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15화 (115/204)
  • 115화

    미국의 누들 출판사.

    심사 후 이례적인 심사위원 회의.

    회의를 연 견 파멜라였지만… 심사위원들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가득했다.

    크리스가 겨우 말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 집>을 쓴 작가가 미국인도 아닐뿐더러,”

    “유로문학상을 탄 순문학 작가라고?”

    숀도 못 믿겠다는 듯 말을 이어받았다.

    “미친. 뭐 이런 일이 다 있어?”

    그는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그는 심사부터 썩 유쾌하진 않았다.

    심사 당일.

    크리스와의 긴 설전 끝에 숀은 백기를 들었다.

    대부분 심사에서 크리스는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집>만큼은 아니었다.

    고집쟁이 숀조차도, 이 찰거머리가 지겨워서라도 입을 다물고 싶을 만큼.

    크리스는 끝까지 주장을 꺾지 않았다.

    여하간 그 심사 과정도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외국인에 유로문학상 수상 작가?

    “이거 곤란해지네.”

    숀이 빈정대듯 말했다.

    “뭐가 곤란하단 거야?”

    크리스가 물었다.

    “아니, 그렇잖아. 누들은 누들만의 장르 문학적 색깔이 있는데, 이렇게 대단하신 순문학 작가를 뽑아 버렸으니 말이야.”

    “뽑은 건 우리야. 우리는 작품만 보고 뽑았고. 그 누구도 잘못은 없어.”

    크리스가 따졌다.

    숀은 알았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크리스에겐 그 모습도 얄미웠지만.

    “두 사람 다 그만해. 또 한판 할 거야?”

    파멜라가 지겹다는 듯 말했다.

    저번 심사의 설전도 세 시간을 훌쩍 넘기지 않았는가.

    “뭐, 아무튼 이렇게 수고스럽게 심사위원 여러분들을 다시 부른 건… 이 상황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정하기 위해서야.”

    “태도라니?”

    한 심사위원이 물었다.

    “이를테면 홍보 같은 거 말이야. 유로문학상이 미국에서 먹히는 상은 아니지만… 내세울 만한 이력인 건 확실하니까.”

    “유로문학상 수상 작가, 미국을 접수하다! 와우! 이런 거?”

    숀이 삐딱하게 말했다.

    크리스는 그런 숀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거칠게 말하면 그렇지. 작가의 이력은 써먹으면 좋겠지만… 문제는 유로문학상의 이미지와 우리 누들의 이미지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데에 있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고.”

    파멜라의 말이 옳았다.

    누들은 ‘힙’한 출판사로 통했다.

    반면 유로문학상은 클래식 중의 클래식.

    누들의 ‘힙’함이 좋아서 책을 사는 독자들이 적지 않다.

    그런 독자들에게 이상의 이력은 오히려 독.

    ‘지루한 작가’라는 인상이 잡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난… 빼는 게 좋다고 생각해.”

    크리스가 말했다.

    “한국의 기성 작가 타이틀 정도만 가져오자고. 사실 유로문학상은 장르와는 아무 상관도 없잖아. 무의미한 홍보야.”

    “하지만 작가는 그렇게 생각 안 할걸?”

    숀이 말했다.

    “그렇잖아. 이 사람은 지금 미국 땅에 첫발을 디뎠다고.”

    “첫발은 아니야. 이미 세 권의 책이 나왔어. 한 권의 에세이와 두 권의 소설.”

    파멜라의 말에 숀이 손가락 하나를 올려세웠다.

    자신의 생각을 잘 들어 보라는 듯.

    “파멜라. 그런데도 왜 우리한테 투고를 했겠어?”

    그의 눈이 빛났다.

    “신선한 이미지를 위해서야. 새롭게 평가받고 새롭게 데뷔하고 싶은 거라고. 그리고… 성공했지. 이상은 우리 누들을 통해서 데뷔할 거야. 보다 신선하게. 젠장, 인정해. 이 사람의 전략, 먹혔어.”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 시장을 장르문학으로 뚫는 것.

    탁월한 선택이었다.

    미국인들의 경향성을 완벽히 꿰뚫은 것처럼.

    “그런 기회를 잡은 사람이 유로문학상 수상 이력을 포기하려 하겠어? 더 주목을 받을 수 있는데?”

    크리스조차도 이번에는 반박할 수 없었다.

    아무리 장르 문학판이라지만… 그런 큰 경력을 왜 이용 안 하겠나.

