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18화 (118/204)
  • 118회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시인으로서, 일본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지 않겠습니까?

    난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일본에 가면 새로운 인생이 펼쳐진다는 건가?

    조선인인 내가 어떻게?

    내 눈에 가득한 의심을 봤는지, 그가 얼른 덧붙였다.

    ― 저는 선생의 시가 탈 조선, 아니, 탈 아시아급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은 곧 세계의 문학 지성 중 하나가 될 겁니다. 선생께서도 그런 믿음이 없지 않으실 텐데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가 안경을 슬쩍 치켜올리곤 말했다.

    ―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도, 토양이 좋아야겠죠.

    나는 픽 비웃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조선이라는 토양을 떠나, 일본이라는 토양으로 오라고.

    일본에서 새로운 영감을 받을 수야 있겠지.

    세계의 문명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 그래서, 제가 일본에 가면요? 일본에서 조선인 건축기사를 써 주기라도 한답니까?

    ― 건축기사 일을 하실 필요 없습니다.

    ― 하지만 제가 가진 기술은 이뿐인데요.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빙그레 웃었다.

    ― 도쿄대에 입학을 하시죠. 학비건 생활비건 학교에서 모두 지원해 줄 겁니다. 선생께선… 아무 걱정 없이 시만 쓰시면 됩니다.

    꿀처럼 달콤한 제안.

    일본은 세계 문학으로 향하는 통로나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지겨운 생활고를 해결해 주겠다고?

    난 거의 사기꾼을 보듯 그를 봤다.

    ― 못 믿으시는군요.

    ― 도쿄대가 한낱 조선인인 제게 그렇게 해 줄 리가 없으니까요.

    ― 선생의 장래를 믿는 겁니다. 문과대 학장과 교수들도 동의를 했지요. 솔직히 학교 입장에서 선생 하나 건사하는 게 뭐 그리 힘든 일이겠습니까. 또….

    그는 다소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 내지에 오신다면, 선생은 더 이상 한낱 조선인이 아니실 겁니다.

    ― 무슨 말씀이신지요?

    ― 선생의 일본 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죠. 보증은 제가 서겠습니다.

    순간, 나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일본인이 되는 것.

    그것이 그의 제안에 딸린 단 하나의 조건이었다.

    그 조건을 듣자, 그를 더는 의심할 수 없었다.

    모든 게 꿰맞춰졌기 때문이다.

    이 교수와 도쿄대가 진정으로 내 작품을 좋게 봤다면… 그래, 조선인인 게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이왕이면 일본인으로 만들고 싶을 것이다.

    나는 선뜻 ‘아니오’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난생처음 겪는 감정에 휩싸였다.

    눈 딱 감고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가고 싶은 욕망.

    동시에 느껴지는 죄책감.

    순간, 그가 내 손을 꽉 잡았다.

    ― 개인만을 생각하십시오. 사실 총독부에서 일하는 것도….

    안 들어도 그의 뒷말을 알 수 있었다.

    ‘애국은 아니잖습니까.’

    하지만 달랐다.

    총독부 건축기사는 전적으로 생계를 위해서 한 일이다.

    가족들을 건사하기 위해 선택한 일.

    자랑할 건 아니지만 부끄러울 일도 아니었다.

    시대와 상황이 이러하지 않은가?

    하지만 내 성공을 위해 일본인이 되는 것?

    이건 생계가 아닌 욕망의 문제였다.

    욕망을 위해 나라를 배신하는 일 말이다.

    나는 그의 손 밑에서 내 손을 스윽 뺐다.

    ―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도망치듯 다방을 달려 나왔다.

    그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언제든 내가 결정을 번복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 불안감이 나를 도망치게 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나는 멈칫했다.

    거리 한가운데에서 일본군이 행진하고 있었다.

    펄럭이는 일장기로 하늘을 가르며.

    나는 사라지는 일본군 행렬을 꽁무니를 멍하니 봤다.

    오묘하고 복합적인 감정이 피어올랐다.

    저 꽁무니를 따라갈 뻔했다는 섬뜩함.

    동시에 세계로 나아 갈 큰 기회를 놓쳤다는 아쉬움.

    대단히 이상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 사건은 내게 은근한 상처로 남았다는 점이다.

    식민지인이 아니었으면 겪을 필요가 없는 일이었기에.

    “…흠.”

    나는 가만히 펜을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적었다.

    <갈림길>

    나는 나의 이야기를 천천히 써 내려갔다.

