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전시회는 생각보다 성황이었다.
아마도 언론의 연이은 보도 덕분이리라.
[유로문학상 수상 작가 이상, 미술가들과 손잡다.]
[이번에는 <등>? <내외인>을 이을 이상의 비상.]
[미술로 펼쳐질 이상의 <등>, 유로문학상의 영광 이어 가나.]
기사의 초점은 아직도 ‘유로문학상’이다.
역시 ‘상’이란 대중에게 자극적인 소재인 모양이다.
한편, 전시를 다루는 평론들이 흥미로웠다.
미술 평론 쪽에서는 내 시 <원의 동선>을,
문학 평론 쪽에서는 미술 작품에 관심을 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한 미술 평론가는 <원의 동선>에 대해 이런 해석을 내놓았다.
― 이상의 <원의 동선>은 시각 예술품 사이에서 활자가 불어넣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호흡이었다. <원의 동선>은 도넛 형태의 독특한 갤러리를 염두에 두고 쓴 작품으로 보인다. ‘걷다’라는 용언의 반복적 활용은 관객들의 시각 예술품 관람을 ‘시각’의 관점에서 전시회장의 활보라는 ‘몸’의 관점으로 확대한다. 그리고 그 결과 작품의 이성적 이해에서 벗어나 몸의 감각으로의 전이를 이루어낸다. 이 예술의 감각적 전이는 활자가 시각 예술에 줄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호흡이며, 선물이다.
반대로 한 문학 평론가는 전시 <등>을 이렇게 평했다.
― 가장 먼저 본 것은 역시 <원의 동선>이다. 이 작품은 아주 독특하다. 갤러리라는 공간적 요소와 그곳의 시각 예술품들이 없으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비평들이 주지했듯, <원의 동선>은 우리로 하여금 갤러리를 하염없이 돌게 만든다. 그러나 이 ‘걸음’의 지속성은 심미적 자극 없이는 이어질 수 없다. 바다로 만들어진 여인과 비대칭적인 부부, 그리고 빛으로 만든 벽화까지. 이 매력적인 서사야말로 제자리걸음을 계속하게 하는 힘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원의 동선>은 미술 작품이 만들어 낸 서사의 끝에 마련된 점이며, 다시금 관람을 시작하게 하는 시작점이다.
미술과 문학을 자유롭고 유연하게 연결한 평론들.
나는 글을 써 준 평론가들에게 연락을 했다.
평론을 번역해서 홈페이지에 올려도 되겠냐고.
그들은 모두 좋다고 했다.
이후 몇 가지의 작업을 했다.
전시회의 사진과 평론을 모아, 하나의 글을 만드는 일.
그리고 그 글을 번역하는 일.
무료로 올려놓은 포스팅이었기에 돈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홍보용 글이었고, 그 효과는 나쁘지 않았으니.
한번은 도미닉 팀장에게서 이런 메일이 왔다.
― 전시회에 대한 글 잘 봤습니다. 곧 틸 버켈과 대담집을 내기로 하셨다지요? 틸이 직접 저희 뮌에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저희 역시 작가님의 예술론을 대중서로 만들 기획을 하는 중이었으니, 타이밍이 딱 맞아떨어져서 기쁩니다. 그 핑계로 저도 한국에 가서 작가님을 뵙고 싶습니다만.
뮌에서 대담집이 나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미닉 팀장이 직접 온다고?
기쁘고도… 부담스러웠다.
출간 계약을 위해 오는 것 치곤 좀 먼 거리 아닌가.
난 이렇게 답장했다.
― 와 주신다면야 정말 감사할 것 같습니다. 다만 거리가 멀어 폐를 끼치는 게 아닌지 우려스럽군요.
이어서 온 답장은 더 기가 막힌 것이었다.
― 저야 멀리 외근을 나가면 나갈수록 좋지요. 은퇴를 앞둔 직장인이란 그런 법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내가 졌다.
누가 이들을 말리랴.
아무튼 틸 버켈과 D―TV 제작진, 그리고 뮌의 도미닉 크로스 팀장이 오는 날이 잡혔다.
바로 일주일 뒤.
그리고 촬영은 열흘 뒤였다.
이들은 모두 나 하나를 위해 먼 길을 오는 셈이다.
문득, 리브레가 날 위해 마련해 줬던 여러 일이 떠올랐다.
손님맞이라…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 * *
미국 시애틀. 누들 출판사.
출판사의 ‘심사위원’들은 간만에 회의실로 모였다.
스릴러 부문의 총 7인의 심사위원들.
그들은 모두 2, 30대로 구성된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가끔 ‘오만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지만, 현재 미국의 장르 문학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파멜라 조이가 헛기침을 했다.
그녀는 현재 웹에서 가장 잘나가는 스릴러 작가였다.
