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08화 (108/204)

108화

도넛 형태의 갤러리.

<등>에 보여 준 예술의 무용한 낭만.

난 이 두 가지 요소에 영감을 얻었다.

한 인간의 제자리걸음.

나아가 ‘원’을 그리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아름다움.

출발지도 목적지도 없는 이미지.

그저 원 안에서 돌고 도는 것만이 전부인 움직임.

그 무용한 이미지의 영원성.

더 고민할 것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바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제목은 <원의 동선>.

이 시에서 가장 신경을 쓴 점.

그건 바로 시의 시작과 끝을 삭제하는 일.

이 시의 첫 행의 시작은 말 줄임표(…).

마지막 행의 마무리 역시 말 줄임표(…).

또한, 주로 활용한 건 ‘걷다’라는 동사였다.

갤러리를 뱅뱅 도는 느낌과 연결될 수 있게.

이를테면….

‘내가 걷는다 걷다가 뒤를 돈다 또 다시 걷는다 방향을 잃는다 발이 저절로 걷는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걷다’와 ‘말 줄임표’.

나는 그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몇 시간을 ‘놀았다’.

그건 꽤 즐거운 작업이었다.

미술가들이 작품을 빚듯, 이리저리 살펴보고 다듬으며.

“흠….”

썩 마음에 들었다.

의미도 목적도 없이 공회전하는 시.

‘존재’하는 것만으로 가치를 주는 듯.

예술의 낭만적인 무용성과 잘 연결되는 듯했다.

그리고 남은 건….

오진우 평론가에게 연락을 하는 것.

이용식 협회장과 이런 얘길 나눴다.

― 제 시를 전시하는 건 좋으나, 약간의 해설이 필요할 겁니다.

― 아무래도 그렇겠죠. 선생님의 시가 쉬운 편은 아니니. 하지만 저희 쪽 사람은 미술 평론가뿐이라… 괜찮은 문학 평론가를 알고 계시면 함께 진행하시죠.

―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일에 딱 맞는 평론가를.

나는 오진우 평론가에게 전화를 했다.

내심 이런 즐거운 생각이 들었다.

이번 기회에 그를 골려 줄 수 있겠다고.

<원의 동선>에 대한 해설을 쓰려면, 반드시 <등>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산문을 읽기 싫어하는 오진우 평론가.

과연 어떻게 나올까.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그가 전화를 받았다.

― …네.

“저 이상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 네.

여전하군.

반가워하지도 냉대하지도 않는 말투.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티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 점이 싫진 않지만.

“저, 작은 청탁을 드리고 싶어 연락을 했습니다.”

― 시를 쓰셨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오진우 평론가는 시 귀신처럼 달려든다.

“네. 시를 한 편 썼습니다.”

― 하겠습니다.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 네. 하겠습니다.

어디 가서 사기당하기 딱 좋은 성격이다.

이렇게 앞뒤 안 보고 달려들다니.

“그럼 하는 걸로 하죠.”

― 일단 시부터 보내 주시죠.

“아, 그게… 이번 시는 특이한 방법으로 발표할 예정입니다.”

― 네?

“전시회를 열 거거든요.”

나는 미술가협회와 열게 될 전시회에 대해 설명했다.

오진우 평론가는 말이 없다.

“즉, 평론가님의 글은 제 시와 함께 도록에 실릴 겁니다. 그리고 중요한 문장은 함께 전시가 되겠죠.”

― …그렇군요. 그렇게 아무 사람에게나 막 보여 주는 글을 쓰고 싶진 않지만 어쩔 수 없죠.

아무 사람에게나 막 보여 주는 글이라니.

하여간 이 사람도 참 골때린다.

― 일단 시를 주시죠.

“시를 받으시기 전에,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 또 뭡니까?

“이 시는 제 소설 <등>의 전시를 위해 쓰여졌으니… <등>도 함께 읽으셔야 해요.”

― …꼭 그래야 합니까?

딱 예상대로의 반응이었다.

산문을 썩 좋아하지 않는 오진우 평론가.

그 산문을 바탕으로 시를 해석하는 건 더 싫겠지.

“네. 꼭 그러셔야 합니다.”

― ….

“정 그러시면 다른 분께 맡길까요? 제가 아는 평론가 중에….”

― 아,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오진우 평론가가 얼른 말을 끊었다.

