대를 했다.
강인춘 PD의 집은 경기도의 브랜드 아파트.
입구부터 서 있는 경비들.
까마득한 높이의 아파트 건물.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신도시 태가 났다.
아무튼 아파트 정원을 가로질러 걷고 있을 때.
너절한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인춘 PD가 나타났다.
“어이―! 이상!”
“PD님.”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어. 들어가자.”
몰골은 좀 그렇지만 빙그레 웃는 미소는 여전하다.
그는 나를 아파트 안으로 안내했다.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
나는 강인춘 PD에게 물었다.
“이렇게 쳐들어가면 사모님께서 싫어하시지 않을까요? 걱정되는데….”
“무슨 사모님? 사모님 없어.”
순간 머리가 아찔해졌다.
내가 지금까지 봐 왔던 인터넷 뉴스들.
그중에 강인춘 PD의 이혼 기사가 있었던가.
내가 얼어붙자, 그가 킬킬 웃었다.
“사모님 친정 가셨다. 애들이랑. 장모님 전원주택 사시는데 애들 농촌체험 시킨다고.”
“…놀랐잖아요.”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그가 나를 당당하게 집으로 부른 이유를.
강인춘 PD의 집은 굉장히 좋았다.
드넓은 거실과 기계화된 주방.
깔끔하고 현대적인 인테리어.
고즈넉한 조인후 감독의 집과는 사뭇 달랐다.
“너 온다고 아껴 놓은 양주 꺼내 왔다.”
“맨날 막걸리만 드시는 줄 알았는데. 사양 안 할게요. 뭐 시킬까요?”
“어. 안주 할 거 아무거나.”
보아하니 요리는 전혀 못 하는 모양이다.
대충 여러 군데에서 배달을 시킨 후.
식사와 더불어 술을 한 잔씩 마셨다.
목 넘김이 깔끔한 술.
맛이야 독해도 후유증은 없을 것 같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운을 뗀 후.
나는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PD님, <그 집> 안 읽어 보셨죠.”
“어떻게 읽냐. 책이 나오지도 않는걸.”
“아, 맞네요.”
공모전의 문제는 이거다.
주관 출판사에서 일정 기한 발매권을 독점한다는 것.
그 출판사가 외국이라면… 이런 상황이 생겨 버린다.
“한 달만 참으세요. 그 뒤엔 한국에서도 발매가 될 거예요.”
“뭐, 그래도 대충 이야기는 아니까.”
내가 <그 집>을 처음 구상했을 때, 강인춘 PD의 조언을 많이 들었다.
스릴러에 대한 드라마 PD의 천부적 감각.
그 감각이 적잖이 도움이 되었고.
나는 요즘 내게 일어난 일들을 간략하게 말했다.
“그래서, AL이라는 곳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앞으로도 거절할 거고요.”
“뭐, 너야 한번 결정한 건 끝까지 밀고 가는 놈이니까.”
“그런데, 고민이 하나 있어요.”
“고민?”
“네. 제 생각엔 <그 집>이 영상화하기에 좋은 조건들을 갖춘 것 같아요.”
“어, 맞아. 긴장감도 있고 대중적이잖아. 가족 이야기, 살인자 이야기. 대중들이 다 좋아하는 거야.”
“그래서… 제 선에서 <그 집>을 재작업을 해보고 싶어서요. 그게 드라마건, 영화건.”
“작업해서?”
“제작사에 넣어 보는 거죠.”
길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그 길을 닦아 보겠다.
딱 이 마음가짐으로 말이다.
“‘어느 쪽이건’이라고 말했겠다?”
그가 픽 웃었다.
“너 못 정했지? 영화로 갈지, 드라마로 갈지.”
눈치 빠르긴.
난 말 없이 강인춘 PD의 잔에 양주를 살짝 따랐다.
그는 그걸 바로 입에 털어 넣고는 내게 말했다.
“드라마 해.”
“그렇게 말 하실 줄 알았어요.”
“아니, 인마. 내가 드라마 PD라서 하는 얘기가 아냐. <그 집>이라는 작품이 그렇게 만들어졌잖아.”
“이를테면요?”
