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09화 (109/204)
  • 109화

    피터 한 교수의 연구실 문 앞.

    금홍은 두 부의 원고를 껴안은 채 서 있었다.

    하나는 ‘팀 이상’ 회의 때 메모한 원고.

    하나는 초벌 번역 원고의 출력본.

    금홍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냥 메일로 달라고 하지….’

    며칠 전, 피터 한은 금홍에게 톡을 했다.

    ― <그 집>의 초벌 번역 언제 끝나죠?

    ― 며칠 안으로 끝날 것 같습니다.

    ― 초벌 원고 모두 출력해 오고, 포인트 메모 원고도 함께 가져와요.

    포인트 메모 원고.

    이건 번역가의 민낯과 마찬가지다.

    ‘…교수만 아니었으면 절대 안 보여 줬을 텐데.’

    하지만 별수 있나.

    대학원생에게 교수의 말은 절대적인 것을.

    “후우….”

    금홍은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똑똑―

    벌컥!

    노크를 채 다 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피터 한의 얼굴.

    “안녕하세요, 교수님. 원고 드리려고 왔는데요.”

    “…들어와요.”

    그는 휙 연구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냥 주고만 가고 싶은데.’

    하지만 역시, 별수 있나.

    금홍은 슬쩍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소파에 자리한 피터 한.

    금홍은 맞은편에 앉으며 원고들을 내려놓았다.

    피터 한은 원고를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다.

    금홍은 무릎을 꽉 쥔 채, 그저 기다렸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피터 한이 마지막 장을 덮었다.

    “미국 살다 와 본 적 없죠?”

    “네? 네.”

    “영문과 출신도 아니고. 번역은 왜 시작했어요?”

    금홍은 얼떨떨했다.

    지도 교수도 아닌 사람이 저런 걸 왜 묻는단 말인가.

    게다가 ‘그’ 피터 한이 고작 대학원생에게.

    ‘…솔직하게 말해야겠지.’

    “이상 작가님 등단하신 후부터 번역을 도와드렸거든요. 출간 원고 말고 홈페이지 공개용으로요. 그렇게 반년을 도와드리니….”

    “도와드리니?”

    “…재밌어져서요.”

    “재미로 했다?”

    그는 살짝 비꼬듯 말했다.

    저렇게 물으니 할 말이 없었다.

    금홍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불편하게 만드는 데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다양한 분야에서 번역 일 하기엔 무리인 거 알죠? 영어가 그리 능숙한 편은 아니야. 유학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네.”

    알고는 있었지만 아픈 말.

    금홍은 덤덤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문학적 문장을 구사할 줄 아네. 영어 좀 한답시고 문장 망쳐 놓는 어중이떠중이 번역가들보다 나은 데가 있어요”

    “네?”

    “답은 문학 번역뿐이야. 쓸데없이 여러 군데 찔러 보다가 시간 낭비 하지 말고 한 우물만 파요. 알았지?”

    “…아, 네.”

    “좋아요. 나가 봐요. 원고 번역 끝나면 연락하죠.”

    그리고 벌떡 일어나 제 자리로 가 버리는 것이었다.

    소파에 혼자 남은 금홍.

    황당한 얼굴로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그럼 가 보겠습니다.”

    피터 한은 대답도 없이 고개만 까딱.

    금홍은 얼떨떨한 채로 연구실을 나왔다.

    멍하니 연구실 앞에 선 금홍.

    “칭찬… 맞지?”

    정리해 보자면, 이런 말이었다.

    문학 번역에 재능이 있으니 열심히 하란 뜻.

    ‘…도무지 그렇게 들리지 않는 게 문제지만.’

    * * *

    <그 집>을 번역 맡긴 후.

    내 관심은 전시회에 쏠렸다.

    이용식 협회장은 하루가 멀다 하고 사진을 보냈다.

    다른 작가들이 완성한 미술품들의 사진.

    그런 사진을 보다 보니, 점점 조급해졌다.

    물론 <원의 동선>은 완성이 됐다.

    문제는 아직 비평이 안 왔다는 것.

    오진우 평론가는 손이 빠른 사람이다.

    고작 도록에 들어갈 짧은 비평인데… 늦어도 너무 늦는다.

    그렇다고 굳이 연락을 해서 독촉할 건 아니지만.

    전시회가 열흘밖에 남지 않으니 좀 불안하다.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때.

    우웅―

    톡이 왔다.

    오진우다!

    나는 바로 톡을 확인했다.

    ― 비평을 완성했습니다.

    ― 감사드립니다. 메일로 보내 주십시오.

