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11화 (111/204)

111화

전시회 오픈이 하루 남았다.

오늘은 전시회 전야제가 있는 날.

그러니까, 참여 작가들과 작은 파티를 열기로 했다.

얼마나 격식을 차려야 하나….

감이 잘 잡히지 않아 옷장을 뒤지고 있을 때였다.

지훈이 내 방에 들어오더니 말했다.

“형, 잠깐 이리 와 보세요.”

“뭔데 그래?”

“D―TV 쪽에서 메일이 왔어요.”

“D―TV? 철학 스터디 쪽이야?”

“아뇨. 이번에는 무슨 다큐라던데요?”

“다큐? 다큐멘터리?”

웬 다큐멘터리?

나는 좀 의아한 상태로 작업실에 갔다.

작업실 테이블엔 메일의 출력본이 있었다.

“뒷장에 금홍 샘이 번역한 내용도 있어요.”

“빠르기도 하다.”

“저희야 뭐 오 분 대기조 아닙니까.”

뒷장엔 과연 번역본이 있었다.

“…어?”

생각지도 못했던 내용이었다.

D―TV의 다큐멘터리 ‘인간과 세계’.

다음 달 방영분에 틸 버켈과 나의 대담을 싣고 싶다는 거다.

대담을 위해서 제작진이 서울에 온다는 것도 놀라운데, <등>의 갤러리를 대담장으로 사용하겠다고?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메일의 한 구절을 읽었다.

“‘철학 스터디’의 대담이 독일 국민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때 못다 한 대담을 저희 D―TV의 다큐멘터리 ‘인간과 세계’에서 이어 나갔으면 합니다… 이 얘긴, 예술철학론을 가지고 대담을 해 달란 거겠지?”

“그렇겠죠.”

“틸 버켈이 한국에 온단 뜻이기도 할 테고.”

“괜찮을 것 같은데요? 대담집도 낸다잖아요. 하면 좋을 것 같은데.”

“하고 싶기야 하지.”

내게도 틸 버켈과의 대담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좀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는데….

생각보다 ‘철학 스터디’의 시간이 길지 않았다.

그래도 그 덕에, 독일에서 <등>이 자리를 잡았지.

온다는 사람들을 말릴 이윤 없었다.

다만… 갤러리에서 대담을 하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일단 갤러리 쪽이랑 미술가협회의 허가를 받아야 할 것 같아. 오늘 내 선에서 얘길 꺼내 볼 테니, 좀 기다려 달라고 잘 좀 전해 줘. 알았지?”

“오케이, 알았어요.”

지훈이 내 말을 빠르게 메모장에 적어 넣었다.

* * *

전시회 전야제.

나는 김미소 작가와 함께 전시회장에 도착했다.

“와….”

김미소 작가가 탄성을 내뱉었다.

과연 그럴 만했다.

예전에 전시회장을 찾았을 땐.

이곳은 휑하고 텅 빈 공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배열된 예술작품들.

그리고 간간이 적힌 소설 속 대사들.

예술작품과 언어들의 환상적인 조화.

나는 넋이 나간 채로 천천히 전시회장을 돌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작품의 제목은… <바다>.

압도적 크기의 여자 흉상.

바다의 색감과 질감, 번들거리는 윤기, 나아가 거품의 표현까지.

작품의 설명란엔, <등>의 구절이 적혀 있었다.

― 이건 대체 뭐야? 함께 숙소를 쓰던 이가 물었다. 바다지. 바다를 보고 떠오른 걸 그렸을 뿐이야.

나의 언어가 보고, 만질 수 있는 작품이 된다는 것.

황홀할 만큼 매력적인 일이구나.

그리고 다음 작품.

이번에도 설치미술이었다.

제목은 <부부의 영광>.

골조로만 표현된 두 남녀.

그들은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아 있다.

여자에게서 나온 철사의 삐죽삐죽한 가시들.

그 가시들은 모두 남자를 향해 있다.

반면 남자는 형체 없이 빛으로만 표현된 상태.

블랙홀과 같은 신비로운 빛이 가슴에 빨려 들어가고, 그 외의 빛은 모두 밖을 향해 발산되고 있다.

아마… 화가와 아내의 모습을 구현한 거겠지.

작품의 설명란엔, 아니나 다를까.

― 무용해도 상관없어. 중요한 건 내가 하는 짓이 무용한 게 아니라는 거야. 내가 무용한 거지. 무용해지는 것도 나름대로 영광이군.

