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13화 (113/204)

113화

D―TV의 ‘인간과 세계’ 팀.

뮌 출판사의 도미닉 크로스 팀장.

그리고 철학자 틸 버켈.

이들이 어젯밤 한국에 도착했다.

전시회장에서 열릴 대담의 녹화는 내일.

하지만 다큐멘터리 자체의 녹화는 이미 진행 중일 거다.

오늘은 이들과 간단하게 식사를 하기로 했다.

나는 손님맞이를 위해 집을 나섰다.

내가 예약한 약속 장소는 삼청동의 레스토랑.

그들은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많은 관광객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훤칠한 서양인들.

그들을 찍고 있는 카메라와 스태프들.

그들 무리가 날 먼저 발견했다.

한 동양계 여자가 먼저 내게 다가왔다.

“이상 작가님이시죠? 전 통역사로 함께 온 다이앤 박입니다.”

“아! 다이앤 씨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생각보다 마르고 작은 여자.

그러나 목소리만큼은 대단히 또렷했다.

다이앤은 능숙하게 모두를 소개했다.

“도미닉 크로스 팀장님이십니다.”

나는 도미닉 팀장과 악수를 했다.

굉장한 장신에 금발과 푸른 눈.

전형적인 아리안계의 중년 남자였다.

“이쪽은 ‘인간과 세계’의 올리버 마이어 PD님이십니다.”

올리버 PD는 곱슬머리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그 머리칼에 어울리는 시원스런 미소도.

문득 강인춘 PD가 생각났다.

국적을 막론하고 방송국 PD들은 서글서글한가 보다.

“모두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틸 씨가 보이지 않는데요?”

정말이었다.

원격 대담으로 유일하게 얼굴을 아는 틸 버켈.

그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이 되었다.

사고가 생겼거나, 풍토병에 걸렸거나.

그런데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난감한 듯 웃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올리버 PD가 입을 열었다.

“그게… 틸은 오늘 만남을 꺼렸거든요.”

“네? 어째서….”

“이상 작가를 만나면 내일 할 이야기를 미리 모두 쏟아부을 것 같다고요.”

이건 또 무슨 소리람.

“하지만 제가 식사 대접을 하려는 것뿐인데요. 가벼운 담소나 좀 나누고….”

도미닉 팀장이 손을 내저었다.

“틸은 사전엔 가벼운 담소 같은 건 없어요. 지금도 머릿속에 대담으로 가득 차 있을걸요? 경주마처럼.”

“거, 참….”

난 헛웃음을 지었다.

도미닉 팀장이 이해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상 작가 앞에서 절제를 못 할 것 같으니 안 나오겠다 이거겠죠. 뭐, 우리야 좀 더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어서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올리버 PD가 와하하 웃었다.

두 사람, 알게 모르게 틸에게 많이 시달린 걸까.

아무튼 나는 두 사람을 데리고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한식과 서양식의 퓨전 레스토랑이었다.

카메라는 계속 우리를 찍고 있었다.

올리버 PD가 긴장 풀라는 듯 말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내레이션도 저희 쪽에서 넣을 거고, 작가님은 자연스러운 모습만 보여 주시면 되니까요.”

“그래도 조금 어색한데요?”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져요. 하하….”

도미닉 팀장이 웃으며 말했다.

그는 벌써 카메라 익숙해진 듯했다.

어쨌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긴장이 풀었다.

다행히 세 사람 모두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었다.

“다큐 제작비가 적잖이 드셨을 텐데… 대관료가 그렇게 많이 나올지 저도 몰랐거든요.”

“해외 로케 촬영을 하면 종종 있는 일입니다. 다행히 제작비 문제는 해결됐어요. 틸의 손을 빌리지 않고 방송국 차원에서 처리했죠. D―TV의 국장님도 철학과 출신이거든요. ‘철학 스터디’ PD가 국장님 후배라서, 따로 찾아가 부탁을 좀 했죠.”

나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독일도 인맥은 무시 못 하는구나 싶어서.

올리버 PD는 방송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편안하고 우아한 분위기에서 촬영을 할 거예요. 틸과 이상 작가님만 비스듬히 마주 보고, 예술론에 대한 대화를 나누죠. 대본은 준비하지 않았어요. 라이브 방송도 아니고, 편집이야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맘껏 하시면 돼요.”

“그래도 흐름이라는 게 필요할 텐데요.”