그리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 후… 별수가 없군요.

“아무리 그래도 제 소설인데 너무 그러지 마시죠.”

― 후… 소설을 읽어 본 지가….

내 말은 하나도 안 듣는군.

하지만 죽어도 안 하겠단 소린 안 한다.

뭐, 이런 점이 매력이긴 하지.

“그럼 신라문학에 요청해서 <등>을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평론가님.”

그렇게 비평을 받기로 약속한 후.

나는 시를 한번 퇴고하고 그에게 보냈다.

‘즐거운 독서 되십시오^^’라는 문자와 함께.

* * *

팀 이상의 <그 집> 회의.

분량으로 보아,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다.

우리는 오늘도 금홍이 일하는 카페로 왔다.

번역 진행 상황이 궁금하기도 해서, 금홍에게 물었다.

“피터 한 교수님은 잘 지내세요?”

“여전하시죠. 초벌 하자마자 계속 넘겨 드리고 있어요. 속도가 얼마나 빠르신지….”

스케줄 타령은 다 어디 갔나 싶다.

역시 원고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아, 그 뒤로 연구실로 몇 번 더 부르셨어요. 내용 합의가 필요한 부분. 간단한 거라서 제 선에서 해결했어요.”

“오올~ 금홍샘 번역자 다 됐네요?”

지훈이 놀리듯 말했다.

금홍은 그런 지훈이 피곤하다는 듯 물끄러미 봤다.

“경건한 마음으로 시작하죠?”

“옙. 시작하시죠, 형님.”

두 사람이 원고를 펼쳤다.

나 역시 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

수지는 연쇄 살인마의 정체가 양오빠라는 걸 알게 된다.

모든 증거 역시 그를 향하는 상황.

경찰인 그녀는 양오빠를 체포하고, 그 동기를 수사한다.

마주 보고 앉은 의붓남매.

극도의 긴장감을 끌어 올려야 하는 지점이다.

“읽어 볼게요. ‘수지는 키보드를 치는 손가락이 떨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지금 눈앞에는 연쇄 살인마이자, 친부모의 원수를 갚아 준 의인이 앉아 있었다. 차가운 회색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는 물었다. 제노프 강둑 살인 사건, 혐의 인정합니까? 그는 대답했다. 모두 인정해. 한인마트 주인 부부 살인 사건, 혐의 인정합니까? 모두 인정해. 코놀프 산장 일가족 살인 사건, 혐의 인정합니까? 귀찮게 좀 굴지 마. 난 모두 인정한다고 말했어. 네가 사건 파일로 가지고 온 사건 모두 말이야. 그는 마치 나른한 주말 오후에 놀아 달라고 떼를 쓰는 여동생을 타박하듯 말했다. 그 말투에 수지는 굳어 버린 채 눈만 깜빡였다. 잊고 있었다. 그는 연쇄 살인마이자 의인인 동시에 그녀의 가족이었다.’”

“이 부분, 이 소설에서 긴장감이 가장 높아야 하죠? 키워드는 ‘모두’와 같은데요. 가장 많이 사용되고, 앞으로 나올 수지 부모를 죽인 살인마에 대한 살인도 양오빠가 했다는 걸 암시하니까요.”

지훈이 말했다.

“맞아. 여기는 말의 맛이 좀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금홍 샘?”

“‘난 모두 인정한다고 했어’ 이 부분의 ‘모두’를 볼드 처리를 하는 게 좋겠어요. 미국 스릴러는 활자의 이미지로 강조를 넣는 걸 선호하거든요. 또… ‘모두’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많은데, 볼드로 들어가는 단어가 특히 더 강렬해야 할 것 같아요. 이 단어는 제가 좀 더 알아볼게요.”

“좋아요. 그럼 다음 문단. ‘수지는 그가 저지른 모든 살인 사건의 목록을 역순으로 쭉 올라가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첫 살인에 시선이 멈추었다. 폴 빌라드… 살인 사건, 혐의 인정합니까? 그는 말이 없었다. 우스운 바보를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보며. 인정합니까? 수지가 다시 물었다. 절그럭…. 그가 수갑을 찬 손을 테이블 위로 올려 두었다. 그리고 몸을 살짝 숙인 채 입을 열었다. 중요한 말을 빼먹은 것 같은데? 내게 이렇게 말해야지. 고마워, 오빠. 라고 말이야. 수지는 순간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폴 빌라드는 수지의 부모를 죽인 바로 그놈이었다. 문득, ‘그 집’에서 적응하기 위해 견뎠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양부모의 규율을 이해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던 시간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는 것만 같은 막막함. 아무것도 딛지 않은 상태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긴장감. 그런 끔찍한 느낌이… 다시금 그녀 안에서 스멀스멀 차올랐다.’”