    파멜라가 말을 이어받았다.

    “문제는… 작가가 이력 홍보를 원하면 우리는 그걸 막을 방도가 없다는 거야. 설득이야 해보겠지만….”

    “어떻게 설득해 보게?”

    크리스의 말에 파멜라가 휴대폰을 들었다.

    “일단, 메일로 운을 떼어 봤어. 당신의 이력을 홍보에 사용하고 싶냐, 뭐 이런 뉘앙스로. 그리고.”

    띠링―

    마침 파멜라의 휴대폰이 울렸다.

    메일 도착 알림이었다.

    “흐음… 지금 답이 왔네.”

    심사위원들이 웅성거렸다.

    숀은 답이야 뻔할 거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지만.

    “읽어 봐. 파멜라.”

    크리스가 보챘다.

    파멜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메일을 읽기 시작했다.

    “누들 관계자 여러분께. 이상입니다. 블라블라블라… 아, 여깄다. 저의 유로문학상 수상이 <그 집>의 적절한 홍보가 될 수 있다면 적극적으로 드러내겠으나, 제 생각엔….”

    파멜라가 멈칫했다.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순간 모든 심사위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유로문학상 수상 이력을 홍보하지 않겠다고?

    대체 왜?

    “사실 저는 문학의 영역을 순문학과 장르 문학으로 나누는 것이 그리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구분은 소설의 상상력을 제약할 뿐이죠. 하지만 지향성과 색깔이라는 게 있습니다. 유로문학상의 색깔과 누들의 색깔은 현격히 다릅니다. 누들에서 저의 스릴러 소설이 나오는 데에 유로문학상 이력을 사용하여 홍보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부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의 이름에는 이미 유로문학상이라는 꼬리표가 달려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누들이 홍보에 이용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지요. 한 마디로, 누들의 색을 해치는 일이 될 겁니다. 저는 누들의 색깔을 믿고, 누들의 방식으로 홍보를 하길 원합니다. 그것을 위해 제 이력을 버리고 공모전에 참여했던 것이니까요. 그럼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이상 올림.”

    정적이 흘렀다.

    숀마저도 입을 막고 할 말을 잃었다.

    출판사의 색을 믿고 자신의 이력을 드러내지 않는다.

    말이 쉽지 작가로선 어려운 일이었다.

    아니, 웬만한 자신감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이렇게 되면… 답은, 정해졌네.”

    누들이 원하는 바.

    그리고 이상이 원하는 바.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너무 정확해서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나, 이 사람 만나 보고 싶어.”

    크리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누들은 작가 인터뷰니 발간 행사니 하는 건 안 했다.

    그들이 관리하는 건 어디까지나 ‘작품’.

    ‘작가’에 대해선 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중에 뭐든, 뭐가 됐건… 기회가 생기면 내가 이 사람을 맡을래.”

    크리스는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다른 심사위원들은 침묵으로 동의했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으로 살아가는 크리스의 감성.

    그들도 그 감성을 <그 집>을 통해 어렴풋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회의가 끝나고, 심사위원들을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파멜라와 숀.

    숀을 중얼거렸다.

    “이해할 수 없어….”

    “유로문학상으로 홍보를 하지 않는 거?”

    “그래. 나라면 간판 삼아 드러냈을 거야.”

    “너라면 그랬겠지. 이마에 써 놨을걸.”

    파멜라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숀은 퍽 진지했다.

    “그 사람, 너무 독특해.”

    “잘됐네.”

    “뭐가?”

    “우리 공모전, 독특한 사람 뽑는 게 목적이잖아.”

    숀은 할 말이 없었다.

    왠지 싸운 적도 없이 진 것 같은 이 기분.

    그는 입을 삐죽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흥. 모든 건 시장이 증명해 줄 거야. <그 집>이 얼마나 팔릴지 두고 보자고.”

    * * *

    누들 공모전 당선.

    아직 언론에는 풀리지 않았다.

    한바탕 귀찮아지기 전에… 축하 파티를 열어야겠지.

    우리가 예약한 곳은 편안한 분위기의 이자카야.

    지훈과 금홍은 물론이고, 피터 한 교수도 불렀다.

    사실 이런 친목 모임은 거절할 줄 알았지만, 의외로 순순히 나오겠다고 했다.

    그렇게 모인 우리 네 사람.

    분명 축하를 위해 모였는데… 뚱한 표정의 피터 한 때문에 분위기가 어색하다.