누들은 직위 구분 없이 심사위원제로만 운영되지만, 대부분 회의는 파멜라가 진행했다.
“올해도 칠백 편이 넘는 소설이 투고됐어. 그중 이백 편은 수준 미달의 허수. 총 오백 편을 나눠서 봤지. 장편 소설 오백 편이라… 다들 읽느라 수고 많았어.”
그 옆에 앉은 숀 블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누들의 터주대감이자, 젊은 나이에 스릴러 전집을 발행한 베테랑이었다.
“생각보다 할 만하지 않았어? 아니올시다 싶은 건 바로바로 정보 공유해서 헛고생 줄였으니. 실질적으로 본 건 이백 편? 끝까지 본 건 오십 편쯤이려나.”
“난 어렵던데. 수준들이 비슷비슷해서. 최상위권은 정해져 있지만.”
크리스 터너가 말했다.
그는 섬짓한 공포와 스릴러를 배합한 독특한 작품 세계를 지니고 있었다.
다소 마이너해도 팬층은 확고한.
또한 그는 이들 중 유일한 문학 박사 학위 소유자였다.
그렇다고 발언이 강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박사님은 생각이 너무 많으셔서 그런 것 같은데? 역대급으로 쉬운 심사였다고.”
크리스는 숀이 빈정거리는 걸 모른척했다.
대신 다른 심사위원과 이야기를 하는 걸 선택했다.
파멜라는 숀에게 속삭였다.
“너, 까칠하게 굴지 마. 아직도 크리스가 심사위원이 된 게 싫은 거야?”
크리스는 작년부터 누들의 심사위원으로 영입됐다.
숀의 절친한 동료 작가를 제치고.
숀은 내심 이렇게 생각했다.
크리스가 일종의 ‘흑인 쿼터제’ 가산점을 받았다고.
그도 그럴 것이, 크리스는 심사위원 중 유일한 흑인이었다.
아무튼 오십 편의 작품을 두고 심사가 시작됐다.
뽑히는 건 다섯 편.
누들 심사장은 전쟁터였다.
심사위원들의 취향도 천차만별.
자신이 끌린 작품에 대해 ‘설득’하는 일.
그것도 심사의 과정 중 하나였다.
혹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누들이 각광을 받는 이유.
그것은 다수결과 같은 ‘지루한’ 심사를 벗어나 심사위원의 자존을 마음껏 뽐내기 때문이라고.
파멜라가 말했다.
“자, 숀의 말처럼 합의 끝에 추려진 건 오십 편이야. 이제 본격적인 심사를 시작하자구.”
한편 한편을 두고 벌이는 진지한 토론.
다행히 올해는 별다른 격전은 없었다.
다들 대세에 동의했고, 필요한 경우 양보했다.
마흔아홉 편의 작품들이 그렇게 지나갔다.
총 다섯 작품이 통과.
마흔네 개의 작품이 탈락.
한나절을 꼬박 심사에 쏟은 성과였다.
이즈음 됐을 때, 다들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이번 심사는 좀 쉬운데? 마지막 작품만 탈락해 준다면 이대로 결정이야.’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이번 심사야말로 역대급 설전이 오가리라는 걸.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은… <그 집>이었다.
“이건 볼 것도 없지 않아? 어떻게 오십 편 안에 든 거야?”
숀이 딱 잘라 말했다.
파멜라는 음… 하고 뜸을 들였다.
“사실 내가 합격시켰어. 우리 색깔이 아니라 아쉽기도 하지만 필력도 좋고, 멋진 작품 같아서.”
“지루해. 이것도 그거잖아. 순문학에서 많이들 하는… ‘인생은 이런 거야’, ‘인간은 이런 거지’ 뭐 이런 잘난 척하는 류의 작품.”
숀이 대놓고 <그 집>을 비꽜다.
파멜라는 이미 뽑힌 다섯 작품을 살펴봤다.
“하지만 이 다섯 작품보다 수준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을까? <그 집>이 마지막이고, 이미 다섯 작품이 뽑혀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난 당선작으로 밀고 싶은데. 1위는 아니더라도.”
“왜?”
숀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긴장감 있잖아. 보기에 따라 마지막이 아쉬울 순 있지. 하지만 그게 틀린 방향은 아니지 않아?”
“아니. 내가 보기엔 마지막 방향을 제대로 잘못 잡았어. 이 사이코패스 킬러의 캐릭터를 잘 만들다가 왜 마지막에 그런 맥 빠지는 소리를 하냔 말이야. ‘그게 정답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라니? 이게 대체 뭐 하자는 거지?”
“그거야 진짜 확신할 수 없으니까. 자기 자신도.”
그 말을 한 건 크리스였다.
시종 조용하던 그의 반박.