    ― 글도 다 썼고 하니, 술이나 한잔하시죠. 원고도 만나서 드리겠습니다.

    술? 갑자기?

    나는 시계를 봤다.

    오후 일곱 시.

    ― 지금요?

    ― 네. 안 됩니까?

    일곱 시면 애매한 시간이다.

    열 시 취침을 생활 모토로 삼고 있으니.

    하지만 당장 써야 할 원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진우 평론가도 <등>을 읽으라 고생했을 테니….

    ― 나갈게요.

    나는 만남을 수락했다.

    한 시간 뒤.

    우린 종로의 모 사케집에서 만났다.

    내가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술을 한 병 비운 후였다.

    “오랜만입니다. 혼자 드셨어요?”

    “매일 혼자 먹습니다.”

    이렇다 할 애인도, 친구도 없는 모양이다.

    하긴, 그는 친구 하기엔 좀 힘든 스타일이지.

    “아, 원고 드리겠습니다. 메일로도 보내 드리긴 할 건데, 일단은 출력했어요.”

    그는 가방에서 클리어 파일을 꺼내 내밀었다.

    그 안에 든 건, 내 시 <원의 동선>과 A4 1매짜리의 짧은 비평.

    나는 그 자리에서 오진우 평론가의 글을 읽었다.

    ― 이상의 <원의 동선>의 독특한 태생에 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는 장편 소설 <등>에 그 뿌리를 박고 있는데, 소설과 시라는 장르의 근본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정신을 명확하게 계승하고 있다. 바로, ‘예술의 무용한 운동성의 증명’이다. (…)

    하여, 이 말줄임표는 말줄임표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시의 앞뒤로 말줄임표를 배치하는 것. 이것은 하나의 ‘작품’이라는 단절된 세계를 거부하는 선언과 마찬가지다. 즉, <원의 동선>이라는 작품의 앞뒤로 다른 무언가가 있으며, <원의 동선>은 그 무언가의 흐름 속 일부라는 것. 그렇다면 ‘무언가’는 무엇인가. <원의 동선>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을 부분적으로 취하는 것. 즉 ‘예술’이다. (…)

    <원의 동선>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단연 ‘걷는다’는 것이다. ‘내가 걷는다 걷다가 뒤를 돈다 또 다시 걷는다 방향을 잃는다 발이 저절로 걷는다’ 이와 같은 문장의, 한편으론 의미 없어 보이는 반복. 어떤가? 수없이 걷지만, 결국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듯한, 아득한 원의 운동이 느껴지지 않는가? 예술의 본질적 무용함이 그러하듯, 아름다운 움직임만 남기며.

    “…훌륭하네요.”

    오진우는 이상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 모든 단점을 덮을 정도로 시 비평 하나만큼은 정말 뛰어나다.

    이런 사람과 한 시대를 산다는 점이 고마울 정도로.

    그가 술을 한 잔 털어 마셨다.

    “힘들었습니다.”

    “고작 A4 1매인데요.”

    “<등>을 읽는 데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어요. 소설은 확실히 제 스타일이 아닙니다.”

    소설가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그의 눈엔 내가 ‘시인’으로밖에 안 보이나 보다.

    “이 비평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을 뽑아 전시에 곁들일 거예요. 괜찮죠?”

    “네. 그리고 <원의 동선>….”

    그가 안주를 하나 집어 먹었다.

    “정말 좋은 시였어요. 언어는 추상적으로 구사하는데, 시의 목적성은 분명하죠. 자신이 뭘 쓰고 있는지 알고, 작품을 장악할 줄 아는 시인만이 쓸 수 있는 작품이에요.”

    “과찬입니다. 꿈보다 해몽이죠. 시보단 비평이고.”

    “올해엔 시집을 내시죠.”

    그 말에 나는 하하 하고 웃었다.

    “기회가 되면요.”

    “기회를 안 만들고 계시잖습니까. 소설은 계속 쓰시면서.”

    그는 타박하듯 말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응수했다.

    “저야 원래 소설가니까요. 등단도 안 한 시인이 어디서 시집을 낸단 말입니까?”

    시인들에게 시집의 의미는 남다르다.

    소설가들에게 작품집은 그저 원고를 모은 것이지만… 시인은 ‘시집을 낸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자긍심.

    등단도 안 하고 시집을 내서 원성을 사고 싶진 않은데.

    “그렇게 말할 줄 알았습니다.”

    그는 지갑에서 뭔가를 꺼냈다.

    누군가의 명함이었다.

    “이게 뭐죠?”

    “출판사 대표의 명함입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분이죠.”