난 거기까지 읽었다.

지훈과 금홍은 고요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어때, 지훈아?”

“…클라이맥스네요. 살인 사건의 긴장감은 댈 것도 아니에요. 소설의 처음부터 끌고 왔던 이 심리가 바로 여기에서 폭발하는 거예요. 하지만 느낌이….”

“시원스럽지가 않지?”

“네. 그런 종류의 폭발적인 감정은 아닌 것 같아요. 어떤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이를테면 이런 거야. 물속에서 아주 오랫동안 잠겨 있다가,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수면으로 겨우 나간 느낌. 헉헉대며 숨은 쉬지만, 계속 숨이 차고, 목에는 물이 들어오는 거야. 겨우 숨을 쉬는 와중에 어찌할 수 없는 압박감이 함께 느껴지는 거지.”

금홍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지막 문단을 묶어 뭔가를 썼다.

클라이맥스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난 계속 <그 집>을 읽었다.

“‘수지는 제대로 숨을 쉬기 위하여 숨을 쉬었다. 일관되고 자연스러운 호흡을 이어 가는 양오빠 앞에서.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날 위한 게 아니었잖아, 오빠. 오빠라는 말에 그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리고 눈웃음을 지으며 웃었다. 그럼 누굴 위한 거였다고 생각하는데? 수지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 집에 들어서면서 가지고 있던 의문. 그들이 그녀를 냉대하면서까지 숨겨 왔던 것. 그것은 바로 이 눈앞의 남자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자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타고난 성향. 수지는 물었다. 아주 오랫동안 참아 왔던 물음이었다. 대체 날 입양한 이유가 뭐야? 남자는 의외로 바로 대답했다. 부모들이야 무서웠겠지. 나 하나만 기르기엔. 그게 정답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는 덤덤하게 말했다.’”

“이 뒤는 바로 수사 내용으로 넘어가죠?”

“응. 여기까지가 긴장도가 가장 높은 부분이야. 수지의 존재를 두고 아이러니가 탄생하잖아. 수지가 그 집의 일원이 된 건, 양오빠에 대한 부모의 두려움 때문이었어.”

“일종의 수단처럼 말이죠?”

“그렇지. 하지만 결국 수지가 양오빠를 체포하잖아. 여기서 가족의 위계 역시 뒤집히는 거지.”

“난 그래서 이 구조가 마음에 들어요. 휴머니즘적이라고 해야 하나, 대중적이라고 해야 하나. 이걸 한 사회로 본다면… 소외된 이들이 결국 그 사회의 근본적 문제를 고친다고도 해석될 수 있고요.”

“그리고 금홍 샘. 여기서 독자는 수지의 판단력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어야 해요. 양오빠가 원수를 죽여 준 의인이 아니라 그저 연쇄 살인마에 불과하다는 판단을 간접적으로 내리는 부분이니까요.”

“네. 체크했어요. 이 부분에서는 좀 더 강한 어휘를 구사하는 방향으로….”

회의는 계속 그렇게 진행됐다.

마지막이니만큼 최고의 집중력으로.

그리고 카페 마감을 십 분 남긴 시간.

우리는 <그 집>의 회의를 마쳤다.

“이걸 다 하다니!”

지훈이 기지개를 시원하게 켜면서 외쳤다.

금홍의 얼굴에도 다크서클이 잔뜩.

나도 온몸에 힘이 빠졌다.

“피터 한 교수님께 잘 전달해 주세요. 금홍 샘.”

“네… 고생 많으셨어요.”

금홍이 원고를 착착 챙겨 가방에 넣었다.

저 원고가 피터 한에게로 넘어가면….

“대충 언제쯤 번역이 다 끝날까요?”

“완전히 끝내는 건… 한 달 안으로 마무리돼요.”

‘누들 공모전’의 마감은 한 달 반 후.

시간은 충분했다.

피터 한이 딴지만 걸지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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