    특히 마지막에 일본군 앞에서 느낀 감정을 강조했다.

    물론 약간의 픽션을 가미하긴 했다.

    역사 속 ‘이상’을 알아볼 수 없도록.

    그리고 덧붙였다.

    식민지 지식인의 모순된 심리에 대해.

    욕망과 민족 사이에서 고민해야만 하는 숙명에 대해.

    이 문제는 비단 1930년대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트라우마이기도 하니까.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중적인 고민을 겪는다.

    지식을 되도록 조국을 위해 써야 한다는 의무감과,

    조국을 등지고 세계의 중심에 섞이고 싶은 욕망.

    세계를 선택하면 은근한 죄책감이.

    조국을 선택하면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

    전생의 내 경험은 대단히 상징적인 사건이다.

    세계로 나아가려면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

    그 ‘심리적 압박감’.

    그것이야말로 일제강점기가 남긴 마음의 유산이니까.

    글을 다 썼을 땐, 밤이 늦어 있었다.

    나는 글을 처음부터 다시 살펴봤다.

    에세이여서 그런지, 아니면 전생에 느꼈던 내 마음을 그대로 담아 그런지.

    고칠 곳은 마땅히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고치기 싫었는지도.

    그 시절 나는 전쟁에 간접적인 피해를 받았고, 알게 모르게 상처받았다.

    그 상처를 되도록 날것으로 보여 주고 싶었다.

    나는 글을 그대로 메일에 첨부하여, 뮌으로 보냈다.

    * * *

    <갈림길>

    그 글은 내 기분을 좀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자꾸 옛날 생각이 나서일까.

    좀처럼 다른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자전거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한참을 천변을 따라 달렸다.

    하지만 달려도 달려도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

    끼익―

    어느 순간, 자전거를 멈췄다.

    “…그거네.”

    내 마음이 불편한 이유, 알 것 같았다.

    휴대폰으로 지도를 열었다.

    그리고 신라문학 본사와의 거리를 확인했다.

    신라문학 본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자전거로 약 사십 분가량.

    갑자기 자전거를 타고 나타나서 그런지 직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땀으로 범벅이 된 나는 한 직원에게 물었다.

    “저,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한데… 혹시 이준환 편집위원님 계시나요?”

    “네? 아, 예… 계세요. 잠시만요.”

    그는 얼른 편집위원실에 들어갔다.

    잠시 후, 그가 바쁜 걸음으로 다가왔다.

    “들어가셔도 될 것 같아요.”

    “네. 감사합니다. 자전거 잠깐 여기 세워 놔도 될까요?”

    “아… 예. 그러세요.”

    그는 애써 황당하단 얼굴을 숨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전거를 세워 둔 후, 나는 편집위원실로 향했다.

    “이준환 편집위원님.”

    “아니, 이상 작가님.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이준환 편집위원도 적잖이 놀란 얼굴이었다.

    편안한 차림에, 그마저도 땀에 젖은 내 몰골을 보며.

    “…운동하셨어요?”

    “자전거를 좀 타다가 여쭤볼 게 생각이 나서 급하게 들렀어요. 연락을 하고 오면 부러 기다리실까 봐… 안 계시면 그냥 가려 했죠.”

    “하하… 이게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일단 앉으시죠.”

    나는 소파에 그와 마주 앉았다.

    “그나저나 여쭤볼 거라니. 갑자기 무슨 궁금증이 생기셨기에…?”

    “아, 제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나는 그에게 휴대폰에 있는 파일을 열어 보여 주었다.

    그는 휴대폰 속 글자를 찡그리며 바라보았다.

    “갈… 림길? 아이고, 글자가 작아서 어디 보겠습니까? 파일을 보내 주시면 출력해서 좀 보죠.”

    나는 신라문학 메일로 원고를 보냈다.

    직원이 그걸 출력한 후에야 그는 글을 읽을 수 있었다.

    “흠… 음.”

    이준환 편집위원은 꽤 진지하게 글을 읽었다.

    “인상적이네요. 이성과 감성, 지성이 잘 살아 있어요. 독특한 에세이네요.”

    “픽션에세이라 보시면 됩니다. 이번에 독일의 철학자 한 분과 철학에세이를 내기로 했거든요.”

    “철학에세이요? 한국에서도 그런 책이 잘 팔렸으면 좋겠군요.”

    그는 다소 씁쓸하게 말했다.

    “그런데 이 글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글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전체적으로 만족하고.