    “오진우 평론가가… 좋아한다고요?”

    오진우가 사람을 좋아해?

    게다가 놀란 점 하나 더.

    그 ‘대표’란 사람의 이름은 ‘이유나’.

    젊은 여자 같았다.

    “사실 메이저 출판사에서는 등단 시인의 시집만 만들어 줍니다. 비등단 시인은 시가 아무리 좋아도 해당 사항이 없죠. 하지만 이 대표님은 비등단 시인의 시집도 냅니다. 시만 좋으면 등단 여부와 상관없이. 시 평론가들 사이에는 숨은 고수를 찾게 해 주는 고마우신 분이죠.”

    오진우 평론가는 랩을 하듯 말을 쏟아 냈다.

    어지간히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비등단 시인의 시집도 내준다고?

    이유나라.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긴 하다.

    우리는 술잔을 좀 더 기울이다가 헤어졌다.

    그는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이 말을 반복했다.

    “시집을 꼭 내셔야 합니다. 그런 시들이 시집도 없이 떠도는 건 말이 안 돼요.”

    시들이 시집도 없이 떠돈다….

    인상적인 표현이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쓴 시는 고작 네 편인데.

    역시, 아직은 먼 얘기겠지.

    어쨌건 내 손에 들어온 이유나의 명함.

    일단은 지갑에 소중히 잘 넣어 놓았다.

    * * *

    며칠 후 아침.

    금홍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 혜경 샘!

    약간은 다급한 듯한 금홍의 목소리.

    “무슨 일 있어요?”

    ― 혹시 오늘 대한외대로 올 수 있어요?

    “네? 갈 수는 있는데… 무슨 일이에요?”

    ― 피터 교수님께서 부르셨어요. 번역에 대해 반드시 상의할 게 있다고.

    “당장 갈게요.”

    생각할 것도 없다.

    지금 번역보다 더 중요한 게 있겠나.

    금홍과 약속한 시간.

    나는 택시를 타고 대한외대 앞에 도착했다.

    방학의 대학이 다 그렇듯,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대학원생으로 보이는 무리만이 무료하게 돌아다닐 뿐.

    “혜경 샘!”

    금홍은 교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도 집에서 왔는지, 가방을 멘 채였다.

    “갑자기 무슨 상의래요?”

    “저도 몰라요. 그냥 오라고 하셔서… 워낙에 속을 알 수 없는 분이기도 하고요.”

    “일단 가 보죠.”

    우리는 교수실 건물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그리고 복도를 걷다가, 멈춰 서고 말았다.

    “이, 이런 적이 없는데?”

    피터 한 교수의 연구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모르겠어요. 왜 문을 열어 두셨지?”

    인기척을 느꼈는지, 안에서 피터 한이 튀어나왔다.

    그는 우리를 보고는 어서 들어오라 손짓했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그는 우리를 ‘기다린’ 거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해 문까지 열어 두고.

    처음 만났을 때.

    문틈 사이로 말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것도 참 장족의 발전이구나.

    “실례합니다.”

    나와 금홍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테이블엔 <그 집>의 원고들이 수북했다.

    날아다니는 듯한 필체의 필기가 가득한 원고들.

    꼼꼼하다 못해 강박적인 그의 성격을 알 것 같다.

    그는 풀썩 하고 우리 앞에 앉았다.

    밤을 샜는지 얼굴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대뜸 이렇게 말했다.

    “번역은 다 했습니다.”

    “정말입니까? 고생 많으셨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

    그렇다면 이제 누들 공모전에 보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아까 분명….

    “번역에 관해 상의할 게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아요. 그래서 두 분을 불렀어요. 지금 한 문장을 못 옮기고 있거든요. 이 부분을 어떻게 옮기느냐에 따라… 이 소설의 주제가 결정 나죠.”

    장르 문학에서 소설의 주제를 가를 문장.

    말할 것도 없이 대단히 중요했다.

    “어느 부분입니까?”

    그는 원고를 보지도 않고 내용을 읊었다.

    “마지막 챕터. 양오빠의 심문을 하는 수지. ‘대체 날 입양한 이유가 뭐야? 남자는 의외로 바로 대답했다. 부모들이야 무서웠겠지. 나 하나만 기르기엔. 그게 정답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는 덤덤하게 말했다.’”

    “중요한 부분이 맞네요. 하지만 글의 방향은 명확한데요. 이 가족이 가진 아이러니죠.”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값진 주제 의식입니다. 하지만 이 문장 때문에….”

    그가 픽 하고 웃었다.

    자신도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 집>은 누들 공모전에서 탈락할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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