“그건 틸이 알아서 이끌어 갈 거예요. 독일에서 틸은 적도 많지만 인기도 굉장히 많거든요. 화법이 시원시원하고 상대를 매료시키는 재능도 있죠. 필요할 땐 좋은 사회자가 되고요. 아, 그래도 빈손으로 오실 순 없을 테니… 이걸 보시죠. 예상 질문지랄까요.”

그는 파일을 하나 내밀었다.

파일 안에는 한 장의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한국어로 된 몇 가지의 질문들.

― 예술의 무용한 낭만은 <등>에서 어떻게 실현되어 있는가.

― 예술의 무용한 낭만이란 아이디어는 언제 어떤 계기로 떠올렸는가.

― 예술의 미래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

“흥미롭네요. 잘 생각해 보죠.”

도미닉 팀장이 끼어들며 말했다.

“그 질문은, 앞으로 나올 대담집의 챕터이기도 해요. 작가님의 생각을 정돈해서 말씀해 주시면 더 좋겠죠.”

뮌에서 나올 틸 버켈과 나의 예술론 대담집.

도미닉 팀장은 벌써부터 기대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유럽 도서 시장에서 철학은 여전히 인기예요. 특히 틸 버켈과 같은 발언권이 강한 철학자의 책이 잘 나가죠. 그리고 문학 시장에서는….”

그는 나를 진지한 얼굴로 빤히 보았다.

“동양권 문학이 조명을 받고 있어요. 유로문학상 이후로 더욱.”

올리버 PD도 거들었다.

“유로문학상의 비유럽 부문, 오랫동안 미국이나 남미 같은 서구권이 가져갔거든요. 유럽 부문과 뭐가 다른가 싶은 느낌이었는데… 오랜만에 동양 작가가 수상을 한 게 나름대로 화제가 되었죠.”

“그래서 아마 이번 예술론 대담집은 작가님의 이름을 유럽에서 다시금 되새기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물론 틸 버켈을 상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도미닉 팀장이 말했다.

그 말엔 내가 ‘잘’ 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었다.

적어도, 틸 버켈에게 밀리지 않기를.

나는 와인으로 입을 헹구곤 대답했다.

“문학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제 이름을 알리는 게 조금 낯설긴 합니다만, 좋은 기회란 건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보죠.”

도미닉 팀장이 씩 웃었다.

“믿음직하군요. 서울까지 온 보람이 있어요.”

“아,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내 말에 두 사람이 귀를 기울였다.

“틸 버켈이 제게 뭔가 제안할 수도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뭔지 알 수 있을까 해서요.”

“아, 그건 저희도 뭔지 모릅니다. 팀장님은 아십니까?”

“모릅니다. 비행기에서 슬쩍 물어봤지만, 절대 말해 주지 않던걸요.”

두 사람은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녹화 방송이라 그런가….

곤란한 일이 생겨도 편집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편집을 떠나서 나는 순수하게 궁금했다.

틸 버켈의 ‘제안’이라… 과연 무엇일까.

* * *

서울의 모 호텔 룸.

틸 버켈은 혼자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간단한 룸서비스.

함께 온 사람들은 멋을 내고 이상 작가를 만나러 갔지만 틸은 전혀 외롭지 않았다.

아니, 그는 외로움이란 감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틸은 미리 구한 전시 <등>의 도록을 보고 있었다.

그는 현대 미술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미학 관련 논문을 수차례 썼을 정도.

도록에 실린 이상의 시, <원의 동선>.

틸은 그 시가 마음에 들었다.

물론 그는 문학엔 관심이 없었다.

<원의 동선>이 문학적으로 고아하다 해도, 그에겐 그리 감흥을 주지 못했다.

다만, 이 시는 예술 철학적으로 의미가 깊었다.

‘예술의 무용함을 빚어낸 시라… 이 전시에서 보여 주는 광기, 천재성이란 요소 역시 무용함으로 수렴된다. 하지만 그게 아름답다는 논리겠지. 그래서 결코 멈추지 않고 흐른다는 거고.’

그는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반쯤 먹다 만 식사에는 더 손대지 않았다.

대담 녹화는 내일이었다.

틸 버켈이 그토록 기다리던.

대담 자체도 기대가 됐지만… 사실 이상을 만나러 온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는 가방에서 두 장의 사진을 꺼냈다.

각각 다른 장소를 찍은 두 장의 흑백사진.

틸 버켈은 그것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 사진들을 함께 볼 사람이 드디어 나타났군.”

그는 씩 웃었다.