작품들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미술가들의 흥미로운 재해석.

그 재해석 속에서 내 소설의 구절은 다시금 빛났다.

그리고 마지막 부근에서 나는 멈칫했다.

“벽화네요.”

김미소 작가가 중얼거렸다.

작품의 이름은 <재>.

전시회장 한구석.

아주 어둡게 처리가 된 사방의 벽.

그 벽에는 쏘아놓은 흰 빛의 일렁임.

그 빛은 제멋대로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었다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 그가 떠난 그 여관. 그 여관의 그 방은 신성한 모든 것이 그려졌다가, 불타 버린 흔적 같았다.

“색감을 뒤집은 모양이에요. 원래는 흰 벽에 검은 재로 그림을 그렸다는 내용인데.”

“아니면 이런 게 아닐까요?”

김미소 작가가 말했다.

“검은 재가 흰 벽을 점점 덮어 가는 과정인 거죠. 그럼 어느 순간부터 검은 벽에 흰 얼룩이 묻은 것처럼 보이지 않겠어요?”

그녀의 해석에 난 깜짝 놀랐다.

그편이 훨씬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마음에 드네요.”

“이래 봬도 미술가의 조카 아니겠어요?”

김미소 작가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건 우리는 마지막 작품 앞으로 갔다.

그것은… 나의 시 <원의 동선>이었다.

“흠… 시는 어렵단 말이죠.”

김미소 작가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전시회장 한 벽에 크게 프린팅이 된 시.

― ………………………………………………………………

내가 걷는다 걷다가 뒤를 돈다 또 다시 걷는다 방향을 잃는다 발이 저절로 걷는다 걷는 일을 걷는다 같은 자리 걷는다 뒤를 다시 돈다 걷는다…

“어떤 느낌이 들어요?”

나는 김미소 작가에게 물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시를 응시했다.

“솔직히 말하면 뭔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괜찮아요. 느낌만 말해 줘요.”

“음… 제자리걸음을 하는 기분. 그래서 다시 전시회장을 한 바퀴 더 돌아다녀야 할 것 같은 기분?”

“정말 그렇게 느꼈어요?”

“네? 네.”

“그럼 성공이네요. 딱 그런 느낌을 주기 위한 시였거든요.”

“정말요?”

김미소 작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기쁜데요? 작가님 시를 이해하다니.”

“제 시,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요. 감성적으로 다가가야 하는 시인데, 난해한 이미지를 너무 해석하려고만 하니 어렵게 느껴지는 거죠.”

“하지만 분명… 남들은 가지지 못한 감각을 갖고 계신 건 분명해요.”

김미소 작가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런 칭찬에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이상 작가님!”

마침 누군가 뒤에서 날 불렀다.

이용식 협회장이 샴페인 잔을 들고 다가왔다.

“협회장님.”

“어디 계시는가 했더니, 여기 계셨군요. 저쪽에서 같이 건배부터 하시죠. 미소야, 너도 가자.”

“네. 아저씨. 가요, 작가님.”

우린 협회장을 따라서 전시회장을 가로질러 갔다.

작품을 마련해 준 미술가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김미소 작가가 얼른 샴페인 두 잔을 가져왔다.

“자, 받아요.”

“감사해요.”

사람들이 다 모이자, 협회장이 입을 열었다.

“자, 내일부터 우리 전시회가 시작될 테죠? 지금까지 고생들 많이 하셨습니다. 작품이 하나도 빠짐없이 뛰어나서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를 모르겠더군요.”

사람들 사이로 낮은 웃음소리가 배어 나왔다.

작품을 끝낸 사람만이 낼 수 있는 후련한 웃음소리.

“그렇다면… 이제 저희에게 이런 영감을 안겨 주신 이상 작가님의 건배사를 들어야겠죠?”

협회장이 빙그레 웃으며 건배사를 내게 넘겼다.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문인들도 아니고, 미술가들 사이에서 건배사라니.

“아….”

내가 어쩔 줄을 모르자 사람들이 킥킥댔다.

김미소 작가도 뭐가 그리 재밌는지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이런, 정신 차려야지.

“제가 적은 활자에 이렇게 형태를 불어 넣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배하시죠.”

나는 먼저 잔을 내밀었다.

미술가들이 한둘씩 잔을 갖다 댔다.

쨍쨍 하는 맑은소리가 전시회장에 울려 퍼졌다.