    언젠가 한 번은 써야 했던 글이고.

    문제는….

    “이 글을 쓰니, 봐 줬으면 하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네?”

    “일본에서 이 책이 발간되었으면 해서요.”

    “…아하.”

    이준환 편집위원은 당황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의외라는 듯 말했다.

    “작가님께 이런 면이 있었군요.”

    “제가 과거사 문제나 역사의식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닙니다.”

    사실이었다.

    이 글을 쓰게 된 것도 틸 버켈의 제안이었고.

    그런데… 쓰고 나니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 글에 담긴 모순적인 감정은 일본인이 읽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생각합니다.”

    잘잘못을 따져 사죄를 받자는 게 아니다.

    그냥… 이런 일들이, 감정들이 있었음을 그들도 알고 인정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것 같았다.

    “하기야, 가해자가 모르는 피해라는 건 얼마나 허무한가요.”

    이준환 편집위원은 날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아무튼, 제가 궁금한 건 일본의 출판사에서 이 글을 실어 줄까 하는 겁니다.”

    도마크 출판사에 바로 연락을 해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워낙 민감한 사안이니… 같은 출판 업계인인 이준환 편집위원의 의견을 묻고 싶었다.

    그는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쉽지 않을 겁니다. 이유야 아실 테고요. 안정적이고 큰 출판사라면 더욱 기피할 만한 내용이죠.”

    이준환 편집위원의 말 대로라면,

    도마크 출판사 쪽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은 걸까.

    “하지만 이렇게 해 볼 순 있겠죠.”

    그가 넌지시 말했다.

    “이상 작가님은 재일교포 쪽과 꽤나 친밀하지 않습니까?”

    그렇긴 했다.

    일본에 첫 에세이를 안착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이후에도 지속적인 지지를 해 주고 있으니.

    “재일교포 쪽 출판사를 알아보시는 게 가장 편한 길이긴 하죠.”

    편한 길이라.

    최고의 길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일본인들이 얼마나 재일교포 출판사의 책을 볼까.

    그리 희망적이진 않았다.

    “또는… 하시던 대로 해 보시는 것도 좋지요. 정면 돌파를 하는 겁니다.”

    정면 돌파.

    오히려 나는 그 말이 더 마음에 들었다.

    어쩐지 속이 시원해지는 말이랄까.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가장 자신 있는 방식이잖아요.”

    그는 무슨 말인지 알지 않느냐는 듯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용기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비로소 작은 미소나마 지어 보였다.

    “기회가 되면, 신라문학에서도 이 책을 내주세요. 독일에 먼저 책이 풀린 이후에야 가능하겠지만.”

    “물론이죠. 언제든지 좋습니다.”

    나는 이만 가 보겠노라고 말했다.

    갑작스레 쳐들어와서 무거운 얘기만 진탕 나눠 버린 셈이었다.

    사무실을 나가는 내게 그가 말했다.

    “저기, 이상 작가님.”

    “네. 편집위원님.”

    이준환 편집위원은 잠시 주저했다.

    “…말씀하세요.”

    “그… 작가님이 쓰신 에세이, 대부분의 일본인이 달가워하진 않을 겁니다. 어쩌면 일본에서의 작가님 커리어를 무너뜨릴 수도 있어요.”

    “….”

    “그 정도는 아셨으면 해서요. 응원과는 별개로.”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 정도는.”

    * * *

    나는 자전거를 끌고 신라문학을 나섰다.

    밖은 완전히 깜깜했다.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니… 까마득하군.

    하지만 자전거를 타기 전에 할 일이 있다.

    “정면 돌파라 이 말이지….”

    나는 도마크 출판사의 미쯔하루 편집장에게 SNS 메시지를 남겼다.

    ― 이상입니다. 편한 시간에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자전거에 올라타려 했다.

    그런데.

    우웅―

    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답장은 바로 왔다.

    역시 일본의 샐러리맨이란 대단하다.

    ― 오랜만입니다. 이상 작가님! 잘 지내셨습니까?

    ― 그럼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독일에서 책을 한 권 냅니다. 그 책을 도마크에서도 내주실 수 있나 해서요.

    ― 아, 물론입니다. 이상 작가님 책이라면 뭐든 환영이죠.

    “뭐든 환영이라….”

    나는 피식 웃고는 이렇게 적었다.

    ― 조만간 일본어 원고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발간 여부를 결정하는 건 그 후에 해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특별히 더 숙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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