    “이, 일단 한 잔씩 하시죠.”

    지훈이 애써 분위기를 띄웠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술이 들어가니 슬슬 말이 트였다.

    “아, 근데 5위 한 건 진짜 아슬아슬하긴 했어요. 그쵸, 형?”

    “어. 기분 이상하더라. 떨어질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까.”

    “에이, 떨어질 수도 있었던 게 아니라 붙을 만해서 붙은 거죠.”

    금홍이 위로인지 격려인지 모를 말을 했다.

    잠자코 있던 피터 한이 말했다.

    “사실 떨어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긴 했어요.”

    이건 또 무슨 악담인가.

    지훈과 금홍의 얼굴에 경악이 스쳐 갔다.

    그래도… 말의 다른 의도가 있을 것 같은데.

    “만약 제 말대로 문장을 수정하셨다면… 3위 안으로는 충분히 드셨을 겁니다. 심사위원의 마음을 고루고루 얻어 내서.”

    “그럼 이런 부자연스러운 결과가 나온 이윤 뭘까요?”

    “소수 심사위원의 마음을 강렬하게 사로잡았겠죠. 긴 논쟁이 있었을 테고, 소수파의 의견이 승리하여 마지막 5위에 배치. 그림 나오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그럴듯한데?

    “그 그림, 괜찮네요.”

    여러 사람의 마음을 고루고루 얻는 것보다,

    몇몇의 마음을 제대로 얻는 편이 더 마음에 든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집>을 위해 논쟁을 해준 것도.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나름의 싸움이 있었겠군.

    원래 올림픽이건 뭐건, 마지막 한 자리가 가장 치열한 법.

    “아슬아슬하게 미국행 티켓을 얻으셨네요, 이상 작가.”

    피터 한이 내게 술잔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술잔에 내 잔을 부딪쳤다.

    “두 분이 번역을 잘해 주신 덕이죠.”

    내 말에 금홍이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후련하고도 뿌듯한 얼굴이었다.

    그에 비해 피터 한은 시종 무표정.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다음 작품은 뭘 쓰실 생각입니까?”

    피터 한이 내게 물었다.

    “아, 그게… 제가 틸 버켈이란 철학자에게 한 장의 사진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에게 받은 경성 사진에 대해 말했다.

    세 사람 모두 흥미를 보였다.

    “이미지를 가지고 쓰는 에세이라… 철학이나 역사적 요소도 함께 들어가고. 재밌겠네요, 형.”

    “맞아요. 그런데 1930년대 경성이라니. 생소하실 텐데 괜찮겠어요?”

    금홍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나는 비죽 나오려는 웃음을 삼키고 말했다.

    “상상력을 발휘해야죠.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풀어 가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거예요. 역사와 철학을 좋아하긴 해도, 전문가는 아니잖아요.”

    “저라면 소설처럼 쓰겠습니다만.”

    피터 한이 말했다.

    “소설처럼요?”

    “작가시잖아요.”

    심플한 대답.

    하지만 귀담아둘 만했다.

    에세이스트도 소설 형식을 많이 차용하니까.

    “다 쓰면 홈페이지에 번역본을 올리실 건가요?”

    “네. 금홍 샘, 도와주실 수 있죠?”

    “힘내 볼게요.”

    피터 한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차마 꺼내지 못하는 듯.

    흠… 대강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 것 같은데.

    나는 그를 물끄러미 봤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술만 털어 마셨다.

    뭐, 오래 놀리는 것도 좋은 건 아니지.

    “하지만 영미권에 출판할 책은… <그 집>처럼 번역을 할 필요도 있겠죠.”

    내 말에 피터 한은 바로 외쳤다.

    “제가 하겠습니다.”

    금홍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토록 적극적인 피터 한을 본 적이 없어서였을까.

    그 역시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했다.

    “…그러니까, 작가님이 필요하다면 도와드릴 수 있다는 거죠. 시간이 된다면 말입니다.”

    어련하시겠습니까.

    “<그 집>의 번역이 즐거우셨나 봐요. 교수님.”

    금홍이 해맑게 웃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즐거웠습니다. 무척이나.”

    좀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해 줬으면 좋으련만.

    그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의 화제는 다시금 ‘경성 사진’으로 돌아왔다.

    나는 경성의 이미지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집에 갈 무렵 다짐했다.

    그 에세이를 소설의 형식으로 써 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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