“음… 형태를 불어 넣는다라, 멋지네요.”

한 미술가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조금 쑥스러운 마음으로 샴페인을 삼켰다.

달콤하다.

그나저나 슬슬… 그 얘길 꺼내야겠지?

“저기, 여러분께 할 말이 있습니다만.”

내 말에 미술가들은 바로 나를 주목했다.

아무리 <등>을 주제로 한 전시회라지만… 이 전시회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실제로 작품을 만든 이들이지.

갤러리에서 대담을 연다면, 전시는 멈춰야 한다.

즉, 그 시간에는 관람객을 받을 수 없다는 것.

또… 외국 언론의 카메라가 싫을 수도 있고.

나는 가능한 한 정중하게 내 상황을 전달했다.

“…해서, 이 갤러리에서 대담을 열면 어떻겠냐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갤러리의 휴관일이나 전시가 끝난 시간에 대담을 하는 방향으로 진행을 하면 되지 싶은데… 또, 몇몇 작품에 대한 소개가 이루어질 수 있어서요. 한 분이라도 불편하다 하시면 진행은 하지 않겠습니다. 갤러리에서 대담을 하길 원하는 건 어디까지나 제작진 쪽이니까요.”

사람들은 대답이 없었다.

서로서로 눈치만 볼 뿐이었다.

아무래도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을까?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부담 갖지 마세요.”

내 말에 한 미술가가 말했다.

“아니, 그게… 저희가 싫다고 할 이유가 전혀 없어서요.”

“네?”

“거부할 이유가 없잖아요. 저희 작품이 유럽 쪽에 공개가 되는 일이고… 또, 전시에 방해가 되는 일도 아닌데요. 다들 그렇죠?”

그녀가 묻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솔직히 말하면… 되도록 많은 작품을 공개해 주시는 게 저희에게도 도움이 되죠.”

나는 협회장에게 물었다.

“그럼 동의를 받은 걸로 생각하면 될까요?”

“물론입니다. 저도 좋은 생각 같군요. 다만….”

다만?

“갤러리 쪽과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따 저와 함께 사무실로 가시죠.”

“네.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일단, 협회 쪽은 오케이.

남은 건 갤러리였다.

우리는 전야제 도중에 잠시 사무실에 들렀다.

갤러리 관계자가 상냥하게 우릴 맞았다.

우리는 그에게 차근차근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는 능숙하게 매뉴얼을 펼쳤다.

“간혹 이런 경우가 있어요. 방송용 촬영을 하는 경우죠. 음… 방송사가 외국이죠?”

“네. 독일의 D―TV입니다.”

그는 스읍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그게, 외국 방송은 한국 방송보다 대여비를 좀 비싸게 받거든요.”

그는 매뉴얼에 적힌 가격을 보여 주었다.

장소 대여비 치곤 꽤나 거금이었다.

뭐, 그래도 이 정도면….

“시간당 가격입니다.”

“시간 당이요?”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전시회장 대여가 비싼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이건 우리 대여료보다 비싼 거 아닙니까?”

이용식 협회장도 이해가 안 간단 듯 당황스러워했다.

직원은 조곤조곤 설명을 시작했다.

“애초에 갤러리는 예술가분들을 위한 거니까요. 예술가 대상 대여는 정부 지원금이 나옵니다. 또, 한국의 방송사 같은 경우도 문화예술관광부에서 지원금을 대 주죠. 하지만 외국 방송국은 지원금을 주는 곳이 없으니까요. 어느 전시회장을 가도 상황은 비슷할 겁니다.”

그제야 이해가 됐다.

그러잖아도 여긴 강남의 대형 전시회장.

임대료만 해도 어마어마하겠지.

나라의 지원금 없이는 돌아갈 수 없을 거다.

“일단 알았습니다.”

“예. 이 가격만 맞춰 주시고 몇 가지 유의사항만 지켜 주시면 충분히 촬영 가능합니다.”

그날 밤.

나는 이 사항을 메일로 전달했다.

워낙 거금이기도 하니, 다른 장소에서 대담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답장부터 확인했다.

과연 답장은 와 있었다.

짧은 영어지만, 내용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하… 참, 대단해.”

그 내용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첫째, D―TV는 임대료를 감당할 의사가 충분함.

둘째, 대담 중 틸 버켈이 ‘예상치 못한 협업’을 제안해도 너무 놀라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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