“네가 저번에 스토리 얘기한 걸 토대로 말해 줄게. 먼저 서사를 살펴보자. <그 집>에서 가장 빛나는 지점은 ‘긴장감’이야. 그렇지?”
“그렇죠.”
“그 긴장감은 어떻게 성립되지? 특히 초반에.”
“소녀의 실험들을 통해서죠.”
“그래. 넌 ‘실험들’이라고 했잖아. 이게 그냥 실험들이 아니거든. 점점 긴장감을 점층시켜 주는 드라마틱한 요소야. 영화가 시처럼 압축의 장르라면… 드라마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소설에 가까워. 알지?”
영화가 시라면, 드라마는 소설이다.
동의한다.
혜경 역시 문창과 수업에서 그런 얘길 들은 적 있고.
강인춘 PD는 계속 말했다.
“반복이야말로 드라마의 미덕이야. 반복 속에서 점층적으로 긴장감을 쌓아 가는 거지. 드라마의 분량이 주는, 켜켜이 쌓인 텐션이라는 게 분명히 있어.”
“좋네요. 켜켜이 쌓인 텐션.”
“또 한 가지, <그 집>의 후반은 흡사 형사물로 흐르잖아.”
난 고개를 끄덕였다.
수지가 경찰이 되고 난 후.
연쇄 살인마를 찾기 시작하니까.
“범인 추적, 추격전 이런 거는 드라마를 따라올 장르가 없어.”
“왜요?”
“추격전 자체가 ‘드라마적’ 긴장감에 해당하거든. 아주 길고 드라마틱한 추격전이 있다고 해 보자. 영화에서 보면 어떨 것 같니?”
난 상상해 봤다.
스크린에서 계속 이어지는 추격전.
꼬리의 꼬리를 무는 달리기.
“좀… 지루한 감이 있네요.”
“그래! 역시 너 감각이 있다니까. 영화는 시라고 했잖아. 서사를 압축해 주고, 그 안에 인물의 심리를 잘 보여 주는 게 좋은 영화야. 서사를 늘어놓으면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긴장감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드라마는 달라. 드라마는 한 시간 내내 추격해도 돼.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은 그 추격전이란 상황 자체의 긴장감을 원하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는 점점 흥분하며 말했다.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설명이었다.
그러니까….
“<그 집>이 애초에 드라마적 서사를 갖추고 있단 소리죠?”
“바로 그거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거.”
그가 내 잔에 양주를 살짝 따랐다.
“네겐 드라마를 써 본 ‘경험’이 있잖아.”
…그렇지.
<무너지는 날>이라는 드라마.
등단 후 바로 그 작품을 세상에 내보였다.
“그 경험, 무시 못 해. 드라마는 네가 네 재능이 확인된 곳이라고.”
강인춘 PD는 대단히 진지하게 말했다.
한 작품을 마무리해 봤다는 것.
그건 단순히 그 장르에 더 익숙하단 뜻이 아니었다.
작품을 ‘완성’하는 방법을 안다는 거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 것 같아요.”
그가 내 어깨를 툭 쳤다.
“그래. 너 똑똑하잖아. 물론 영화를 해도 잘하겠지. 하지만 지금이 도전에 의의를 둘 땐 아니잖아. 실패 확률을 최소화해야지.”
도전보단 안정성이라는 건가.
구구절절 맞는 말이군.
그의 말엔 사람을 홀리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두 장르 사이에서 고민했던 게 무색할 만큼.
문득, 그의 관록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느껴졌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래, 인마. 나 아무한테나 이런 말 해 주는 사람 아니야.”
그는 껄껄대며 웃었다.
난 아홉 시 경 강인춘 PD의 집을 떠났다.
자고 가라고 노래를 불러서 좀 흔들리긴 했지만,
그러기엔 좀 바쁜 몸이었다.
그나저나… 싱숭생숭하다.
<그 집>의 드라마화.
강인춘 PD의 이야기를 곱씹을수록 혹하니까.
드라마 작업을 하게 되면, 강인춘 PD도 최대한 돕는다고 했고.
그럼… 조인후 감독은 만나지 않아도 될지도.
그때였다.
우웅―
카톡이 하나 들어왔다.
그리고 그 카톡을 보는 순간, 헛웃음을 지었다.
“양반은 못 되시네.”
그는 조인후 감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