“이해가 잘 안 가는데. 확실한 캐릭터보다 애매한 캐릭터가 낫다는 거야?”
숀이 물었다.
“캐릭터는 이미 충분히 보여줬어, 숀. 넌 사이코패스라고 표현했지만, 글쎄. 작품에 이 양오빠가 사이코패스라는 말은 없지 않아? 그냥 ‘그런 성향’이 있다는 거지.”
“그게 사이코패스지. 확실하게 말하자면.”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는 뜻이겠지. 한 인간의 개념을 그렇게 함부로 정의하지 않겠다는 거야. 스릴러는 캐릭터가 아니라 사건으로 보여 주는 거야. 지금 이… 그래, 네 말대로 이 사이코패스 남자. 이 남자도 사람이야. 사람인 이상 운명의 장난에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다고. 그리고 그때에 내뱉기에 딱 알맞은 대사 아닌가?”
“너 지금….”
‘문학 박사님 티를 내는 거야?’
숀은 그렇게 말하려다 삼켰다.
“내가 좀 더 말해도 될까?”
“얼마든지, 크리스.”
파멜라가 중재하듯 말했다.
숀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난 이 소설이 이번에 온 수백 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해.”
“진심이야?”
한 심사위원이 물었다.
“그래.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지금부터 그 이유에 대해서 말할 생각이야.”
크리스가 안경을 슬쩍 들어 올렸다.
작년부터 시종 조용하고 얌전했던 크리스 터너.
그가 이렇게까지 자기주장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첫째, 상황적인 긴장감과 심리적인 긴장감을 모두 잘 잡았어. 둘째, 인물을 캐릭터가 아니라 사람처럼 만들었지. 그리고 셋째, 이건 좀 개인적인 건데….”
“어차피 심사는 개인적인 거니까.”
파멜라가 말했다.
“내가 미국에서 살아가는 흑인으로서 느끼는 공포감이 부여되어 있어. 너희들이… 얼마나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
심사위원들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스쳤다.
장르 소설 심사장에 인종적인 이야기라니.
“저기요, 그렇게 정치적인 문제로 넘어갈 거야? 여긴 ‘재밌는’ 이야기를 뽑는 자리라구. 주인공이 입양아이기 때문에 이민자와 동일시 될 수 있는 건 이해해. 하지만 그런 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아냐?”
숀이 강하게 주장했다.
크리스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건 네가 백인이니까.’
하지만 그는 그 말을 삼켰다.
그리고 침착하게 이야기를 이어 갔다.
“입양아 소재를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니야. 내가 말하는 건 이 ‘실험’들이지. 이 실험들, 이민자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섬뜩해. 공포스러울 정도야. 이민자들은 미국의 심리적인 규율을 몰라. ‘자유’의 나라거든. 하지만 백인들만이 공유하고 있는 법칙이 있어.”
“진심으로 네게 이 말을 해 주고 싶어. 네가 방금 한 말, 좀 위험하게 들려.”
숀이 경고하듯 말했지만, 크리스는 물러나지 않았다.
“규율을 모른다는 공포감. 그리고 알려고 하는 욕망. 그 모든 게 담긴 이야기라고, 숀. 이 소설에는 모든 종류의 긴장감이 다 담겨 있어. 첫째, 상황적 긴장감, 둘째, 심리적 긴장감, 셋째… 정치적 긴장감.”
점점 감정적으로 흘러가는 듯한 심사.
다른 심사위원들은 어느 편도 들 수 없었다.
‘재미’의 영역에서 <그 집>은 독특했다.
서사를 다 깔아 놓고 결정적인 순간에 한 발을 뺐달까.
하지만 크리스의 말대로… ‘긴장감’의 영역에서 <그 집>을 이길 작품은 없었다.
“오케이. 그럼 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어.”
숀이 양손을 다 들었다.
“<그 집>을 뽑는다면, 이 심사에서 내 이름을 빼 줘.”
“숀!”
파멜라가 그만하라는 듯 말했다.
크리스가 피식 웃었다.
“그럼 나도 똑같이 말할래.”
크리스는 팔짱을 꼈다.
“<그 집>을 뽑지 않는다면, 이 심사에서 내 이름을 빼.”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자존심으로는 어느 쪽도 둘째가라면 서럽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자존심은 종류가 달랐다.
숀은 가난한 백인 가정에서 스릴러 작가로 ‘성공’했단 자존심이,
크리스는 흑인으로서 미국 사회에서 ‘생존’했다는 자존심이 남달랐다.
“이럴 때는 이 방법뿐이지.”
파멜라가 하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끝이 날 때까지 싸워 봐.”
그 말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설전을 시작했다.
누들에는 다수결도 양보도 없었다.
설전에서 이긴 사람이 민 작품이, 곧 당선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