* * *

우리는 식사를 다 하고 레스토랑을 나왔다.

다음으로 그들을 데려간 곳은 한적한 카페.

그곳에서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분위기는 점점 인터뷰로 흘러가고 있었다.

도미닉 팀장이 제법 대화를 잘 이끌었다.

“파리에서 쓰셨다죠? <등> 말입니다.”

“네, 그랬죠. 고흐의 집에서 영감이 시작된 글인데… 어쩌다 보니 독일에서 더 큰 인기를 끌게 됐죠.”

“<등>은 좀 묵직한 데가 있으니까요. <내외인>과 비교해서 어느 쪽이 낫다곤 못 해요. 취향의 문제죠. <등>이 꽤 다양한 방향으로 해석되고 있는데,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처음엔 천재와 광기에 대해 집중하며 쓴 글이었어요. 하지만 쓰다 보니 예술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가 되더라고요. 글쓰기라는 게 그렇잖아요, 작가가 이끌어 가는 힘이 있고, 글이 스스로 방향을 잡아 가는 힘이 있고. 그 두 힘 모두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식의 질문이 자유롭게 오갔다.

카메라가 있다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마음이 편했다.

“요즘 프랑스 출판계와의 관계는 어떤가요?”

나는 좀 짓궂게 물었다.

하지만 그들의 자존심 싸움 덕에 나도 피해를 보지 않았는가.

이 정도는 물을 권리가 있지.

“아하하… 곤란한 질문을 하시는군요.”

도미닉 팀장은 난감한 듯 웃었다.

마리옹 편집장이 저들에게 일침을 날리지 않았던가.

그도 뭔가 재치 있는 응수를 하고 싶을 텐데.

“…유럽 경제도 EU로 묶인 마당에, 출판계도 더 힘을 내야겠죠.”

이렇게 두리뭉실한 대답이라니.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웃어넘겼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계속될 때였다.

우웅― 우웅―

“아, 죄송합니다.”

어딘가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알 수 없는 번호의 배열.

나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우웅― 우웅―

“급한 전화 아닌가요? 받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저흰 커피 마시고 있을게요.”

두 사람은 괜찮다는 듯 말했다.

이 번호, 대체 뭐지?

“여보세요.”

― Hello.

…헬로?

그리고 이어지는 굉장히 빠른 영어.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황당한 가운데 머릿속에 스치는 단어.

‘누들’

나는 조심스레 한 마디로 물었다.

“…누들?”

― Yes! Yes!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당선이구나.

기쁜 것도 잠시.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하나 싶었다.

메일과 휴대폰 번호 모두를 기재하란 투고 요강.

그에 맞춰 별생각 없이 번호를 적었던 게 화근이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한 사람.

바로 다이앤 박이었다.

“저기, 다이앤 씨. 정말 죄송한데… 혹시 영어 통역도 가능하신지.”

“네? 네, 간단한 거라면.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나는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다이앤이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 뭐라고요?”

그쯤 되자 두 남자가 관심을 가진 건 당연한 일.

저들끼리 뭐라고 말을 하더니, 다이앤에게 물었다.

다이앤은 못 믿겠단 얼굴로 내 사정을 전했다.

두 사람을 바로 달려들었다.

도미닉 팀장이 말했다.

“미국 공모전에서 당선이 됐다고요? 아니, 왜 공모전을…?”

“그게, 사정이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멋진 타이밍이군요. 혹시 지금 이 상황, 다큐에 내보내도 되겠습니까?”

올리버 PD는 역시 방송인.

이 이벤트를 바로 물어 잡았다.

나는 잠시 멈칫했다.

당선 소식이 유럽 방송을 타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차피 다 알려질 상황.

어디가 먼저냐의 문제겠지.

“뭐… 잘만 편집해 주신다면… 좋습니다.”

“그럼 스피커폰으로요. 어서요.”

올리버 PD가 얼른 진두지휘를 했다.

나는 휴대폰을 스피커폰으로 돌렸다.

그리고 다이앤을 통해 누들 담당자와 통화를 했다.

“네. 말씀하십시오. 이상입니다.”

― 네. 저는 미국 누들 출판사의 파멜라 조이입니다. 아까 전화 받으신 분은 누구십니까?

“그분이 투고를 하신 작가입니다. 저는 그분의 통역사고요.”

― …미국인이 아니셨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한국에 사는 한국인 작가입니다.”

그쪽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한 마디를 내뱉었다.

― Oh my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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